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란 수시로 타인의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죠. 오늘은 군인이 됐다 내일은 의사가 되기도 하고, 봄에는 미국인이었다가 여름에는 러시아인이 되기도 합니다. 변신이 주특기이지만, 그래도 그 사람이 되기까지 유독 힘든 배역이 있을 텐데요. 그래서 캐스팅이 됐을 때 뿌듯하면서도 한편으로 심란한 작품 가운데 하나가 바로 뮤지컬 <쓰릴 미>가 아닐까 합니다.
두 사람이 모든 것을 끌고 가야 하기에 무엇보다 호흡이 중요한 2인극, 고도의 두뇌싸움과 반전, 미묘하면서도 팽팽하게 긴장된 심리를 관객들 코앞에서 전달해야 하는 소극장 공연, 하지만 그 무엇보다 힘든 것은 이 작품의 바탕이 동성애라는 것 아닐까요? 배우들의 멋진 ‘수트빨’과 세련된 음악, 근사한 조명이 <쓰릴 미>의 매력을 더하지만, 극 자체의 재미와 반전은 동성애라는 코드가 배제될 경우 크게 약화될 테니까요. 지난해에 이어 다시 <쓰릴 미>에 참여하는 신성민 씨 역시 어려움을 호소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작년에 많이 힘들었어요. 29살의 신성민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아냈던 것 같고, 그래서 처음에는 정말 두려웠죠. 작년에 스스로 망가지는 기분이 들었거든요. ‘어디까지 내려가야 이 아이를 받아들일 수 있나...’ 하지만 그만큼 카타르시스가 있었고 재밌었어요. 또 그때 저와 지금의 제가 많이 다른 것 같아서 ‘나’라는 캐릭터에서 뭔가 더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
<쓰릴 미> 리허설을 앞두고 대학로 유니플렉스 인근 카페에서 신성민 씨를 만났습니다. 올해 서른 살이 된 그는 ‘나’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냈을까요?
“대본을 봤을 때의 느낌은 거의 비슷한 것 같아요. 그런데 파트너가 달라져서 느낌이 많이 다르더라고요. 사람이 바뀌면 매력도 달라지는 게 느껴져서 더 재밌는 것 같아요. 관객들은 또 어떻게 보실지 모르겠어요.”
이번 <쓰릴 미>에는 ‘나’에 신성민 씨를 비롯해 정동화, 전성우, 정욱진 씨가 캐스팅됐고, ‘그’에는 에녹, 송원근, 이재균가 참여하는데요. 상대배우들의 특징을 얘기해 줄 수 있나요?
“말하는 게 부담스러워요. 공연을 보러오는 관객들 중에 이 인터뷰 기사를 보는 분들도 있을 테고, 제가 한마디를 던지면 그걸 집중해서 보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그냥 있는 대로 보시면 좋겠어요. 제가 함부로 규정한다는 게 좀 위험하고 조심스러운 것 같아요.”
연습실에 남자들만 바글바글한 작품 가운데 하나잖아요?
“웃긴 게 배우는 다 남자인데 스태프는 다 여자예요. 연출님, 조연출님도 여자고, 남자 스태프를 본 적이 없어요(웃음). 남자끼리 있으면 재밌어요. 허물없이 편하고, 웬만하면 필요한 말을 현장에서 다 하죠. 또 알 수 없는 ‘으싸으쌰’가 있고, 파이팅이 더 넘친다고 할까요?”
<쓰릴 미> 때문에 많은 남자배우들을 인터뷰했는데, 동성애가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 대중적이지 않다 보니 배우 입장에서도 연기하는 게 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작년에는 정말 힘들었어요. 이동하 배우랑 페어였는데 대학 동기거든요. 그것도 10년 지기 베스트 프렌드. 어쩌다 보니 무대에서 연기는 처음 같이하는 거였는데, 그런 친구랑 키스를 한다는 게(웃음). 하지만 <쓰릴 미> 전체적으로 봤을 때 동성애라는 장치는 빼놓을 수 없다고 생각해요. 모든 것들에 대한 이유는 사랑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동성애를 인정하고 들어가야 하는 것 같아요. 물론 공연하기 전에는 굉장히 부담스러웠고, 연습할 때도 힘들었어요. ‘나’가 되기 전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키스나 어루만지는 것들이 극이 흘러가기 위한 당연한 행동이라서 첫 리허설 때 그런 부담이 사라지더라고요. 물론 연습 때는 상대가 다가오면 뭐하는 짓이냐고 하고, 웃겨서 빵 터지고 했는데, 공연 때는 오히려 스킨십이 세지는 감정도 있고. 사랑하는 사이가 그렇잖아요.”
대부분의 공연이 그렇지만 <쓰릴 미> 역시 여자 관객들이 많습니다. 성적 소수자의 이야기를 다룬 <헤드윅>이나 <프리실라> 같은 경우 인기 있는 남자 배우들이 여장을 하는 것에 매력이 있다면 <쓰릴 미> 배우들은 외적으로는 엄청난 남성미를 보이면서 동성애 코드를 깔고 있다는 게 다른 점인 것 같아요.
“딱히 그런 부분을 신경 쓰지는 않습니다. 대본에도 그런 얘기는 전혀 없어요. 그런데 <쓰릴 미>라는 작품이 한 명이 여성스럽게 갔다면 둘의 두뇌싸움이 두드러지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누가 누구를 조종했는가?’라는 문구가 있듯이 ‘나’가 한 없이 끌려가지는 않아요. 관객들만 눈치 챌 수 있는 둘 사이의 미묘한 신경전이나 게임들, 그런 것들이 <쓰릴 미>의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비슷한 맥락의 질문일 수 있는데, ‘나’와 ‘그’를 보자면 ‘그’가 좀 더 관객들에게 남성적인 매력을 어필합니다. 남자 배우들의 경우 다소 마초적인 모습을 보여줘야 더욱 인기를 얻는 경향이 있는데, 작년에 ‘나’를 했으니 올해는 ‘그’를 욕심낼 법도 한데요.
“작년에 두 배역에 대한 오디션을 모두 봤는데, 저는 대본을 읽고 ‘나’가 너무 하고 싶었어요. 반전에 대한 매력을 많이 느끼거든요. 사실 ‘그’는 폼 잡다 무너지는 것 같고(웃음), ‘나’는 찌질한 것 같지만 반전을 주잖아요. 관객들이 보기에는 그가 더 멋있을 수 있지만, 저는 ‘나’에 매력을 많이 느꼈고, 더 연민이 가는 캐릭터였어요. 54세와 20세를 넘나들면서 작품을 끌고 가는 것도 좋았고요.”
다음에 ‘그’로 캐스팅된다면요?
“나가 좋은데(웃음). 둘 다 매력적인 역할이에요. 이렇게 얘기한다고 해서 ‘그’를 엄청 잘 해낼 수 있다는 것도 아니고, 대신 ‘나’를 더 잘 아는 ‘그’가 될 수 있겠죠. 아직까지는 ‘나’도 부족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냐 ‘나’냐를 신경 쓰는 것 보다는 제가 하고 있는 ‘나’를 충실히 해서 최선의 ‘나’를 보여드리고 싶어요.”
답변하는 걸 보면 자신감이 있으면서도 무척 신중한 것 같습니다. 원래 성격이 ‘나’에 가깝나요?
“극단적으로는 ‘나’나 ‘그’가 같다고 생각해요. ‘나’는 말을 들어주고 매달리고, ‘그’는 툭툭 내뱉고 자기 멋 대로라는 차원에서 구분을 하는 거라면 저는 ‘그’에 가까워요. 그래서 ‘나’가 더 재밌는 것 같고요.”
사랑을 할 때도 ‘그’에 가깝나요?
“저를 만났던 여자 분들에게 들어보는 게 정확할 텐데, 글쎄요, 나쁜남자는 아닌 것 같아요. 그런데 ‘나’는 무서워요. 집착하잖아요. 둘은 너무 극단적이라서 저는 중간으로 하렵니다.”
2010년 <그리스>로 데뷔 이후 <오! 당신이 잠든 사이> <풍월주> <김종욱 찾기> <여신님이 보고 계셔> <환상동화> 등으로 무대에 서왔으니, 배우로서는 잘 달리고 있는 것 같은데요.
“사실 학교 다닐 때는 뮤지컬을 할 생각이 전혀 없었어요. 매력은 느꼈지만 역량이 안 돼서 못한다고 생각했고, 제 영역을 벗어난 장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계속 기회가 왔고, 기회가 왔는데 잡지 않은 건 아닌 것 같더라고요. 2011년 <오! 당신이 잠든 사이>를 6개월 하면서 정말 많이 늘었어요. 수업 같았죠. 초기에는 레슨을 정말 많이 받았어요. 버는 것보다 레슨비를 더 썼어요. 합창을 하면 피해를 줄 정도였거든요(웃음). 지금도 배우고 있어요. 연기나 춤, 노래 모두 평생 해야 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남자 배우는 확실히 20대보다 30대가 더 멋있는 것 같습니다. 배우라는 이름으로 할 수 있는 게 참 많은데, 앞으로 어떤 배우를 꿈꾸나요?
“더 멋있어지면 좋겠네요. 아직 30대가 된 지 8개월 밖에 안 돼서(웃음). 작년까지만 해도 조급함이 있었는데 올해는 욕심이 줄고 내려놓게 되는 것 같아요. 사실 아직 배우라는 생각을 안 해요. 저를 소개할 때 뮤지컬배우라고는 하지만 스스로 정립은 되지 않았거든요. 글쎄요, 궁금한 배우가 되고 싶어요. ‘저 배우가 저 역할을 하면 어떨까...’ 원래 영화가 꿈이었으니까 영화나 드라마도 물론 하고 싶지만, 3년간 공연을 하면서 무대라는 공간이 정말 소중해졌어요. 한 작품을 열심히 하면 다른 작품이 생기고 지금까지 그랬던 것 같아요. 지금에 충실하다 보면 서른다섯 살 쯤에는 조금 더 나은 배우가 되어있지 않을까...”
자신감이 묻어나면서도 신중한 모습, 신성민 씨는 <쓰릴 미>의 ‘나’를 연기하기에 딱 맞는 배우가 아닐까 싶네요. 공연 때마다 관객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선사하는 뮤지컬 <쓰릴 미>는 지난 8월 8일 대학로 유니플렉스 2관에서 무대를 열어 10월 26일까지 이어갑니다. 이번에 ‘나’와 ‘그’는 또 어떤 긴박한 무대를 선사할까요? 우연찮게도 지난주 만났던 최재웅 씨를 2007년 <쓰릴 미> 때 처음 봤는데 어느덧 그의 나이 서른여섯 살의 멋진 배우가 됐네요. 개인적으로는 올해 <쓰릴 미>를 통해 무대 위의 신성민 씨를 처음 만나게 될 텐데, 신성민 씨 역시 서른여섯 살에는 그의 바람처럼 더 멋진 배우가 되어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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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하정
"공연 보느라 영화 볼 시간이 없다.."는 공연 칼럼니스트, 문화전문기자. 저서로는 <지금 당신의 무대는 어디입니까?>,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공연을 보러 떠나는 유럽> ,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축제를 즐기러 떠나는 유럽>,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예술이 좋아 떠나는 유럽> 이 있다.
서유당
2014.08.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