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는 모든 음악가들은 저마다 길 위의 삶에 대해 해줄 이야기가 있다.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가 다 그렇듯이 사실관계는 흐려지고, 이름은 헷갈리고, 말은 윤색되거나 생략된다. 하지만 가끔씩 누군가가 나타나서 사건이 일어났을 때처럼 명확하게 자세한 이야기를 전할 것이다. ……바로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이하 LSO)에는 두 개의 역사가 나란히 흐른다. 하나는 공식적인 역사로 1904년에 시작되어 지금까지 중단 없이 이어지고 있다. 그 옆으로 연주자들의 기억과 경험으로 이루어진 은밀한 역사가 함께 흐른다. 이 가운데 일부는 외부에 제법 알려졌고 일부는 꽁꽁 감춰져 있는데, 아무튼 종이에 기록된 것은 극히 드물다.
2007년부터 나는 순회공연을 다닐 때마다 LSO 블로그에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오케스트라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벌어진 일들을 기록한 것이다. 그런데 해가 지나면서 음악회를 묘사하는 일은 점점 더 힘겨워졌고, 어느덧 내 글은 나 자신의 기억과 경험을 기록한 것이 되었다. 내 관점에서 바라본 오케스트라 역사가 된 것이다.
LSO 기록보관소는 오케스트라 역사에서 중요한 많은 순간들을 자료로 갖고 있는데, 지금까지도 사람들에게 회자되면서 상상력을 자극하는 사건이 하나 있다. 바로 1912년 북아메리카 순회공연이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연주자들은 하마터면 타이타닉호를 탈 뻔했다.) 유럽 오케스트라로서는 처음으로 대서양을 건너 순회공연을 간 사건이었으므로(약간 착오가 있는데 이보다 먼저 1909년에 독일의 드레스덴 필하모니가 미국 순회공연을 가진 적이 있었다_옮긴이) 당연히 그 여행에는 많은 이야깃거리가 있었을 것이다. 오랫동안 이 자료들은 모두 시간 속에 사라진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던 중 2년 전 기록보관원 리비 라이스와 우연히 이야기를 나누다가 뜻하지 않게 과거로의 문이 열렸다. 1912년 순회공연에 대해 우리가 가진 자료들이라고는 개략적인 정보들로 주로 보도자료와 행정 문서였다. 한마디로 공식적인 자료들이었고, 우리 선배 음악가들이 신대륙을 보면서 무엇을 느꼈고, 음악회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고, 무엇을 먹었는지 등의 이야기는 알 길이 없었다. 그때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리비 앞으로 로버타 갈리아니라는 사람이 보낸 소포가 배달된 것이다. 그녀는 고모할머니의 다락방을 치우다가 할아버지의 물품을 발견했는데, 그 가운데 LSO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작은 공책을 보고는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리비에게 보냈다고 한다.
공책의 주인은 LSO의 팀파니 연주자 찰스 터너로 1912년 북아메리카 순회공연 중에 자신이 겪은 경험을 차곡차곡 일기로 적어놓았다. 몇 주 뒤에 또다시 믿기지 않게도 잭 니스벳이라는 사람이 우리에게 연락해서는 자신의 할아버지인 플루티스트 헨리 니스벳이 비슷한 시기에 적은 일기를 보내왔다.
하룻밤 사이에 내가 가진 많은 의문이 풀렸고, 우리가 알고 있던 지식에서 공백이 메워졌다. 터너와 니스벳의 글을 통해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00년 전에 오케스트라 순회공연이 어땠는지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한동안 사라진 줄 알았던 이야기들이 내 앞에 기록된 채로 펼쳐져 있었다.
일기를 훑어보면서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것이 바뀌었는가, 그럼에도 얼마나 많은 것이 또 그대로인가. 그 순간 이 책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처음에는 블로그 글을 확장한다는 기분으로 책을 만들 생각이었지만, 조사를 하면서 더 많은 정보를 얻게 되었고 프로젝트가 생각보다 커져서 1912년과 2012년의 LSO를 나란히 배치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이 책은 1912년을 다룬 장과 2012년을 다룬 장이 번갈아가며 진행된다. 주제는 자연스럽게 여행, 지휘자, 새로운 장소의 발견, 집을 떠나 지낸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삶과 죽음의 문제를 다룬다.
이 책에서 여러분은 1912년의 연주자들과 2012년 현재 내가 LSO에서 함께 일하는 음악가들을 만나게 된다. 또한 전설적인 지휘자 아르투르 니키슈와 독특한 매력을 가진 현 상임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를 만나게 된다. 우리는 런던에서 일본, 중국, 유럽의 곳곳으로, 그리고 오케스트라가 처음으로 방문한 지 정확히 100년이 되는 뉴욕으로도 당연히 날아갈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오케스트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나아가 세계 정상급 오케스트라에서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음악가의 삶이 어떤 것인지 여러분이 이해하게 된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 여행 절차와 준비, 작업 시간은 달라졌지만 많은 것들, 특히 오케스트라 음악가로서 살아가기로 한 개인의 모습은 예전 그대로다. 이 책은 한 세기의 간격을 두고 그곳에 직접 몸담고 있는 세 명의 음악가들이 전하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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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 오케스트라가레스 데이비스 저/장호연 역 | 아트북스
이 책에서 우리는 공항과 역을 들락거리고, 화산과 파업으로 발이 묶이고, 낯선 도시의 거리를 돌아다니고, 병을 앓고 생사의 갈림길에 처하는 음악가들의 사연을 만난다. 세계 정상급 오케스트라에서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전문 음악가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음악계 현장의 생생한 시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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