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연의 내향적 삶을 옹호함’이 연재됩니다.
“개 구경 참 실컷 했네.”
여행 끝자락에 공원 벤치에 앉아 샌드위치를 먹다 말고 나는 혼잣말을 했다. 두 달간의 여행 동안에, 지도를 들고 헤매며 찾아가 입장료를 지불하고 목격한 경이로운 문화유산도 많았고, 만났던 다정한 사람들도 많았지만, 나를 가장 기분 좋게 한 것은 길에서 마주친 개들을 실컷 구경했던 일이었다. 주인과 함께 여행을 떠나온 개, 주인과 함께 저녁산책을 하고 있는 개, 주인과 함께 장을 보러 가고 있는 개, 주인과 함께 길가에 나 앉아 주인 곁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 개. 몸집이 사자처럼 커다란 개도 있었고 장난감처럼 자그마한 개도 있었고 나를 향해 컹컹 짖어대던 개도 있었고 나에게 달려와 샌들 속 발가락을 핥아주던 개도 있었다.
내가 사는 골목에선 그렇게까지 자주 별의별 개를 만날 수 없었지만 이번 여행지에서는 그야말로 개를 실컷 만났고, 개를 쳐다보며 반가워한 덕분에 주로 개 주인들과 인사말이라도 건네며 안면을 트기도 했다. 개는 주인과 번번이 닮아 있었다. 퍼그를 데리고 있는 주인은 퍼그처럼 표정을 짓고 있었고, 몸매 좋은 사냥개를 데리고 다니는 주인은 몸매가 좋았다. 개는 그들에게 그야말로 말 그대로 반려자였다.
『개를 그리다』 책 일부
개 때문에 안면을 트게 된 작가, 올드독
올드독(정우열)은 나에겐 오로지 개 때문에 안면을 트게 된 작가다. 개를 키우는 작가는 많았지만 키우는 개 때문에 그 작가를 알게 된 경우는 올드독이 처음이었다. 제주도에 여행을 갔을 때 우연히 올드독과 연결이 되어 처음 그를 만나게 되었다. 만날 장소를 정하는 문자를 주고받을 때, 나는 선뜻 그의 집을 선택했다. 카페나 술집이 아니라 집이여야지만 올드독뿐만 아니라 올드독의 개도 함께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올드독네 거실의 빨간 소파에 앉아 처음 만난 어색함을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을 때, 양 옆에 풋코와 소리가 있었다. 풋코는 노래를 불러주었고, 소리는 다가와 몸을 대고 옆에 앉아 있었다. 한쪽 귀가 접힌 녀석은 소리였고, 좀더 부산을 떠는 녀석은 풋코였다. 거실에 놓인 사물들의 절반은 올드독의 것이었고 절반은 소리와 푸코의 것이었다. “미셸 푸코에서 따온 풋코예요?” 같은 상투적인 질문과 대답 정도가 오갔고 별 다른 수다를 떨지도 못했을 정도로 어색하기만 했지만, 그 집을 나와서 어두운 골목을 걸어나와 제주시의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나도 좀더 용기를 내어 제주에서 살아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후, 얼마 되지 않아 소리가 많이 아팠고, 앓다가 마침내 죽었다. 그보다 조금 먼저 소리와 풋코와의 제주 생활을 담은 이 책이 출간되었다. 그러니까 이 책을 통해서 많은 독자들이 소리와 풋코와 올드독의 제주 생활을 마음껏 애정할 수 있게 되었을 때에 소리는 이 세상을 떠나버렸다.
우리의 삶이 개만큼이나 순정하고 사랑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소리는 풋코와 올드독과 함께 『개를 그리다』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다. 나는 한동안 이 책을 침대 머리맡에 두고서, 벌러덩 누워 휴식을 취할 때마다 펼쳐 보았다. 애써 멋지게 꾸미지 않은 소박한 사진 속에서 풋코와 소리는 인형 같이 깜찍하게, 혹은 야생의 들짐승처럼 씩씩하게,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는데, 씨익 웃으며 가볍게 책장을 넘기다가 책을 덮고 멍하니 누워 있을 때에 드는 생각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살던 대로 살지 않고 다르게 살기 위하여 삶을 바꾸는 것. 함께 산다는 것에 어떠한 노고가 있는지. 이해를 하고 도움이 되도록 노력을 하고 해결을 한다는 것. 그리하여 책임을 진다는 것.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삶도 완성에 가까워질 수 없다는 것. 이런 진중한 질문과 대답을 뭉게뭉게 나 혼자 펼쳐나갔다. 이 어렵고 묵직한 문제에 대한 대답들이 이토록 경쾌하고 명징하고 소박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고, 이토록 사랑스러울 수 있다는 것이 더더욱 신기했다.
첫 페이지에 실린 ‘곰비에게(1991-2009)’에서부터 시작하여, “개는 어느 날 문득 부숭부숭하고 작은 털뭉치로 사람에게 와서 마음을 온통 사로잡은 다음 서둘러 떠나버리는 존재다.”(182쪽), 올드독이 집을 비울 때에 소리와 풋코가 저질러놓은 만행을 적나라하게 찍어둔 사진들(299쪽), 바다와 들판과 눈밭 위를 마음껏 뛰어 노는 모습들, 이 책은 개를 그리고 찍은 게 아니라 삶을 사랑하는 방식을 기록해둔 책이다. 사랑의 방식의 저변에는 타자에 대한 예의가 깔려 있다. 그 예의와 최선이 은은하게 배어 나와서 나도 모르게 개처럼 순정한 눈빛으로 환원된 채로, 삶에 대한 회의감으로부터 잠깐이나마 벗어나와 순정해질 수 있어, 이 책이 참 고마웠다.
여행지에서 개를 볼 때마다 잠깐씩 생각했다. 개가 되고 싶다고. 어떤 기척을 느끼거나 주인과 눈을 마주칠 때마다 귀를 쫑긋거리는 그 귀를 가졌으면 해서. 사람의 귀도 그와 같아서 별 생각 없이 그저 좋아서 뛸 때마다 한껏 귀가 팔랑거렸으면 좋겠다고. 귀를 얌전히 덮고 가만히 웅크려 있음으로써 ‘저는 지금 아주 온순한 상태입니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반가우면 딸랑딸랑 대는 꼬리와 꼬리의 시작점에 달린 깔끔한 똥구멍을 자랑하는 엉덩이를 가지고 싶다고. 올드독은 “개를 키우면 개를 그리게 된다”(36쪽)고 적어두었지만, 『개를 그리다』로 인하여 올드독은 “개를 키우면 개를 배우게 된다”를 몸소 생활하고 있는 것만 같아 그가 아주 많이 부럽다.
책을 읽는다는 게 결국 하나의 또 다른 순정한 삶을 알게 되는 경이를 목격하는 일이라면, 『개를 그리다』에서 우리는 우리의 삶이 개만큼이나 순정하고 사랑스러울 수 있다는 걸 목격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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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를 그리다 정우열 저 | 알에이치코리아(RHK)
장장 10년간 영화, TV프로그램 등 당대 대중문화의 파워라이터로 존중받아온 올드독 정우열의 진짜 개 이야기다. 2004년에 탄생한 올드독 캐릭터는 지인이 키우던 몰티즈종 ‘곰비’의 성격과 정 작가가 키우는 와이어폭스테리어종 ‘풋코’의 외모에서 영감을 받았다. 《개를 그리다》는 각자의 개성을 존중받으며 엄연한 가족구성원으로서 사랑받고 있는 두 마리 개의 모습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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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연(시인)
시인. 트위터 @catjuice_ 시집 <극에 달하다>,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눈물이라는 뼈>, <수학자의 아침>과 산문집 <마음사전>, <시옷의 세계> 등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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