에디터 통신
▶ 『나는 당신에게만 열리는 책』
이동진의 빨간책방 오프닝 에세이
안녕하세요. 저는 위즈덤하우스 편집자 유희경입니다. 이유 없이 모두 밉던 청소년 시절, 저를 붙잡아준 건 라디오였습니다. 전파를 타고 들려오는 디제이의 목소리와 음악들은 언제나 다정했어요. 라디오를 켜는 순간 저는 이해받지 못하는 외톨이가 아니게 되었죠.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라디오와 멀어지게 되더라고요. 그렇게 추억 속 감성으로만 묻어두었던 라디오를, 요즘 다시 듣는데요.
지금 여러분이 듣고 있는 팟캐스트입니다. 내용이나 형식은 예전의 느낌과 다르지만 역시 다정해서, 살아가는데 큰 힘을 얻고 있어요. 오늘 소개해드릴 책은 제가 즐겨듣는 팟캐스트 <이동진의 빨간책방>의 오프닝들을 모아놓은 책 『나는, 당신에게만 열리는 책』입니다
시그널 음악과 함께 이동진 작가가 들려주는 오프닝 멘트들, 참 좋죠? 저 역시 참 좋아했고, 듣고 잊기엔 너무 아까운 글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빨간책방>에 간간이 모습을 드러내곤 하는 작가 허은실 씨의 글들인데요.
애청자들에게 위안을 주었던 오프닝 중 가장 좋았던 것들만 모았습니다. 책의 한 부분을 읽어드릴게요. 달리 보면 ‘冊’이라는 한자는 ‘멀 경(?)’자 둘이 엮여 있는 모양이기도 합니다. 멀고 먼 것들이 책이라는 매개를 통해 만납니다.
이곳과 저곳, 먼 존재들을 연결하는 끈. 그게 바로 책이 아닐까요.
당신과 나, 우리는 이렇게 서로 멀리 있습니다.
동시에 나와 당신, 우리는 이렇게 가까이 있습니다.
우리 사이에 책이 있기 때문이지요.
이 고독한 세계에서
책이든
무엇이든
연인이든
타인이든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것은
누군가, 무언가와 연결돼 있다는 느낌입니다
이 책의 한 챕터인 <이 고독한 세계에서 책은>의 일부인데요, 이처럼, 『나는, 당신에게만 열리는 책』은 일상을 읽어보게 만드는 책입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소슬(蕭瑟)바람’이란 단어에서 쑥 향이 나는 거문고 소리를 낙엽의 마른 잎맥에서 여름 나무의 시원한 그늘을 읽게 됩니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사람의 표정이나 길을 걷다 멈춰 서서 들여다본 들꽃, 나뭇가지에 단풍이 들어가는 과정 등 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모든 것을 찬찬히 읽어내는 방법을 배우게 되죠.
세상의 작은 것들을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글자들에 눈을 맞추듯 읽다 보면 작고 당연한 것들의 소중함을 느끼게 된다고, ‘읽어내는 것’ 즉 독서란 사람이 살아가는 일과 다르지 않다고, 이 책은 나직한 목소리로 일러줍니다.
허은실 작가의 에세이 『나는, 당신에게만 열리는 책』의 5부 108편의 글들은 작가가 신중히 캐내어 매만진 말 그리고 삶에 조심스레 밑줄 그으며 공명하는 독서의 경험을 독자에게 건네는 책이 되어줄 겁니다.
소리 나는 책
대로는 오퇴유의 경마장을 끼고 뻗어 있었다. 한쪽은 말들이 달리는 트랙이었고 다른 쪽은 모두 같은 모형에 따라 지은, 작은 광장들로 분리된 건물 군이었다. 나는 그 화려한 병영 같은 건물들을 지나 게이 오를로프가 자살한 집 앞에 이르렀다. 마레샬 리요테 가 25번지. 몇층일까? 그후 분명 수위는 바뀌었을 것이다. 게이를 층계에서 만나곤 했거나 그 여자와 엘리베이터를 같이 탄 적이 있는 어떤 주민이 아직도 이 건물에 살고 있을까? 아니면 내가 이곳에 자주 오곤 하는 것을 보았던 어떤 사람이 나를 알아보지 않을까?
저녁이면 가끔 나는 가슴을 두근거리며 마레샬 리요테 가의 계단을 올라가곤 했을 것이다. 그 여자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으리라. 그의 창문들은 경마장 쪽으로 나 있었다. 그 꼭대기에서 경마를 구경하면 재미있었을 것이다. 마치 사격놀이 스탠드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달려나가서 모든 목표물들을 다 맞히면 큰 상을 타게 되어 있는 작은 인형들처럼 아주 조그맣게 보이는 기수들이 내닫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과연 기이한 느낌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 어느 나라 말로 이야기했을까?영어?조르지아제 노인과 함께 있는 사진은 그 아파트에서 찍은 것일까? 아파트는 어떤 가구들로 꾸며져 있었을까?' ‘귀족집안 출신’이며 ‘존 길버트의 절친한 친구’였던 하워드 드 뤼즈란 이름의-나?-남자와 모스크바에서 태어나고 팜 아일랜드에서 러키 루치아노를 알았던 옛날 댄서는 서로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었을까?
-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파트릭 모디아노/문학동네) 中에서
이동진
어찌어찌 하다보니 ‘신문사 기자’ 생활을 십 수년간 했고, 또 어찌어찌 하다보니 ‘영화평론가’로 불리게 됐다. 영화를 너무나 좋아했지만 한 번도 꿈꾸진 않았던 ‘영화 전문가’가 됐고, 글쓰기에 대한 절망의 끝에서 ‘글쟁이’가 됐다. 꿈이 없었다기보다는 꿈을 지탱할 만한 의지가 없었다. 그리고 이제, 삶에서 꿈이 그렇게 중요한가라고 되물으며 변명한다.
양명욱
2015.12.08
양명욱
2015.12.08
양명욱
2015.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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