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덕 감독의 팬인 나는, 그의 모든 영화들을 보고 다시 볼 정도로 열렬한 팬심을 발휘해왔다. 작품성은 물론, 로케이션의 달인이기도 한 그. 괴기스럽긴 하지만 꽤나 좋아하는 영화인 <시간>을 두 번째 감상할 때 불현듯 욕구가 샘솟았다. 바로 영화 속 로케이션을 찾아가기로 말이다.
주인공 새희(성현아)와 지우(하정우)가 그들만의 추억을 남기는 신(scene)에서 ‘저기는 어딜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두 손이 포개어진 큰 조각 앞에서 사진을 남기는 두 남녀의 모습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큰 두 손 안에서 평온의 기운을 만끽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는 ‘행복’이 물씬 배어있었는데, 그 느낌이 내게 전해지는 순간 그 장소에 ‘도달’해야만 한다는 욕구가 결심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먼저, 그 장소를 검색했다. 인천 옹진군 북도면 모도리에 있는 배미꾸미조각공원이라는 곳. ‘배미꾸미’라는 단어가 생소해 찾아봤더니, 배 모양으로 생긴 섬인 ‘모도’에 배 밑구멍처럼 생겼다는 데에서 ‘배미꾸미(배밑구미)’라 불리게 됐다고 한다. 그곳에 조각가 이일호의 작품이 전시되기 시작하면서 관광지가 됐다고 한다.
어딘가로 향하기 전, 목적지만 정해두고 ‘일단 가자!’는 주의인 나는 우선 떠났다. 배미꾸미조각공원을 찾기 위해서는 수고깨나 감수해야 하는데, 배를 타고 내려 승용차나 버스로 환승해야 한다. 삼목 선착장에 차와 함께 몸을 실은 후, 신도 선착장에 내려 모도 다리를 지나 비포장길 위를 달려 후미진 곳까지 들어가야 만날 수 있는, 관광지 치고는 꽤 구석진 공간이다.
그럼에도 오로지 포개진 손 조각을 보겠노라는 일념 하나만으로 울퉁불퉁 온 몸을 자극하는 비포장 도로 위를 ‘행진’해나갔다. 목적지로 향할수록 울퉁불퉁한 길들이 몸을 괴롭혔지만 서서히 드러나는 조각공원의 입구를 마주하니, 절로 입가에 미소가 퍼졌다. 마치, 질리도록 내리던 장맛비가 그치고 쨍쨍한 여름날의 햇살을 온 몸에 받는 듯한 기분이었다.
공원의 전경
그 기분을 가슴 고이 안은 채 조각들을 보러 ‘달려’갔다. 스피커를 뚫고 나오는 묘한 음악들이 나를 맞았다. 조각공원이나 조형미술관 등을 즐겨 다녔던 나이지만, 배미꾸미조각공원은 그야말로 ‘이색적’이었다. 바다가 펼쳐진 곳에서 조각을 감상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인데, 바다와 미술전시를 좋아하는 나에겐 최고의 장소로 기억될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이일호 조각가의 작품, 30여 점이 바다 바로 앞에서 관람객들을 반긴다. 이 조각들의 콘셉트는 ‘사랑(love)’이다. 이일호 조각가는 ‘초현실주의’를 지향하는데, 그 사상이 에로틱한 조각들과 만나 신비로운 매력을 발휘해낸다.
모성애가 흠씬 느껴지는 바다와 나란히 놓인 조각들이 어우러진 풍경은 ‘세상 모든 사랑’ 그 자체였다. 한편,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공원의 전경은 이전에 느꼈던 에로틱함과는 다른 평온한 놀이터 같은 느낌을 자아냈다. 같은 사물(혹은 사람)이라도 어떠한 상황에서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리 느껴진다는 걸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던 순간이다.
조각들은 개별적으로 보면 특색이 강한데, 재미있게도 모여있으니 한껏 조화롭기도 했다. 대개, 사랑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리면 자연스레 연상되는 색들(가령, 분홍빛 계열)과는 달리, 에메랄드, 녹색빛을 띄는 작품들이 많다. 작가는 인공미가 아닌 자연미까지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공원들의 푸르름과 어우러지기를 바랐던 것일까? 혹은, 사랑이 가장 자연스러운 것임을 내포하고 있는 것일까? 이렇듯, 조각들은 초현실주의 작품들이 그러하듯 나로 하여금 다양한 해석들을 가능케 했다.
내가 이곳을 찾게 된 궁극적인 목적. 그러니까 ‘꼭 보아야 할 작품’은 역시나 가장 좋은 자리를 꿰차고 있었다. 공원의 중앙부에서 우리의 몸집의 두 배 이상은 되는 커다란 규모를 자랑하는 양손 조각은, 그야말로 초현실주의 그 자체를 여과 없이 뽐내고 있었다. 작품을 보는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안기고 싶다’와 ‘나도 저기 앞에서 사진을 찍어야지’ 였다. 아쉽게도 내가 찾았을 때는 영화에서 봤던 하늘로 향하는 계단은 발견할 수 없었지만, 영화에서 봤던 장면이 나와 공존한다는 것에 대한 환희로 벅차 올랐다. 작품의 제목은 ‘천국으로 가는 계단’. 그 계단이 사라져버린 것은 못내 아쉬웠지만, 계단이라는 매개체가 없어도 우리의 기도와 믿음으로 천국으로 갈 수 있을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하며 위안 삼았다. 조각에 대한 작가의 철학은 나를 감동시켰다.
‘손가락을 계단처럼 층층이 쌓아서 하늘로 가는 다리를 만들었다.
새가 되지 못한 나는 무겁고 컴컴한 땅의 중력에서 벗어나 바다 건너 하늘로 가고 싶다.
굼뜨고 미련한 삶을 버리고 새털처럼 가볍게 하늘로 날아야 하는데,
어깻죽지에 바늘이 돋지 않으니 굼뜨고 미련한 조각으로나마 하늘 계단을 만들어보는 수밖에.’
(작품설명 중)
내가 찾아왔던 그 조각 ‘천국으로 가는 계단’
우리 모두 이 같은 바람을 안고 살아간다. 일상의 염증에 이어 삶에 대한 회의가 느껴질 때면 하늘을 올려다보게 되고, 드넓은 하늘과 깨끗한 바람을 만끽하며 자유로이 날아다니는 새가 되고싶다는 생각. 그리고 그 날아 움직이는 곳이 하늘 그 이상의 천국이기를 염원하는 것도 우리의 바람일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늘 결핍 속에서 욕망을 안고 살아가는데, 그렇기 때문에 비행체험이나 다양한 예술활동을 통해 간접체험들을 영위한다. 세상 모든 것들을 가질 수 없다는 결핍의 요소가 다양한 배움에 대한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아마, 나와 비슷한 생각으로 이곳을 찾은 관광객들은 사진을 남겼을 것이다. 개인의 소망이 이뤄지길 바라면서 말이다.
다음으로 인상 깊었던 작품은 ‘교감’. 교감이라는 단어는 듣기만 해도 좋다.
한 사람에 의함이 아닌 두 사람 이상이 만들어가는 것. 그냥 만들어가는 것이 아닌 마음으로 형성해나가는 것이 교감이다. 교감이 일어날 정도의 관계라면 이미 물리적인 시간과 그것을 뛰어넘는 정신의 시간을 교류했을 것이다. 이심전심(以心傳心), 교감. 이 같은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가슴 벅찬 아름다움. 이 점을 표현해 낸 작가는 작품에 대해 ‘빛보다 빠른 게 눈빛이다. 억겁의 말 못한 사연도 고운 눈빛 한 번이면 다 풀어진다’라고 설명했다. 그렇다. 사랑하는 이들이라면 서로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것을 눈빛만으로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이란, 교감에 기인되는 것이 분명하다. 오죽하면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라는 노랫말이 등장했을까.
지금은 상경해있지만, 부산이 고향인 나는 20여 년을 그곳에서 살아와서인지 늘 바다가 그립다. 그 마음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는 글귀를 발견한 순간 ‘울컥’했다. ‘나의 귀는 소라, 바다 소리를 그리워하오’ 나 또한 바다 소리와 파도소리를 그리워하고 있던 터라 본능적으로 셔터를 눌렀다. 그리곤 그 앞으로 펼쳐진 바다를 한참 동안 만끽했다.
내가 찾았던 때는 썰물 때였다. 마침 갯벌놀이의 재미에 푹 빠져있는 소녀들의 모습을 보며 괜히 내 마음까지 천진해졌다. 아이들의 순수한 모습을 담으며, 소라를 이용해 바닷소리를 내 귀에 밀착시켰다. 그저 ‘아…!’ 하는 감탄사밖에 나오지 않았다.
멀리서 보면 마치 ‘진짜 나무’처럼 보이는 이것(아래 사진) 또한 작품이다. 철제로 나뭇가지가 표현된 이 작품은 이곳을 직접 찾지 않았다면 존재조차 모를 뻔했다.
이 사진을 SNS에 올린 적이 있는데, 반응이 뜨거웠다. “저곳은 한국인가요?” “저기가 어디죠? 바위 위에 어떻게 나무가 자라죠?”라는 식의 질문들이 나를 웃게 만들었다. 이 작품은 ‘직접 가서 온 몸으로 느껴야 온전히 이해될 것’이다. 바닷바람이 조각을 스칠 때마다 울려 퍼지는 아름다운 소리는 글로 표현하기에 미안할 정도로 아름답다. 정말 이 조각에 대한 호기심이 있다면 직접 만나보길 권한다. 단언컨대, 시각적 재미뿐 아니라 청각의 신선함에 매료될 것이다.
아마 조각들이 없었다면 이곳은 여느 바닷가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 사랑의 조각들이 들어서면서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은 함께 찾은 이들과의 추억을, 자연을, 예술을, 그리고 그 외의 모든 것들을 사랑할 수 있는 여지가 마련됐다. 이색적인 공간을 찾아 추억을 만들고 싶은 모든 이들에게 추천하는 국내여행지 배미꾸미조각공원. 일상에 지친 우리들에게 사랑과 쉼을 제공하는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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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다함
최다함은 디지털영상 및 영화 전공 후 기자생활을 거쳐, 현재는 회사 내 전략기획팀에서 PR업무를 맡고 있다. 걷고 사유하는 것을 즐기며, ‘하고 싶은 건 일단 해보고 웃고 울자’ 식의 경험론주의를 지향하는 자유분방한 성격의 소유자이다. 영화, 공연, 전시회감상 등 다양한 문화 활동의 쾌락을 만끽 중이며, 날씨 좋은 계절에는 서울근교든 장거리 장소든 여행할 곳들을 찾아 몸을 통한 독서를 실행하고 있다. 현재 네이버에서 ‘문화소믈리에, 최따미’라는 타이틀의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으며, 예스24 파워문화블로거 및 네이버 오늘의 책 선정단, tv5monde한국에서 프랑스영화 에디터로 활동 중이다. ‘글쓰기’를 좋아하는지라 “평생 글과의 인연은 떼려야 뗄 수 없을 것이다”라는 포부를 지닌 그녀다. 자칭 컬처 소믈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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