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실지 모르겠지만, 나는 소설가다. 간혹 나를 칼럼니스트나 에세이스트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이런 말을 했다면 다행이겠지만, 사실 내가 도대체 뭐하는 사람인지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라 구차히 말했다. 신인의 설움이라면 설움이겠지만, 딱히 누구한테 알아달라고 글을 쓰는 건 아니니 상관은 없다. 글을 쓰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글을 쓸 수 있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글을 쓰면서 느끼는 자족감이다. 그러므로 자기 글의 첫 번째 독자이자, 최종 책임자인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게 쓰는 것, 그것이 유일한 목표이자 궁극적인 지향점이다.
하지만 나 역시 작가인지라 ‘과연 대문호들의 생은 어땠을까’ 한두 번쯤은 상상해봤다. 여름비 같은 독자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여왕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글을 썼던 셰익스피어 같은 작가의 삶은 도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나 같은 변방 작가로선 상상조차 어렵다. 자신을 두고 “인도와도 바꿀 수 없다”고 말을 들었을 때, 나 같으면 '아니, 인도 정도라면 슬쩍 바꿔줘도 좋은 거 아닌가?’라는 생각했을 테지만, 본인도 아닌 내가 제 아무리 추측을 해봐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요컨대, 타인의 생각이라는 것은 발버둥 치며 상상을 해도 당사자의 영혼을 빌려오지 않는 한 짐작조차 불가능한 것이다.
이 점을 알고 있었으므로, 불가능한 시도 따위는 하지 않는 게 현명하지만, 나는 무명인데다 멍청하기까지 해서, 어리석은 짓을 한 번 해본 적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GV(Guest Visit)’. 즉, ‘관객과의 대화’였는데, 눈치 챘겠지만 당연히 내가 쓴 작품이 아니었다. 좀 더 눈치 빠른 독자는 알아챘겠지만, 그 영화는 앞서 언급한 셰익스피어의 원작을 스크린으로 옮긴 <로미오와 줄리엣>이었다. 여기서 잠깐, 영화 소개 한 토막.
영화는 제목 그대로 원작인 <로미오와 줄리엣>에 바탕을 두고 있다. 당연히 차이점도 있는데 원작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기 위해 원수 가문이었던 몬테규 가와 캐플릿 가를 기업 가문으로 바꾸고, 칼로 대결을 펼치는 장면들을 총격전으로 탈바꿈 하는 등 여러 요소들에 현재의 옷을 입혔다. 하지만, 총에는 'Sword', 즉 ‘검’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어, 배우들은 총을 꺼내며 원작의 대사인 “내 검을 받아라”를 그대로 재현해낸다. 처음에는 ‘이거, 너무 끼워 맞추는 거 아니야’ 라는 생각이 들지만, 계속 보다보면 문어체 대사의 과감함에 어느새 익숙해진다(솔직히 말하자면 ‘뭐, 셰익스피어니까’ 하는 심정으로 보게 된다). 게다가, 덤으로(어째 이게 더 중요한 것 같지만)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찬란했던 전성기 외모가 화면에 고스란히 박제돼 있으니, 여성 팬이라면 확인해보시길. 그럼, 영화 소개 끝.
다시 ‘관객과의 대화’로 돌아가서 이야기를 잇자면, 아무리 생각해도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었다. 당연히, 초대 1순위는 셰익스피어였다. 그렇다 해서 무덤에서 쿨쿨 자고 있는 양반을 깨울 수도 없고, 기적적으로 일어난다해도 나 같은 작가를 대신해 행사장인 인사동까지 와 줄 리 만무했다. 궁여지책을 짜낸다 해도 사정은 비슷했는데, 논리적인 섭외 2 순위는 바즈 루어만 감독이었고, 3순위로 내려가면 기함이 터지게도 주연 배우인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클레어 데인즈였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무수한 소거법의 과정을 거쳐, 한국의 무명 소설가인 내게까지 차례가 온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 행사의 취지가 바로 셰익스피어의 원작과 바즈루어만의 영화를 비교하며 감상하는 것인지라, 절반 정도는 책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자리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출판사와 연이 있었던 내가 ‘셰익스피어 탄생 450주년 기념’이라는 그 이름도 거창한 행사에 셰익스피어와 바즈루어만과 디카프리오와 (어리둥절하게) 클레어 데인즈까지 대신하여 자리하게 됐는데, 아니나 다를까 영화가 끝난 후 ‘관객과의 대화’를 시작하려니 객석의 칠할 이상이 비어 버렸다.
나는 침착하게 ‘으으음. 러닝타임이 두 시간이 되다보니, 다들 화장실에 갔나보군’하고 생각했지만, 나의 긍정적인 인생관은 무참히 깨어지고 말았다. 소변 뿐 아니라, 신체의 모든 수분을 배출해도 남을 시간 동안, 빈 객석으로 돌아 온 것은 적막한 공기뿐이었다. 그러나 남아 있는 3할의 관객들의 표정에서 드러난 건 바로 그 누구에게서도 볼 수 없는 예술적 토론에 대한 열정, 영화의 배경에 대한 깊은 호기심, 그리고 새로운 만남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 면 좋았겠지만, 하나 같이 ‘아, 지금 나가긴 애매한데……’ 하는 후회와 통회뿐이었다. 인류애적인 헌신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관객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최대한 행사를 빨리 끝내는 수밖에 없는 듯 했다. 그리하여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감독도, 원작자도, 배우도 아닌 제가 이 자리에 있어 죄송합니다”라며 겸손히 말문을 튼 후, 앉아 계신 분들에 대한 고마움이 느껴져 그날 준비한 모든 정보와 감상을 성심성의껏 풀어 놓았다.
“바즈루어만이 원래는 보그지 호주판 편집장이라 패션에 관심이 많았으며, 아내가 패션 디자이너라서 작품 속 의상이 화려합니다. 작품마다 파티 장면이 나오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 작품은 크게 세 번 영화화 됐는데, 첫 번째가 1936년, 두 번째가 1968년, 그리고 오늘 본 1996년의 작품이 세 번째로 ……”
나 역시 처음 하는 GV인지라, 나 자신과 관객 모두에게 최소한 무익하지는 않은 시간이 되어야겠다는 일념으로 며칠 간 준비해놓은 모든 정보와 감상을 엄격히 추려서, 정제된 언어로 하나씩 하나씩 그야말로 정성껏 옮겼는데, 그러다 보니 나는 어느덧 땀을 흘리며 말하고 있었고, 어느새 나 스스로도 ‘어. 내가 이렇게 말을 잘 하였던가!’ 하고 느낄 정도가 됐다. 그 때문인지 시작할 때는 엉덩이를 쭉 뺀 채 극장의자에 몸을 푹 담갔던 관객들이 어느새 나의 헌신적 태도와 친절한 해설, 아울러 이를 뒷받침하는 풍부한 정보, 동시에 간간이 탄성을 내지를만한 통찰력 깃든 감상에 자리를 고쳐 앉았다, 면 좋았겠지만, 역시나 다들 ‘거 참, 용쓰는구먼’ 하는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굴하지 않고 준비해간 주옥같은 정보를 약 삼십 분간 알차게 전한 후, 조심스레 “혹시 질문 있습니까?”하며 물었는데, 바로 그때에서야 객석에선 이전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더욱 깊은 정적이 해일처럼 덮쳤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럼. 오늘 행사는 이걸로 끝……”이라고 말하는 순간, 일제히 ‘와아! 해방이다!’라는 표정으로 모두 앞 다투어 극장을 빠져 나갔다.
그날 나는 애써 위로하는 담당자와 맥주잔을 기울이며 생각했다.
적어도 내게 한 가지 사실은 다행이었다. 그건 나의 예지력이 아직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이날 반응이 폭발적으로 별로일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예상을 확인 했으니, 이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만 않으면 되는데, 실은 불행 역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애초에 이 행사를 세 번 맡기로 약속 한 것이다.
아, 이제 열흘 후로 다가 온 <테스>와 다음 달의 <연인> 행사는 어쩌란 말인가. 정말이지, 망명중인 폴란스키 감독을 납치라도 해오고 싶은 심정이다.
* 오랜만에 등장하는 편집자 주 : 최민석 작가와 함께 하는 두 번째 GV에는 여름비 같은 사랑을 보내 주세요.
- <역린> 새로운 시대에 대한 갈증, 갈망, 갈구
- <셔틀콕> 그렇게, 떠밀려, 어른이 되어보라는 여행
최민석(소설가)
단편소설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로 제10회 창비신인소설상(2010년)을 받으며 등단했다. 장편소설 <능력자> 제36회 오늘의 작가상(2012년)을 수상했고, 에세이집 <청춘, 방황, 좌절, 그리고 눈물의 대서사시>를 썼다. 60ㆍ70년대 지방캠퍼스 록밴드 ‘시와 바람’에서 보컬로도 활동중이다.
이리에고토코
2014.07.06
sunny7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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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2004000303
2014.05.26
저도 영화 끝나고 사람들이 너무 많이 나가 앉아있기가 좀 미안할 정도였어요.. ^^
그리고 질문을 안 한건 너무 이야기를 잘 해주셔서 딱히 궁금한게 없었기 때문이었는데, 깊은 정적이 해일처럼 덮쳤다고 느끼셨다니...
이번 토요일에도 기대 많이 하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질문은 안 할 것 같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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