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을 번다, 꾸역꾸역
김훈은 수필집 『밥벌이의 지겨움』에서 이렇게 말한다.
“꾸역꾸역 밥을 벌자. 무슨 도리 있겠는가. 아무 도리 없다.”
그래, 천 번 만 번 맞는 말이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밥벌이를 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먹어야 산다. 이 확고한 명제 앞에 다른 이념과 사상들은 초라하게 여겨질 정도다. 여섯 살 난 아들은 아직 밥벌이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소고기를 먹기 위해서는 이 아빠가 잠을 설쳐가며 글을 써야 한다는 사실을 모른다.
올해 여름, 유난히도 더웠던 어떤 날에 선풍기 바람에 짜증을 날려가며 소설을 쓰고 있었다. 유치원에서 돌아온 아들은 아니나 다를까 같이 놀아달라고 칭얼댔다. 평소라면 한 번쯤 노는 시늉이라도 했겠지만 그날은 마감이 코앞이었다. 더군다나 소설은 좀처럼 앞으로 나가질 않았다. 이래저래 스트레스를 받아 폭발하기 일보직전이었다. 나는 아들을 앉혀 놓고 일장연설을 늘어놓았다.
“아빠가 열심히 글을 써야 네가 좋아하는 소고기도 사 먹을 수 있고, 장난감도 살 수 있단 말이야. 그러니까 제발 좀 혼자서 놀아!”
“소고기는 마트에서 사면되잖아.”
말문이 막히며 짜증이 솟구쳤지만 나는 참아 넘겼다.
“마트에서 소고기 살 돈은 어디서 나는데?”
“그건 카드로 삑, 하면 되잖아.”
자식, 하여간 본 건 많아가지고.
“카드로 삑, 하는 것도 다 돈이 필요하단 말이야. 그래서 아빠가 글을 쓰는 거고!”
결국 나는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아들은 토라진 표정을 짓더니 어딘가로 사라졌다. 나는 짜증 반 미안함 반의 감정으로 고집 센 황소처럼 움직일 생각을 않는 소설을 달래고 있었다. 몇 분 후, 아들은 동전으로 가득 찬 자신의 저금통을 들고 낑낑거리며 나타났다.
“이제 됐지? 돈 여기 있으니까 나랑 놀자.”
나는 그 저금통 안에 들어있는 수많은 동전들을 떠올렸고, 왠지 모르게 무척 슬퍼졌다. 대관절 밥벌이가 무엇이기에 이 ‘지랄’을 하고 있는지 서글픈 마음도 들었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튀어나왔고 급기야 글을 써서 돈을 번다는 행위 자체에 대한 서글픔으로까지 발전하려 할 때쯤, 나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래. 놀자. 그 대신 조금만 노는 거야.”
나는 아들과 놀았다. 녀석에게 소고기를 사 주기 위해 일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순간 더 중요한 건 함께 노는 일이었다. 물론, 담당 편집자에게는 미안하다며 다음 날 메일을 보내야 했지만. 전업 작가의 길을 걷게 되면서 고상한 취미였던 글쓰기가 밥벌이로 전락하고 말았다. 나는 한동안 그런 자괴감에 시달렸다. 나 같은 무명작가가 전업을 해서 먹고 살기 위해서는 박리다매, 즉 고료가 아무리 적더라도 일단 많이 써서 파는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자존심 상하는 일도 많았고 치사하고 더럽지만 참을 수밖에 없는 순간들도 많았다. 그게 다 밥벌이 때문이었다. 나 하나면 상관없었지만 토끼 같은(그리고 소고기를 좋아하는!) 자식과 여우 같은 마누라를 생각하면 아니 쓸 수 없었다.
가끔 옛 직장 동료들을 만난다. 그들은 한 목소리로 내게 부럽다고 이야기한다. 그럴 수밖에. 그들 눈에는 자고 싶을 때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상사의 잔소리를 들을 필요 없는 내가 부럽게도 보일 것이다. 나는 그때마다 똑같은 대답을 해 준다.
“회사나 이 바닥이나 똑같아. 밥벌이는 다 지겨워.”
경찰 역시 마찬가지
요코하마 히데오의 『64』는 아주 훌륭한 추리 소설이요, 그의 전작들이 그랬듯 경찰 사회를 현미경으로 들여다 본 정밀한 경찰 소설이기도 하다. 작가가 10년 동안 셀 수 없을 만큼 고치고 또 고치며 썼다는 이 작품은 책의 어마어마한 두께처럼 아주 묵직한 재미를 선사한다. 요코하마 히데오는 이미 『루팡의 소식』, 『그늘의 계절』, 『사라진 이틀』 등의 전작으로 국내에도 많은 팬을 거느리고 있다. 나도 그런 팬들 중 한 명이었고 『64』의 출간 소식을 듣자마자 재빨리 주문을 해 거의 일주일 만에 다 읽었다.
『64』의 주인공 ‘미카미’는 경찰 홍보실의 홍보담당관이다. 그에게는 딸의 가출이라는 개인적인 아픔이 있다. 그런 참에 새로 취임한 경찰청장이 ‘D현’에 방문한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언론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미카미에게는 골치 아픈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게다가 경찰청장은 14년 전 미제로 끝난 소녀 유괴살해사건, 일명 ‘64’를 마무리하겠다고 천명한다. 공소시효는 1년밖에 남지 않은 상황. 그리고 그 와중에 ‘64’를 모방한 사건이 일어난다. 설정 자체가 아주 흥미롭고 미스터리한 『64』는 처음부터 끝까지 책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마력을 지닌 소설이다.
14년 전의 미제 사건, 사건을 담당했던 형사들 사이에 퍼진 함구령, 새롭게 터진 모방범죄와 그 속에 감춰진 놀랄 만 한 진실까지, 『64』는 좋은 추리 소설이 갖추어야 할 요소들이 꾹꾹 눌러 담겨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작품을 돋보이게 하는 것은 경찰 내부의 암투이다. 독자들이 쉽게 접할 수 없는 직업, 그것도 일반적인 회사와는 많이 다르리라 막연히 짐작만 하게 되는 경찰 조직 역시 파벌과 암투와 모략이 판친다는 사실은 그 어떤 설정보다도 흥미롭다. 특히 같은 경찰이지만 수사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홍보실의 미카미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는 점은 작가의 ‘신의 한 수’이다. 독자들은 미카미를 통해 경찰과 언론의 관계, 경찰 내부 조직 간의 대립, 상사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현실 등을 낱낱이 대리 체험할 수 있다. 그리고 끝내는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뭐야, 우리 회사랑 똑같잖아?”
『64』에 등장하는 경찰들은 모두 투철한 사명감을 가지고 있다. 범인을 검거하고 시민을 보호하겠다는 그 마음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다. 다만 그들 역시도 지겹도록 밥벌이를 하는 생활인이라는 사실, 어찌 보면 아주 당연한 그 지점이 이 작품을 무척 매력적으로 만든다. 밥벌이를 해야 함으로 더러워도 참는다. 밥벌이를 해야 함으로 상사의 눈치를 본다. 밥벌이를 해야 함으로 때로는 진실에서 등을 돌리기도 한다. 밥벌이를 해야 함으로 지친 몸을 이끌고, 자존심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일을 한다.
『64』는 충격적이고 가슴 아픈 반전으로 끝을 맺는다. 사건은 해결된 듯 보이지만 삶은 끝나지 않았고 미카미를 비롯해 모든 경찰들은 여전히 밥벌이의 치열한 현장에서 살아간다. 그래서 뒷맛이 쓰다. 작품의 재미 유무를 떠나 마치 씁쓸한 내 현실을 본 것만 같아 마지막 장을 덮고도 한동안 가슴이 저릿했다.
며칠 전, 아들이 그토록 원하던 소고기를 사 먹었다. 내 첫 장편 소설 출간을 축하하기 위한 특별식이었다. 이제는 아주 능숙하게 젓가락질을 하며 잘 구워진 소고기를 작은 입에 쏙쏙 넣는 아들을 보며 나는 다시 한 번 밥벌이에 대해 생각했다. 그 지겨움에 대해, 그리고 그 숭고함에 대해.누군가 왜 글을 쓰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제 당당히 대답할 수 있다.
“처자식을 먹여 살리려고요. 그리고 나도 먹고 살아야지요.”
나는 오늘도 글을 쓴다. 꾸역꾸역 밥을 번다. 이 땅의 모든 이들과 마찬가지로. 무슨 도리 있겠는가. 아무 도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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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요코야마 히데오 저/최고은 역 | 검은숲
7년이라는 오랜 침묵을 깨고 선보인 요코야마 히데오의 장편소설 『64』(육사). 이 책은 2,400매에 육박하는 분량과 높은 정가에도 불구하고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요미우리, 아사히, 마이니치 신문 등 일본 주요 언론은 작품의 완성도와 작가의 진념에 앞다투어 찬사를 보냈으며, 독자들의 반응 역시 폭발적으로 아마존저팬에서는 80개 이상의 리뷰가 작성될 때까지 1개짜리 별점이 단 하나도 없었다는 진기록을 낳기도 하였다. 또한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와 ‘서점 대상’에서 각각 1, 2위를 차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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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아빠, 백수, 소설가, 전업작가로 살아간다. 운동만 시작하면 뱃살이 빠지리라는 헛된 믿음을 품고 있다. 요즘 들어 세상은 살 만하다고 느끼고 있다. 소설을 써서 벼락부자가 되리라는 황당한 꿈을 꾼다. 『한국 추리 스릴러 단편선 3』, 『한국 추리 스릴러 단편선 4』에 단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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