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이 남자, 굉장히 바쁩니다. 무슨 턴테이블 위의 LP도 아니고 연극에서 뮤지컬, 드라마, 뮤지컬, 연극을 쉼 없이 돌고 있습니다. 연극 <올모스트 메인>에 이서 <나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뮤지컬 <아가타>의 로이, 드라마 <쓰리데이즈>의 킬러, 뮤지컬 <여신님이 보고 계셔>의 창섭까지 2014년에만 이 남자 도대체 몇 사람의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일까요? 게다가 국적과 나이, 캐릭터마저 다채로워 관객들은 그를 보며 ‘저 남자 연기 잘한다’고는 생각해도 같은 인물이라고는 눈치 채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 배우가 또 다시 새로운 연극에 들어갔다고 해요. 아직 <여신님이 보고 계셔>로 무대를 누비고 있을 그가 연극 <가을반딧불이>에 참여한다는 말을 듣고 연습실 쪽으로 달려가 보았습니다. 드라마나 뮤지컬 무대에서는 낯설지만 연극 무대에서는 터줏대감인 이 남자 진선규. 요즘 너무 달리는 거 아닌가요?
“이러면 안 되는데 다 해보고 싶은 역할이었어요. 그런데 한 것만 많지 돈은 별로 못 벌었어요(웃음). 재밌는 건 이렇게 연기를 해도 사람들이 저를 잘 못 알아 봐요. 드라마나 공연에서 모두 특징 있게 분장을 해서 그런가 봐요.”
2011년 연극 <너와 함께라면> 때 인터뷰를 했으니까 3년 만인가 봅니다. 그런데 더 ‘영’해 보이네요. 당시 나이에 갑절은 되는 아버지 역할을 맡긴 했지만, 뭔가 새로운 피를 받은 느낌이랄까요?
“나빠 보인다는 사람들도 있어요. 제가 그 사이 라식을 하고 안경을 벗었는데, 좀 날카로워 보인다고. 저는 오히려 좋더라고요. 예전에는 착한 이미지 때문에 할 얘기 잘 못할 때도 있었거든요(웃음). 날카로워 보여서 그런지 새로운 이미지의 배역들을 만나기도 했고요.”
라식을 하면 새 세상을 보게 된다더니, 이건 다른 의미의 새 세상이군요(웃음). 정말이지 그 사이 필모그래피가 많이 늘었어요. 영화 <관능의 법칙>-김 대리, <찌라시 : 위험한 소문>- 남흥 역으로 스크린을 통해서도 만날 수 있었고요. 전성기로 도약하고 있는 중인가요?
“겹쳐서 많이 하긴 했는데, 전성기는 아직 안 온 것 같아요(웃음). 지금껏 극단(공연배달서비스 간다) 공연을 중심으로 좋은 작품에 참여해 왔는데, 제 공연을 보고 다른 매체에서 역할을 제안해 오셨을 때 다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작품이고 역할이었지만, 그래서 하고 싶었어요.
연극 <가을반딧불이>에서는 서른 살에 어린 아들을 두고 세상을 떠나 서른이 된 아들 곁에 나타나는 분페이 역을 맡았습니다. 작품이 좋다는 얘기에 역할의 비중을 떠나 선뜻 참여한 것입니다.
“<아가사> 때 함께 했던 (양)소민이랑 (오)의식이가 <가을반딧불이>에 참여하는데 작품이 굉장히 좋다는 거예요. 그런데 캐스팅은 끝났다고 해서 대본이라도 보겠다고 했죠. 그러다 분페이 더블을 찾는다기에 하고 싶다고 했어요. 분량으로 따지면 작은 역할이지만, 작품이 좋으면 일원이 돼서 그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다는 게 좋거든요.”
정의신 작가의 <가을반딧불이>는 지난해 초연 이후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로 좋은 평을 받아 왔습니다. 외로운 변두리 인생들이 서로를 의지하며 가족으로 살아가는 과정이 따뜻하면서도 유쾌하게 녹아납니다.
“요즘 연극은 코미디나 로맨틱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이 작품은 조용하고 사소한 얘기들이지만 유쾌하고 감동이 있더라고요. 일본을 배경으로 했지만 사람이 느끼는 정서는 비슷한 것 같아요. 일상의 지루함이 있는 조용한 호숫가에 사람들이 찾아오고, 거기에 머물게 되면서 트러블이 생기고 외로움이 드러나고, 하지만 가족의 정서가 생기고 화해하면서 그 아픔을 극복해 가는. 분페이는 서른 살에 죽었는데 서른 살이 된 아들과 동갑으로 만나요. 그리고는 ‘너 혼자 그렇게 어둡고 외롭고 걱정하며 살지 마. 그렇게 안 살아도 돼!’라고 말해주거든요.”
사람냄새 짙은 작품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천생 연극배우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렇죠. 사람을 좋아해요. 저랑 생각이 비슷한 사람을 가장 좋아하고, 그래서 좋은 배우가 되기 위해서 같이 고민하고 앞으로 걸어가는 극단 간다 식구들을 좋아하고요. 그런데 다른 매체도 충분히 매력이 있는 것 같아요. 화면에서보다는 무대 공연을 하고 있는 제가 편하고 좀 더 친해질 수 있는 부분들이 많지만, 새로운 매체를 접하면서 연기적인 다른 부분을 생각하게 되고 배우로서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되더라고요.”
‘식구(함께 밥을 먹는 사이)’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인지 극 중에 음식을 먹는 장면이 꽤 등장한다고 들었습니다. 무대에서는 쉽지 않은 설정인데, 일본 연극의 특징인가요?
“그러게요. <나와 함께라면>도 그랬고, <야끼니꾸 드래곤>도 그랬네요. 어떤 연구에 사람이 가장 친근해질 수 있는 방법이 같이 밥 먹는 거라고 하더라고요. 이번에도 연출님이 직접 전골을 준비해서 무대에서 끓여 먹을 거예요. 함께 밥을 먹는 장면인데 데거나 쏟지 않게 조심해야죠(웃음). 찹쌀떡이나 국수를 먹는 장면도 있고요.”
올해 쉬지 않고 달려와서 꽤 지쳐 보이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활기차 보입니다.
“아직은 괜찮아요. 힘들고 스트레스 받을 수도 있는데, 빨리 다독이고 집중하고 즐겁게 하자 생각하거든요. 또 아기가 있어서 그런가. 이제 돌 지났거든요. 조금씩 나를 알아보고 아빠라는 말도 하는 것 같고, 그래서 피곤도 풀리고 힘이 되는 것 같아요. 가족의 힘이죠(웃음).”
진선규 씨에게 가족은 어떤 존재일까요?
“<여신님이 보고 계셔>에서 무인도에 갇힌 남북한 군인이 어떤 계기로 여신님이 있다고 믿고 각자의 여신을 만들어요. 자기가 무인도를 벗어나 돌아가야 할 곳인데, 개인적으로 제 여신은 가족인 것 같아요. 가족이 있기 때문에 가족을 위해서 이렇게 힘을 내고 살 수 있는 게 아닐까. 보통 남자배우는 가정을 꾸리고 아기가 생기면 뭔가 포기하고 현실적이게 돼요. 저도 물론 예전보다는 현실적이지만, 너무 현실로 빠지지 않도록 잡아주는 게 아내(연극배우 박보경)예요. 어느 정도 돈을 벌되 나머지 부분에서는 제가 하고 싶은 걸 선택할 수 있도록. 사실 도전이고 실험인데, 배우에게는 꼭 필요한 과정이기도 하거든요.”
진선규 씨가 좋은 배우의 길을 걷도록 집 안에서 내조하는 사람이 아내라면 집 밖에는 극단 간다가 있습니다.
“제가 지금 공연을 하면서 ‘진선규 좋은 배우, 연기 잘한다, 사람 좋다’는 말을 듣게 된 건 간다에서 작업하면서부터였어요. ‘좋은 배우가 되고 싶고, 좋은 배우가 뭐지?’를 고민했던 친구들이 간다를 만들어서 10년간 함께 공부하고 작품을 올리고. 매번 결과물보다 배우들의 과정을 중시했던 (민)준호 때문에 이 만큼 커질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간다는 제2의 집이라고 할 수 있죠. 고민했던 그때가 없었으면 지금 내가 여기에 없고, 그곳이 없었으면 지금 이 생각으로 작품을 고르고 연기하지 못했을 것 같아요.”
한참 얘기를 나누다 보니, 거창하지는 않지만 배우로서 분명한 목표와 꿈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아니, 어쩌면 더 거창할 수도 있겠네요.
“그렇죠, 가장 거창한 거죠. 저는 맹목적으로 좋은 배우가 되고 싶어요. 그런데 좋은 배우가 뭔지는 아직 모릅니다. 돈이나 명예도 한 부분일 수 있겠지만, 스스로 이런 생각으로 이렇게 걸어왔고 또 이렇게 갈 거니까 좋은 배우라고 느끼고 싶어요. 그 순간은 저 앞에 있을 테고 아직은 좋은 배우가 뭔지 모르지만, 제 꿈은 좋은 배우예요.”
항상 한 발을 이상세계에 떼놓고 있는 기자는 용감하게 자신의 꿈을 향해 달리고 있는 진선규 씨와 꽤 오랜 시간 얘기를 나눴습니다. 배우를 인터뷰한 게 아니라 상담을 받은 셈이라고 할까요? 연극배우를 만날 때면 종종 이런 현상이 빚어집니다(웃음). 30대 후반의 나이에도 현실만큼 이상을 쫒을 수 있는 그가, 그리고 그런 가장을 응원하는 가족이 멋져 보였거든요. 멋진 배우 진선규 씨가 출연하는 <가을반딧불이>는 6월 19일부터 7월 20일까지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에서 공연됩니다.
그런데 ‘가을 반딧불이’라며 여름에 공연하는 게 이상하지 않나요? 원래 가을에는 반딧불이가 없다고 해요. 제목이 ‘가을 반딧불이’인 이유는 작품을 통해 확인할 수 있겠지만, 문득 원래 없는 존재이니 어디에나 있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혈연으로 맺은 가족이 없으니, 그 누구와도 또 다른 인연으로 가족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조용한 호숫가, 그 곳에서 서로의 가족이 되어 주는 외로운 사람들의 따뜻한 이야기가 벌써부터 궁금해지네요.
[관련 기사]
- 연극 <썸걸(즈)> 그냥 ‘개새끼’는 아닌, 배우 최성원
-뮤지컬 <캣츠> 볼까? 한국 초연 <드라큘라> 볼까?
- 뮤지컬 <위키드>, 도로시가 오즈에 떨어지기 전 무슨 일이 있었을까?
-자꾸만 가게 되는 묘한 클럽, 뮤지컬 <트레이스 유>
-홍대 인디 밴드가 변하고 있다
윤하정
"공연 보느라 영화 볼 시간이 없다.."는 공연 칼럼니스트, 문화전문기자. 저서로는 <지금 당신의 무대는 어디입니까?>,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공연을 보러 떠나는 유럽> ,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축제를 즐기러 떠나는 유럽>,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예술이 좋아 떠나는 유럽> 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