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인간으로 여기고 바라봐주는 일
인간을 인간으로 바라봐주는 일을 가까스로 할 수 있는 게 나는 문학이라고 여겨왔지만, 인간을 인간으로 바라봐주는 일을 더 이상 하지 않는 문학이 더 많을 때에, 그것을 나는 여전히 문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글ㆍ사진 김소연(시인)
2014.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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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 월요일, 시인 김소연이 읽은 책 이야기
 ‘김소연의 내향적 삶을 옹호함’이 연재됩니다.

 

밤 늦은 귀가길. 버스 차창에 이마를 기대고 집으로 가는 길. 버스 안 여기저기에 앉아 있는 피로한 사람도,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지나쳐온 사람도, 거의 전부다,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환한 스마트폰을 쳐다보고 있다. 정말로 모두가 다 그렇게 하고 있는 모습을 한 정류장, 한 정류장 지나치며 바라보았다. 스마트폰을 발명하여 우리 손에 들려주고 떠난 사나이는 이 풍경에 대하여 어떤 감회를 가질까. 만족스러워할 것 같았다. 오랜 역사 동안 세세손손 호명해온 그 어떤 신들도, 인류를 통치하고 싶어했던 그 어떤 독재자도 이렇게까지 우리모두에게 골고루 같은 것을 나눠주지 않았고 같은 것에 집중하게 해주지 않았던 것 같다.

 

우리는 흘러흘러 어디쯤에 당도한 인류일까. 아직도 우리를 '인류'라고 불러주어도 괜찮을 것일까. 나는 요새 매일매일 이 생각을 한다. 어쩌다 정 있는 사람을 만나고 나면, 돌아오며 나는 속으로 그 사람을 불러본다. "참, 사람이구나, 너"하고. 나도지그 사람 앞에서 사람의 모습일지는 잘 모르겠다. 사람이구나 싶은 그 사람은 많이 멍청하고, 많이 허술하고, 가진 것보다 잃고 있는 게 더 많아 보이는 사람인 것만은 분명하다. 가장 괜찮은 사람들은 이제 해변에 쓸려온 미역줄기처럼 변방으로 쓸려간다. 변방에서 더 변방으로 쓸려간다. 그게 뭐가 됐든, 조직에서 더는 견디지 못하고 튕겨져 나온다. 사람을 사람으로 예우해주는 곳이 어디있는지, 이제 나는 잘 모르겠다. 아무 데도 그런 데는 없는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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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성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말해주기 위해


우리가 잘 알던 '인간성'이라는 건 이미 우리 곁에서 사라져버린지 오래되지 않았을까에 대해 매일매일 생각하고 있다. 제대로 보존된 '인간성'이라는 게 내 자신에게 얼마간은 내재해 있다는 것도 이제는 잘 믿지 못하겠다. 인간이라고 하기엔 파렴치하고, 인간이라고 하기엔 암암리에 폭력적이고, 인간이라고 하기엔 솔직히 인간미가 없다. 인간미 대신에 크든 작든 속셈만 그득하다. 인간을 인간으로 여기고 바라봐주는 존재를 굳이 찾으라면, 인간 옆에 사는 '개'뿐이라고 말해야 옳을 듯하다. 그래서일까. 존 버거는 인간성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말해주기 위해 '개'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소설 『킹』을 썼다.

 

책 제목 '킹'은 개의 이름이다. 킹과 함께 사는 사람은 노숙인이다. 도시 근교의 노숙인 거주지에 살다 그 터마저 빼앗기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킹의 시선으로 들려준다. 킹의 시선으로 바라본 노숙인들을 통하여 그들이 어디까지 내몰렸는지, 내몰려야 하는지를 낱낱이 느껴가는 와중에, 이상한 느낌이 또 한 겹 우리 등 뒤에서 스멀스멀 다가온다. 인간에게 주어진 최소한의 삶의 조건을 모두 상실한 그들에게서 우리 모습이 보인다. 뭔가 최소한의 조건들은 갖추고 있어서 약간의 착각이 가능했을 뿐, 우리의 모습과 다를 게 없다. 다룬 점이 있다면, 그들은 왜 자신들이 내몰려야 하는지 진심으로 생각하고 생각한다. 생각하고 생각하며 대화한다. 우리에게 이제는 없는 '인간성'이 짙게 배인 대화를 한다. 소용이 있건 없건 끝없이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그들은 서로에게 묻는다. 개가 아니고선 그들의 행동과 대화를 그렇게까지 인간미 있게 지켜보진 않았을 것 같다. 그래서, 그들 곁에 있는 개가 이 이야기엔 주인공으로 적격인 것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 싶어 끝까지 묻는 일. 이 질문은 존재에 대한 사색이 아니다. 생존 가능성에 대한 타진을 하기 위하여다. 최소한의 삶의 조건을 요구해도 되는지, 왜 요구하면 안 되는지를 따지는 사회적인 질문이다. 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사회안전망의 차원에서, 절박하게 던지는 질문이다. 누군가에겐 최후의 보루라고 해야 할, 그토록 열악한 삶의 터전을 오직 재개발을 목적으로 하여 함부로 짓밟아버리고 마는, 야만적인 도시정책은 이제 우리에겐 다반사다. 더 이상 우리는 질문하지 않고 더 이상 서럽지 않으려면 일정 정도는 그 야만을 이해하고 야만의 측근이 되어야 한다고 마음을 달리 먹은지 오래 되어버렸다. 야만을 손가락질하며 분노하는 과정을 통과한 인간이 어째서 야만의 측근으로 야만과 공생을 하는지 의문을 품는 일은 멍청한 일이 되었다.

 

소설이 원래 지니고 있어야 할 온갖 기준들을 놓고 보자면, 이 소설은 촌스럽다. 그러나 존 버거는 촌스러움이 아니고서는 전달할 길이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기꺼이 촌스러워질 때, 까마득히 망각해온 인간성을 오롯하게 목격하고 그 목격으로써 거룩함을 발현할 수 있다는 걸 존 버거는 믿는 것 같다. 이런 거룩함은 21세기에서 더 이상 찾아지지 않는다. 그래서 존 버거에 한하여서라면 나는, 세련보다 촌스러움의 편에 서서 그 거룩함을 한번 더 상기해본다.

 

지금쯤 인간이 어떤 특징을 지닌 동물인지를 다시 질문해보고 싶다. 어째서 우리를 아직도 인간이라고 불러주는지에 대하여 다시 알고 싶다. 우리가 아직도 인간이라면, 우리가 어떤 점에서 인간인지를 스스로 입증할 수 있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우리가 어떤 점에서 인간으로 대접받고 있는지를 스스로 태연스럽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만약, 입증하기도 곤란하거니와 어떤 말이 궁해져서 우물쭈물거린다면, 그렇다면 그런 이들을 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 걸까. 인간이 아니라면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는 걸까. 인간을 인간으로 바라봐주는 일을 가까스로 할 수 있는 게 나는 문학이라고 여겨왔지만, 인간을 인간으로 바라봐주는 일을 더 이상 하지 않는 문학이 더 많을 때에, 그것을 나는 여전히 문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지구에서 쫓겨나고 있는 거야. 지구의 얼굴에서가 아니야! 얼굴은 오래 전부터 우리 것이 아니었지.

지구의 똥구멍에서 쫓겨나는 거야.
우리는 저들의 실수야. 킹, 들어 봐!

 

실수는, 킹, 적보다 더 미움을 받는 거야. 실수는 적처럼 굴복하지 않으니까.

실수를 물리치는 일 같은 건 없는 거야. 실수는 있거나 없거나
둘 중 하나인데, 만약에 있다면 덮어야만 하지. 우리는 저들의 실수야, 킹, 그걸 잊으면 안 돼.

 

잠시 후 자신이 짖고 있다는 것도 잊고, 그제서야 다른 사람들의 소리가 들린다.

합창처럼 들리는 짖는 소리. 그 누구도 변하지 않았고, 제각각 또렷하게 들리지만,

너무나 또렷해서 가슴을 찢는 소리. 그 짖음은 이제 무언가 달라졌다고 말한다. 이렇게, 우리가 여기 있어! 라고.

 

'우리 여기 있어!'라는 그 말이 거의 죽어있던 기억을 깨우고,

그 기억이 밤 바람에 다시 불꽃을 피우는 재처럼 살아나고, 함께 있었던 기억, 두려움,
숲, 음식에 대한 기억도 되살아난다.

 

그들이 거기 누워 짖고, 그 짖음에서 나는 그들의 이름을 듣는다.

사냥개 대니, 요아킴, 솔, 말락, 애나, 알폰소, 스피츠 리베르토.
보잉의 먼지 더미 속에 웅크리고 앉은 그들은 가진 게 아무 것도 없다.

 내가 가진 게 아무 것도 없듯이. 우리는 모두 똑같았고, 모두 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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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 저/김현우 역 | 열화당
이 책은 ‘킹’이라는 이름의 개가 바라본, 유럽의 어느 도시 근교 노숙인들의 삶을 그린 작품으로, 위와 같이 요약되는 단 하루 동안의 이야기다. 소설 속 배경인 ‘생 발레리’는 가상의 공간이지만, 존 버거는 스페인 알리칸테 지방의 노숙인 거주 지역을 본 후 이 작품을 썼다고 한다. 차들은 쉴 새 없이 앞만 보고 달리고, 도로 옆에 위치한 생 발레리에는 노숙인들이 하나둘 모여 살고 있다. 작품 속 화자인 ‘킹’은 그들과 함께 살아간다. 작가는 이 개의 눈을 통해 각자의 사연을 가슴에 안고 생 발레리로 흘러 들어온 열 명 남짓한 인물들의 하루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려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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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연 #존버거 #킹
6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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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령써니

2014.10.20

아.. 가슴 시린 이야기일 거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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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보석

2014.09.27

"사람을 사람으로 예우해주는 곳이 어디있는지, 이제 나는 잘 모르겠다. 아무 데도 그런 데는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저도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책 제목이 개의 이름이고, 개의 시선으로 인간성이 무엇인지를 말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 좀 서글프게 느껴집니다. 인간을 인간으로 봐줄 수 있는 존재가 '개'뿐이라고 말해야 옳은듯 한것도 그렇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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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koko111

2014.09.24

칼럼 제목이 명언이네요. "인간을 인간으로 바라봐주는 일을 더 이상 하지 않는 문학이 더 많을 때에, 그것을 나는 여전히 문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동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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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연(시인)

시인. 트위터 @catjuice_ 시집 <극에 달하다>,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눈물이라는 뼈>, <수학자의 아침>과 산문집 <마음사전>, <시옷의 세계> 등을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