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쿠니 가오리의 소설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반짝반짝 빛나는』이다. 좋아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취향의 문제이므로 얼마든지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작가가 들으면, 겉으로는 미소 지어도 속으로는 ‘그럼 다른 작품은 안 좋아한다는 뜻인가?’라고 의심할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것과, 가장 좋아한다는 것은 다르다. 분명히 다른 이야기이다.
오랜만에 이 책을 다시 꺼내 읽었다. 진행하는 팟캐스트에서 이 작품을 다루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구태여 선후관계를 따지자면, 그 작품을 다루기로 결정한 사람은 바로 나였다. 어쩌면 오랜만에 이 책을 다시 꺼내 읽고 싶다는 마음이, 그런 결정을 하게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가을이라 그렇다. 『반짝반짝 빛나는』은 깊은 가을과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리는 소설이다. 좀약냄새가 희미하게 묻어나는 트렌치코트를 꺼내 입고 (스카프라고 부를 수 없고 목도리라고도 부를 수 없는) 긴 머플러로 목을 둘둘 싸매곤 서늘한 거리로 나서야하는 그런 날 이 소설에는 세 명의 주요인물이 나온다. 알코올 문제가 있으며 조울증을 앓는 쇼코, 동성애자이지만 서로의 사정을 알고 쇼코와 위장 결혼을 한 무츠키, 그리고 무츠키의 아주 오랜 애인인 곤. 모두 나름의 사정을 가진, 미워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나에게 만약 이 중 누가 가장 약한 사람이냐 묻는다면, 망설임 없이 곤의 손을 들겠다.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곤을 자유로운 영혼이라고 오해했다. 그는 오랜 연인 무츠키를 구속하지도 않고 그의 동거인이자 어쨌든 아내인 쇼코를 질투하지도 않는다. 늘 당당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장난스러운 태도로 세상을 대한다. 그런 모습은 그를 아무 데도 미련을 두지 않고, 언제 어디로든 떠나 버릴 수 있는 자유인으로 느껴지게 했다. 곤은 대학생이다. 세 사람 가운데 현재 가장 나이가 젊고 가진 것이 없으며 불안한 현실을 살지만, 그의 젊음과 가진 것 없음과 불안함이, 역설적으로 무한한 가능성으로 보였다.
부모의 결혼 강권으로 힘들어하던 무츠키가 쇼코와 결혼식을 올리게 된 데는 곤의 역할이 컸다. 곤은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 무츠키의 위장결혼을 대하고 심지어 결혼선물을 보내기도 하고 집들이에 참석하기도 한다. 그 후에도 역시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 무츠키와의 관계를 지속한다. 심지어 쇼코와 친한 친구 같은 사이가 되어버리는 곤을 보면, 그들 세 사람을 윤리나 도덕의 기준으로 판단할 수 없다. 무츠키에 대해서라면, 곤은 쇼코에게 얼마든지 우선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곤은 그렇게 하지도 않는다. 실제로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만일 쇼코와 무츠키가 계약서 같은 걸 작성했다면 거기에는 둘 사이에 사랑은 허용되지 않는다고 적혀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쇼코는 무츠키에 대한 깊은 감정 때문에 힘들게 되고 곤은 말없이 그런 쇼코의 마음을 다독인다. 쇼코가 표현할 데 없는 괴로움을 기대는 존재가 무츠키가 아니라 곤이라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
무츠키의 곁을 훌쩍 떠나 사라져버렸던 곤은, 쇼코가 무츠키에게 주는 깜짝 선물의 형태로 다시 나타난다. 이들이 아래위집에서 살아가기로 결정하는 것이 소설의 마지막이다. 나는 곤이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믿었기에 그 결말에 퍽 충격을 받았다. 그 전까지 드러난 곤의 자유로운 기질로 보아 그는 더 머나먼 곳, 세계 구석구석을 떠돌며 젊은 날을 살아낼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는 가장 의외의 방식으로 현실로 돌아와 버린다. 젊음을 이 기묘하게 뒤틀린 작은 관계 안에서 소진하기로 결정한다. 퇴행이 분명한 그 남자의 선택 앞에서 나는 비로소 내 오해에 대해 깨달았다. 곤은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었다. 강한 게 아니었다.
삼각형 꼭짓점의 가장 아래 있는 사람, 가장 바보 같은 사람, 가장 깊게 사랑해서 가장 깨지기 쉬운 사람이 바로 곤이었다. 그래서 곤이 쇼코를 위로할 수 있었음을 알았다. 그건 약한 인간이 또 한 명의 약한 인간에게 보내는 연대 같은 것이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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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 반짝 빛나는에쿠니 가오리 저/김난주 역 | 소담출판사
『냉정과 열정사이 Rosso』 로 알려진 에쿠니 가오리의 신작. 호모 섹슈얼인 남편과 알코올 중독 부인 그리고 그 남편의 애인이라는 삼각관계가 사랑이라고도 우정이라고도 말하기 어려운 미묘한 구도를 이루며 펼쳐진다. 자칫 지리지리 어둡거나 피터지는 사랑이야기가 될 수도 있지만 그녀는 그녀만의 독특한 서정성과 문체로 우리에게 투명한 사랑 이야기를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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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현(소설가)
1972년 서울 출생으로 단편 「낭만적 사랑과 사회」로 2002년 제1회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나왔다. 이후 단편 「타인의 고독」으로 제5회 이효석문학상(2004)을, 단편 「삼풍백화점」으로 제51회 현대문학상(2006)을 수상했다. 작품집으로 『낭만적 사랑과 사회』『타인의 고독』(수상작품집) 『삼풍백화점』(수상작품집) 『달콤한 나의 도시』『오늘의 거짓말』『풍선』『작별』 등이 있다.
앙ㅋ
2015.0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