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도시에서 살아온 도시남 정우열이 제주로 온 결정적인 계기는 딱히 없었다. 이사할 때가 되었고, 마침 제주에서 마음에 드는 집을 만나는 바람에 덜컥 계약을 했다. 바다에서 개들과 실컷 헤엄칠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그를 부추겼다. 그렇게 『올드독의 제주 일기』가 탄생했다.
만화가, 일러스트레이터, ‘올드독’으로 유명한 정우열은 제주에서 살면서 그곳에서의 경험을 틈틈이 기록으로 남겼다. 함께 집을 보던 부동산 중개인이 유자라고 말한 과일이 실은 하귤이었고, 그 중개인 역시 외지인이었다는 에피소드로 시작하는 책에는 올드독 특유의 경쾌한 문장이 가득하다. 그렇다고 책이 처음부터 끝까지 유쾌하지는 않다. 함께 지냈던 소리가 세상을 떠난 곳이 제주였다. 4ㆍ3 평화공원에 다녀와서 쓴 글도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다.
이렇듯 다양한 톤의 제주 일기가 실린 이 책은 제주에서의 삶을 꿈꾸는 도시인이라면 한번쯤 읽어보면 좋겠다. 물론, 제주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 읽어도 나쁠 게 없다.
프롤로그에서 ‘제주도 땅값을 끌어내릴 목적’으로 쓰였는지도 모른다고 하셨지만, 책 속 에피소드는 소소하면서 행복하게 느껴지는데요. 인터뷰를 빌어서, 치솟는 제주도 땅값을 끌어내릴 만한 이야기를 해 주신다면?
프롤로그에 그렇게 쓴 건 ‘이 책이 그리 낭만적인 제주도 이야기는 아닐 수도 있다’는 취지의 농담이었어요. 제게 치솟는 땅값을 끌어내릴 힘이 있을 리가 없겠죠. 에 또 그리고, 땅값 떨어질 이야기라면 정나미 떨어질 만큼 어마어마한 험담이어야 할 텐데 그런 얘기는 이렇게 화기애애한 지면 말고 <그것이 알고 싶다> 같은 데서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의외로 범죄율이 높은 곳이라든가 하는 얘기기 때문에 그 디테일을 말하기 시작하면...(이하 생략)
작가님 하면, 아무래도 소리와 풋코를 빼놓을 수 없을 듯합니다. 소리를 잃은 곳이 제주이기도 한데요. 이 에피소드를 쓰시면서 힘들지는 않았나요.
사랑하는 존재를 잃었다는 사실 자체가 힘든 것이지 그걸 글로 쓰는 게 힘들지는 않았어요. 오히려 다른 글보다 훨씬 빨리 쓸 수 있었죠. 그 일에 관해서는 하고 싶은 얘기가 넘쳐나고 방향도 매우 분명하니까요. 다만 제게는 중요한 의미가 있는 사건이었다 하더라도, 과연 다른 사람들이 읽을 만한 글일까 하는 걱정은 좀 했습니다. 어, 어떤가요. 읽을 만한가요...
요즘 풋코는 어떻게 지내나요?
적지 않은 나이에 비해선 건강하고 쾌활하게 잘 지냅니다. 하지만 확실히 소리가 있을 때보다는 심심해해요. 삶이 단조로워졌달까. 장난을 받아주거나 티격태격할 개가 없으니까요. 꼭 둘이 같이 놀지 않더라도, 둘 중 하나가 창밖을 보고 짖으면 다른 하나는 쿨쿨 자다가도 괜히 무슨 일인가 쫓아가보기도 하고 그랬는데 그럴 일이 없어진 거죠. 제가 소리의 빈자리를 메워주려고 나름 노력은 하는데 아무래도 역부족입니다.
새로 개를 한 마리 더 입양하라는 권유를 많이 받는데, 그러고 싶은 생각은 아직 들지 않는군요. 책에도 썼듯이, 소리의 빈자리를 느끼고 견디며 지내고 싶습니다. 풋코와 상의해서 내린 결정이 아니라서 미안하긴 하지만요.
2014년에 있었던 「개를 그리다」 북콘서트에서 뵙기로는 멋쟁이라는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때 말씀하시기로, 제주에서는 사고 싶은 옷을 살 만한 마땅한 장소가 없다고 하셨기도 했는데요. 평소 제주에서 작가님은 어떤 복장으로 다니시나요.
어휴 멋쟁이라뇨, 제가 무슨... 멋쟁이들의 비웃음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부끄러워요. 그런데 그때 했던 얘기는 아마 사고 싶은 옷을 살 만한 마땅한 장소가 없다는 것과는 좀 다른 취지였을 거예요. 단지 서울에서 제가 자주 가던 브랜드의 옷가게들이 없다는 것이죠. 아마 여기서 옷을 사려면 다른 브랜드를 발굴하거나 옷을 잘 골라다 놓은 다른 가게를 찾아야겠지만 제가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지, 실은 마땅한 장소가 있을지도 모르죠. 물론 굳이 그런 곳을 발굴하는 노력을 해야 할 필요는 못 느낍니다.
제주도에서도 외출할 때 저의 복장은 서울에서와 별로 다르지 않아요. 여름엔 셔츠나 티셔츠와 반바지, 봄가을엔 재킷이나 코트, 겨울엔 코트죠. 다만 여름엔 수시로 바다에 들어가기 때문에 아예 래쉬가드와 보드숏을 집에서부터 입은 채로 곧장 바다로 돌진하곤 합니다.
「올드독의 제주일기」 한 권으로도, 제주 곳곳을 누빈 착각을 주게 만드는 책인데요. 한라산 등산은 나올 법한 에피소드 같았는데, 없어서 궁금합니다. 바다와 수영은 좋아하시는 것 같은데, 산과 등산은 별로 안 좋아하시나요?
앗 듣고 보니 그렇네요. 한라산 얘기가 없군요. 확실히 제가 바다를 산보다 훨씬 좋아하긴 합니다. 그래도 한라산에 올라가기도 하고 숲길을 찾아가 걷기도 하는데 어째서 그에 관한 글은 하나도 없는지 반성해야겠어요. 한 가지 변명을 하자면 그런 곳엔 개를 데리고 갈 수가 없다는 점을 들 수 있겠습니다. 사실 전국 모든 국립공원이 개의 출입을 금지하고 있는데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해요. 스위스에 갔을 때 개를 데리고 산에 오르는 사람을 여럿 보았는데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몰라요. 사람이 자연에 피해를 입히면 입혔지 주인과 함께 오르는 개가 그럴 일은 별로 없을 것 같은데 왜 금지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자연을 보호하기 위해서 사람에게도 엄격한 룰을 적용하는 것처럼 개에게도 그렇게 하면 되지 않느냐고 부르짖고 싶어요. 아차차, 얘기가 딴 길로 새버렸네. 하여튼 산과 숲에 대해서 글을 쓰지 못한 건 저의 불찰입니다. 편중된 취향 때문에 거기서 느끼는 감흥이 바다에서만 못한가 봐요.
해녀학교에 떨어지셨는데요. 올해도 도전하실 계획인지.
아직 잘 모르겠어요. 해녀학교 인터넷 카페에 가보면 몇 년씩 낙방하고도 재도전하는 분들이 여럿 있어요. 그런데 다들 답답해하는 게, 정확한 기준이 있으면 그에 맞는 노력을 할 텐데 그런 게 없거든요. 그냥 뽑는 분들이 임의로 정하고 왜 뽑았는지 왜 떨어졌는지 알려주질 않아요. 만약 올해 지원했다가 또 떨어지면 ‘해녀학교의 공정한 운영을 위한 탈락자 연대회의’ 같은 걸 결성해버릴지도 몰라요.
추천사를 뮤지션 이상순 님이 써주셨는데요. 혹시 이효리 이상순 부부와 교류가 있는지요.
으하하하 아니 인터뷰 질문이 이래도 되는 겁니까? 하지만 왠지 제주도에 산다고 하면 모두 그걸 궁금해하니까 답은 하겠습니다. 가끔 만나 밥은 먹어요. 저만 해도 만나자는 사람을 다 감당할 수가 없어서 힘든데 그분들은 오죽할까 싶어 제가 먼저 연락하지는 않습니다.
책 속 등장하는 친구를 이니셜로 표시하셨는데요. Z와 D나 R, 이런 이니셜로 시작하는 성은 좀 드물 것 같은데, 등장인물에 붙인 이니셜은 어떤 원칙으로 만들어졌나요.
이니셜을 붙인 원칙은 없어요. 성을 이니셜로 쓰면 너무 많은 사람이 서로 겹치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 어떤 사람은 이름의 어느 한 글자, 또 어떤 사람은 인터넷 별명 등등 그때그때 되는 대로 썼어요. 반대로 한 사람이 각각 다른 글에서 다른 명칭으로 등장한 경우도 있고요. 그저 많은 사람이 등장하기 때문에 구별하기 위해서 만든 이니셜입니다.
책을 다시 보고서 ‘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다녀가고 이렇게 많은 사람을 만났구나’ 하고 새삼 놀랐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만난 사람이 더 많은데 책에는 등장하지 않은 분들도 꽤 있어요. 인간적인 호불호와는 전혀 무관하고 그때그때 떠오른 글감에 따라 캐스팅되었음을 괜히 밝혀봅니다.
책 속 곳곳에 등장하는 인간 염탐기도 재밌는 꼭지였는데요. 사람을 향한 따뜻한 작가님의 시선이 느껴졌습니다. 제주에서 모르는 사람을 만날 때는 도시에서 만났을 때와 다른 점이 있을까요.
까칠하게 굴고 싶지는 않지만 책 표지에 까칠하다고 되어 있으니 핑계 김에 짚고 넘어가고 싶은 얘기가 두 가지 있어요.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본 내용인데, 뉴욕에 사는 사람 중 일부는 뉴욕을 그냥 ‘the city’라고 부른다고 하더라고요. 다른 도시에 사는 사람으로서는 ‘아니 뉴욕만 도시냐’ 하면서 기가 막혀한다고요. 마찬가지 이야기를 서울에 대해서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제주도에 시골도 있지만 제가 사는 동네는 엄연한 도시란 말입니다! 동네에 멀티플렉스 극장도 있고 버스로 세 정거장 거리에 시청도 있다고요! 크르릉.
여기까지는 농담이고요, 무슨 취지로 묻는 질문인지 알겠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엔, 삶이라는 게 어디서건 기본적으론 비슷한 것 같아요. 책을 보면 제가 맨날 놀러만 다니는 것 같지만, 실제론 훨씬 많은 시간을 서울에서와 마찬가지로 일하는 데 씁니다. 그 얘기는 재미없기 때문에 쓰지 않은 것뿐이죠. 그건 저뿐만 아니라 이곳에 온 대부분의 이주민, 또 이곳에서 나고 자란 모든 사람들이 마찬가지일 거예요. 왜 이런 얘기를 이렇게 장황하게 하느냐 하면, 상황이 이럼에도 불구하고 제주도에 잠깐 놀러온 사람들은 쉽게 이런 점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에요. 제주도에 왔으니 만나달라는 사람, 맛집 정보를 달라는 사람이 너무 많아 힘들다는 점은 여기 사는 많은 사람들이 호소하는 공통의 고충입니다. 하와이를 배경으로 한 영화 <디센던트>에도 이 비슷한 얘기가 나오죠. 휴양지에 온 기분을 망치고 싶진 않지만 기본적으로 이곳도 누군가의 일상의 공간이라는 점을 상기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예를 들어서 서울에 왔으니 만나달라, 서울에 왔으니 맛집 정보를 달라는 얘기를 매일 듣는다고 생각해보면 금방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런 점이 다 전제가 된 후 얘기하자면, 제주도에서 사람을 만나는 건 서울에서 사람을 만나는 것과 미묘하게 다른 점이 분명히 있는 것 같아요. 특히 이주민들은 어떻든 인생의 커다란 부분을 변화시키는 결정을 한 사람들이라 어렴풋하게나마 공통의 정서 같은 게 느껴집니다. 대도시의 삶에선 고정불변이라고 여겼던 것들이 여기선 별것 아닌 경우가 꽤 있기 때문에, 뭐랄까 조금은 더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대하게 되는 게 아닐까 추측하고 있어요. 여행 온 사람들이야 잔뜩 들떠 있으니 더더욱 도시에서와는 다른 면을 보게 되고요.
고백할 게 있다. 나는 좀 오해받고 있다. 내가 부러 속이려 한 것은 아니나 어느 날 진실이 밝혀지면 철사 줄로 두 손 꽁꽁 묶인 채로 마을 광장(그런 게 있는지 모르겠지만)에 끌려 나가 늘씬하게 치도곤을 당할까 봐 잠을 설친대. 해서 고심 끝에 털어놓는데, 실은 앞에 썼던 글들은 상당히 엉터리였다. 나는 제주도에 대해 아는 게 없다. 버젓이 책 제목을 ‘제주일기’라 붙여놓고 이제 와서 이런 얘기 해봐야 파렴치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분노를 가라앉히고 침착하게 생각해 보면 이내 음, 그럴 만하군. 너의 죄를 사하노라,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무슨 얘기냐, 내가 제주도에 와서 산 시간은 이제 아홉 달이 되었다. 기억할지 모르겠는데 맨 처음 내게 이 집을 소개해준 중개인 또한 당시 이곳에 온 지 아홉 달 된 이였다. 그는 한겨울 마당의 나무에 주렁주렁 달린 열매의 이름을 묻는 내게 유자라고 알려주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건 하귤이었다. 그런 것이다, 낯선 땅에 와서 아홉 달 산 사람의 수준은. 그러니 채 아홉 달이 되기 전에 쓴 글들이 오죽했겠는가 말이다. (78쪽)
작가님 글은 솔직합니다. 위트와 유머가 넘쳐서 매력적인데요. 책 속에서 정성일 평론가를 존경한다고 하셨는데, 혹시 좋아하는 저자나 작가가 있는지요.
유머와 위트를 좋아하긴 하는데 제가 잘 구사할 만큼 글을 잘 쓴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저 흉내를 낼 뿐이죠. 그래도 칭찬 고맙습니다. 으쓱으쓱.
정성일 선생님은 영화뿐만 아니라 글, 세상을 대하는 태도 등 저에게 많은 영향을 주신 분이에요. 그 결과가 겨우 요 정도라 부끄럽긴 하지만요. 그 밖에 좋아하는 작가도 물론 많이 있습니다. 너무 많으니까 이 책과 관련해서만 말씀드리자면, 에세이를 쓸 때 떠올리는 사람은 무라카미 하루키, 알랭 드 보통, 그리고 박찬욱 감독입니다. 하루키나 보통의 글은 이미 많은 분들이 좋아하시니까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요. 그런데 박찬욱 감독님의 경우 영화도 열렬한 팬이지만 글도 아주 좋아해요. 글이 잘 안 풀릴 때, 또 제 글이 자꾸만 졸렬해지려고 할 때 그들이라면 어떻게 썼을까 떠올려보려고 애를 씁니다. 아 그리고 김혜리 기자와 노라 에프런도 그런 대상이고요. 물론 그런다고 제 글이 그들의 것만큼 훌륭해지진 않지만 그래도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지고 있어요.
2015년 계획을 말씀해주세요.
웹툰을 연재할 생각입니다. 벌써 3년 넘게 이 얘기를 해왔는데 여태 못했어요. 이번엔 진짜 하지 않고는 못 배기도록 다른 일을 대부분 다 그만뒀으니까 이제 둘 중 하나입니다. 연재하거나 밥을 굶거나. 음, 연재했는데 대실패해서 밥을 굶게 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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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독의 제주일기정우열 저 | 예담
느린 삶'의 대표명사가 된 제주도의 삶. 대안적인 삶의 공간으로 제주도가 떠오르는 요즘, 만화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인 올드독 역시 약 이 년 전 제주도로 이주해 생활을 꾸려나가고 있다. 근래 가장 많이 듣는 말이 "제주도에 사니까 좋아요?"라고. 마냥 낭만적이지만은 않은 까칠한 도시 남자의 제주 생활 적응기는 제주도 역시 서울과 다름없는 생활의 터전임을 말하면서도 따뜻한 시선을 잊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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