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시작된다거나 학기가 시작되는 것처럼 하나의 시간 매듭이 생길 때 사람들은 오랫동안 가슴에 담아두었던 어떤 결심을 실천에 옮긴다. 그 결심은 대단하거나 주변을 설득해야 하는 건 아니다. 작더라도 나 자신에게 이유가 있으면 충분하고 꾸준히 지킬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 가장 많은 사람이 다짐하는 것은 아마도 ‘운동 결심’일 텐데 첫 사흘 운동 잘 해내기도 쉽지 않다. 실천의 동력이 되는 것은 즐거움이다. 의무감으로는 무엇도 오래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새해 첫 약속을 실천하고자 애쓰는 분을 위해서 어떤 책으로 응원을 할 수 있을까. 단단한 결심과는 오히려 거리가 먼 부드럽고 연한 그림책 한 권을 꺼내왔다. 어려서부터 줄넘기를 즐겼던 한 여자 어린이의 일생을 그린 『줄넘기 요정』이다. 작가는 좋아하는 일을 한 가지 정해서 꾸준히 열심히 한다는 것만으로 나 자신과 세상에 얼마나 많은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지를 낮은 목소리로 들려준다.
이 책을 쓴 엘리너 파전은 1881년생으로 첫 번째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상 수상자이면서 카네기 상의 수상자이기도 하다. 「보리와 임금님」이라는 추억의 명작 동화로 어린 시절 그를 처음 만났던 성인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줄넘기 요정』은 그의 단편집 『사과밭의 마틴 피핀』에 실렸던 글에 샬럿 보크가 그림을 그린 것인데 초기 원고에는 ‘우리 길에서 줄넘기를 하던 서섹스의 아이들에게 이 작품을 바친다’는 작가의 헌사가 붙어 있었다고 한다. ‘우리 길에서 줄넘기를 하던 아이들’이라는 표현은 작가가 작품 속 모든 장면을 얼마나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단서다. 샬럿 보크는 엘리너 파전의 주인공에 대한 은은한 애정을 조금이라도 거스르지 않도록 가는 펜 선과 투명한 수채 물감만으로 모든 장면을 그려냈다.
이 그림책의 푸른 표지는 넓게 펼쳐서 보아야 한다. 왼쪽 모서리 위쪽부터 오른쪽 모서리 아래까지 대각선으로, 줄넘기를 돌리면서 달려오는 수십 개의 작은 발자국과 앞장서서 두 눈을 감고 줄을 넘는 주인공의 웃음이 화사하고 평화롭다. 면지를 열면 단발머리 키작은 여자 아이가 숲길에서 혼자 줄넘기를 하고 있다. 땅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직 서툰 것이 틀림없다. 그림책의 주인공 엘시 피더크다. 그가 사는 캐번 산 아래 글라인드 마을에는 아이들이 많았는데 형편이 어려워 케이크도 먹어보지 못한 이 동네 아이들의 유일한 즐거움은 ‘줄넘기’였다. ‘차락, 차락! 토드닥 토닥!’ 골목을 가르는 줄넘기 소리는 여기서 태어난 아기라면 누구나 듣는 소리다. 엘시 피더크도 아이들의 발소리와 뜻 모를 줄넘기 노래를 들으면서 자랐다. ‘앤디 스팬디 슈가디 캔디 프랑스 아몬드 사탕! 오늘 저녁도 버터 바른 빵이야. 엄마는 그것밖에 없대!’라는 줄넘기 노래는 맛볼 수 없는 달콤한 아몬드 사탕에 대한 꿈의 주문이면서 현실에 대한 솔직한 투덜거림이기도 했다. 엘시는 이 노래에 맞춰 아주 어려서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줄넘기를 했다. 이 가난한 산동네에서도 줄넘기를 갖는 일만큼은 얼마든지 허락되었고 그것만큼 즐거운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여섯 살이 되었을 때 엘시 피더크의 줄넘기는 어린 여신의 경지에 올랐다. 엘시가 서쪽의 디들링 마을에서부터 동쪽의 완토크 사이에 있는 마을을 모두 줄넘기 하면서 다녔다는 소문이 돌고 그 소식을 들은 산 속에 사는 줄넘기 요정들이 엘시를 자신들의 모임에 초청한다. 엘시의 줄넘기 실력은 줄넘기 요정들과 만나면서 일취월장한다. 요정들의 선생님인 앤디 스팬디는 엘시에게 길게 넘기, 힘껏 넘기, 모두 함께 넘기, 빨리 넘기, 근심 잊고 넘기, 깃털처럼 넘기 등 줄넘기의 비결을 아낌없이 전수해준다. 엘시는 그의 수제자가 되고 모든 과정을 마친 뒤 손잡이가 슈가 캔디와 아몬드 사탕으로 된 요정 줄넘기를 선물로 받는다.
글라인드 마을로 돌아온 엘시는 모두의 환대를 받으면서 동네 아이들에게 줄넘기를 가르친다. 줄넘기를 하면서 열쇠 구멍도 지나가고 뾰족탑도 넘는 엘시는 모두의 작은 영웅이었다. 또래 아이들에게는 줄넘기의 캔디 손잡이를 한 번씩 빨아먹을 수 있도록 해줬기 때문에 아이들은 그 마술 같은 순간을 즐거워하면서 엘시를 따랐다.
하지만 오십 년 쯤 시간이 흐르자 더 이상 줄넘기의 달인 엘시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다. 살기가 힘들어진 늙은 엘시 자신만이 가끔 슈가 캔디를 빨아먹으면서 옛 일을 돌아볼 뿐이었다. 이제 줄넘기도 시들해져서 꺼내지 않은지 오래다. 그 사이에 마을은 세 명의 영주가 바뀌었고 새로 온 영주는 갑자기 땅 부자가 된 사람으로 마을 사람들의 삶의 터전인 캐번 산에 큰 공장을 세우겠다고 발표한다. 사람들은 공장 굴뚝의 연기 때문에 초승달이 새까매진다면서 반대하지만 영주는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산 둘레에 철조망을 치고 길을 막아버린다. 동네 사람들은 근심이 가득해서 날마다 운다.
호호 할머니가 된 엘시는 우연히 이 울음소리를 듣고 마지막 기운을 끌어 모아 서랍에 넣어두었던 낡은 줄넘기를 꺼낸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을 모두 불러 줄넘기 파티를 연다. 이야기를 전해들은 앤디 스팬디와 줄넘기 요정들도 파티에 함께 둘러선다. 동네 사람들은 영주에게 ‘릴레이 줄넘기’가 멈출 때까지는 공장을 짓지 않는다는 협상을 제안한다. 영주는 코웃음을 치고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줄넘기 파티가 이어지는 가운데 마지막 주자로 전설의 줄넘기 여신 엘시 피더크가 줄을 들고 나선다.
어떻게 되었을까. 미루어 알 수 있는 사건의 결말 말고 이 책의 아름다운 마지막 구절들을 읊어보기로 한다.
‘엘시 피더크의 이야기가 이것으로 끝은 아니랍니다. 그때부터 엘시는 캐번 산에서 줄넘기하는 걸 멈추지 않았습니다. 약속은 약속이니까요...초승달이 뜰 때 캐번 산에 가면 어린아이처럼 아주아주 작은 구부정한 할머니가 줄넘기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거예요. 마치 춤추는 노란 나뭇잎처럼, 살랑거리는 작은 목소리로...’
작은 약속도 평생 지키면 전설이 된다. 즐거워서 하는 일은 오래 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원칙은 새해 첫 결심을 실천하기 시작하는 우리들을 응원해주리라고 믿는다. 혹시 누가 아는가. 탁월한 요정 선생님이라도 찾아와서 나의 결심을 도와주겠다고 나서게 될지. 그날까지 모두에게 끈기가 함께 하는 2015년이 되기를 바란다.
● 함께 선물하면 좋은 책
짜장 줄넘기
곽미영 글/양정아 그림/김수열 감수 | 천개의바람
주인공 소림이는 짜장면 면발을 자유자재로 넘기는 중화요리 요리사 아버지에게 ‘짜장 줄넘기’라는 특별한 비법을 전수받아 줄넘기의 여왕이 된다. 학교에 들어가면 누구나 처음 줄넘기를 배우면서 그 요령을 몰라서 당황하게 되는데 하나 둘 동작을 익히는 과정을 친절하고 유쾌하게 안내한다. 동화책이지만 중간 중간 그림 설명을 덧붙여 줄넘기 전문가인 김수열 선생의 감수를 받은 정확한 운동 자세를 가르쳐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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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넘기 요정엘리너 파전 글/샬럿 보크 그림/김서정 역 | 문학과지성사
영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인 카네기 상과 제1회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상을 수상한 엘리너 파전의 동화 「줄넘기 요정」이 샬럿 보크가 그린 수채화풍의 따뜻한 일러스트와 함께 현대적인 감성적 감각으로 재탄생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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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은 (동화작가)
김지은. 동화작가, 아동문학 평론가. 어린이 철학 교육을 공부했다. 『달려라, 그림책 버스』, 『그림책, 한국의 작가들』을 함께 썼고 EBS '라디오멘토 부모'에서 '꿈꾸는 도서관'을 진행했으며, 서울시립대, 한신대, 서울예대에서 아동문학을 강의하고 있다
레몬맛소나기
2015.01.17
즐거워서 하는 일은 오래 할수있다..
2015년엔 다이어리에 메모해둔 새해결심 대신 딱 2가지만 잘 지킬래요!!
앙ㅋ
2015.01.15
빛나는보석
2015.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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