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롯한 혼자만의 쾌감
집집마다 세계명작동화 전집으로 벽을 채우기 바빴던 시절이 있었다. 길고 얇은 전집을 모조리 뽑아 하는 놀이도 생겼다. 책을 가운데로 갈라 펼쳐 일렬로 세우는 걸로 시작했다. 누런 장판만 휑하던 거실은 금세 오두막으로, 마당 딸린 집으로, 궁전으로 변하곤 했다. 한끝을 툭 건드리면 세로로 선 책들이 하나씩 미끄러지며 무너졌다. ‘도미노’, 그것은 주저하지 않고 한 방에 모든 걸 무너뜨릴 수 있는 화끈한 어린이만이 해낼 수 있는 놀이었다. (그래서인가, 나는 쉽게 포기할 줄 아는 쿨한 어른으로 자랐다.)
알록달록 동화책이 넘어지는 게 예쁘기도 했지만, 가장 기대하는 건 구석진 자리였다. 도미노를 세울 때마다 귀퉁이에 방 하나를 마련하곤 했는데, 다리를 굽혀 앉아야 겨우 낄 수 있는 크기였다. 거기에 들어가 구수한 종이 냄새를 맡으며 조용히 웅크리고 있었다. 엄마가 이름을 부르며 한참 찾을 때까지 책장 틈으로 비껴드는 빛을 바라보았다. 왠지 한 쪽 다리가 찌릿하기도 한 게 오묘한 기분이었다. 오롯이 혼자가 되어 숨을 때 느끼는 쾌감을 일찍이 알아버렸다. 하여, 끈질기게 튕겨댄 ‘고무줄’과 한 쪽 발로 투기를 일삼았던 ‘땅따먹기’와 함께, 내 어린 시절 ‘베스트 놀이 3’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다.
혼자이고 싶은 ‘그 날’
언제부턴가 욕지기가 자주 치밀기 시작했다. 가깝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비밀을 줄에 엮어 내 앞에 금을 치기 시작하던 때인 것 같다. 상처로 남았던 금들은 이제는 아물어 내 살의 일부가 됐다. 감추고 싶은 일이 나도 많아진 것이다. 사람들은 나를 칭찬해야 상황에 놓이면 ‘배려’란 단어를 고른다. 남한테 욕먹는 게 죽어도 싫어 포기한 게 많을 뿐이었는데……이런 걸 ‘착한여자 콤플렉스’라고 한다더라. 콤플렉스마저 대세에 맞추며 사는 그저 그런 어른인 거다.
“한낮의 당신은 당당하고 친절하며 이미 꽤 많은 것들을 이루어낸 ‘괜찮은 여자’다. 그러나 밤이 되면 ‘또 다른 여자’가 고개를 내민다. 지금 나는 완전히 잘못 살고 있다는 무서운 자책과 아무도 이런 사정을 알지 못할 거라는 고립감이 밀려온다. - 우르술라 누버 <나는 내가 제일 어렵다> 중에서
이게 나만의 경험이 아니라면, 누구나 기꺼이 혼자이고 싶은 ‘그 날’이 있다. 나에겐 마치 야구 시즌처럼 기나긴 외톨이 지향 기간이 종종 있다. ‘그 날’을 무시하고 억지 배려, 억지웃음을 남발하다가는 큰일 난다. 길 가다 갑자기 아스팔트에 머리를 쿵쿵 찧고 싶은 충동까지 인다. 그렇다고 진짜 그리하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미친 여자 꼴이겠는가. 욕지기가 이는 하루를 마감할 때, 냉장고를 열고 2ℓ짜리 생수를 병째로 벌컥 들이키거나, 눈물로 베갯잇을 적실 뿐이다.
자신의 상태가 어떤지, 무슨 생각이 드는지 응시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자신에게 진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본인도 알지 못하게 된다. 그저 '이런 나를 사랑해줄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을 거야'라는 식의 부정적인 확신만이 점점 더 강해진다. 이렇게 우리는 타인을 잃어버리지 않고자 하는 소망 때문에 자신을 잃어버리고 만다. - 우르술라 누버 <나는 내가 제일 어렵다> 중에서
산의 정기를 듬뿍 받아
‘외톨이 시즌’의 개막일, 이르게 알람을 맞추고 일어나 집을 나섰다. 아침 그림자가 차지게 발끝에 달라붙었다. 빨려 들어갈 것처럼 긴 지하도를 걸었다. 타박타박. 낯선 길이었다.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듯 덜컹대는 전차를 탔다. 융통성 없이 느려서 맘에 들었다. 차분히 생각이란 걸 하려고 부지런을 피우던 참이었다. 직선으로 뻗었던 선로가 왼쪽으로 꺾였고 목적지에 닿았다. 도서관이다.
삿포로 중앙도서관은 모이와 산 바로 앞에 있다. 내가 여태까지 사랑한 도서관 모두 산과 맞닿아 있었다. 잉여로운 생활을 막 시작했던 경기도 S 시의 도서관은 산 중턱에 터를 잡고 있었다. 양손에 장바구니와 대출한 책을 끼고 언덕을 오르면 한겨울에도 숨차고 땀 차고 그랬다. 기어코 올랐던 건 도서관을 둘러싼 산책로와 열람실의 커다란 창가 자리가 좋았기 때문이었다. 학생들이 ‘중도’로 불렀던 중앙 도서관도 산 전체가 캠퍼스였던 학교 정상에 있었다. 한강이 내려다보여서 경치도, 강바람도 끝내줬다. 예부터 양반들이 시 쓰며 풍류를 즐겼다던 정자는 대부분 아찔한 낭떠러지에 있었다. 사계절 출렁이며 변하는 자연은 활자와 잘 어울린다. 그래서 교가는 죄다 ‘아무개 산 정기 받아’로 시작하는 건가 싶다. 어느 열람실 몇 번에 앉은 남학생 멋있다며 키득대던 것도 다 정기를 받아 끓어오른 청춘의 증거였다.
도서관 유랑자
삿포로의 중앙 도서관 규모는 생각보다 아담했다. 1층에 들어서니 ‘여기가 일본이 맞구나’ 싶은 광경이 먼저 들어왔다. 지성의 산실이라는 도서관과 왠지 어울리지 않는 잡지와 만화가 눈에 띄게 많았다. 아무 만화책이나 집어 들었다가 얼핏 낯뜨거운 그림에 후다닥 다시 꽂아 넣기도 했다. 신간과 문학 코너 옆에는 각자 책 읽기에 열중하는 사람들로 의자가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1인용 소파가 일렬로 늘어져 있고, 좌석 사이엔 얼굴이 보이지 않게 칸막이를 설치한 배려가 맘에 들었다.
2층은 한산해서 서가를 유랑하기 좋았다. 아무 책이나 꺼내 냄새를 킁킁거리고 손으로 쓰다듬었다. 책장처럼 농염한 유혹이 또 있을까. 세계명작동화 도미노 안에서 느낀 것과 같은 종류의 쾌감을 느꼈다. 바람 타고 날아와 물이랑 햇살이랑 먹으며 자라난 나무가 종이가 되었다. 거기에 오래전 누군가 지나온 길, 생각, 이야기, 의지가 활자로 새겨져 있다. 그런 생각으로 흥분해 도서관의 손때 묻은 책을 열었다. 장독을 열고 잘 곰삭은 장아찌를 맛보는 기분이었다.
도서관의 물리적 공간은 한정되어 있으나, 정신적 공간은 거의 무한하다. 깊은 바다를 어슬렁거리는 물고기처럼, 또는 막막한 우주를 유영하는 우주인처럼 모든 움직임이 무의미하고 자유롭고 또 아름답다. 뚜렷한 목적도 없이 서가 사이를 이리저리 거니는 모습은 마치 해초들 사이를 하릴없이 헤집고 다니는 물고기 같다. 그곳에서 꼭 책을 만나야 하는 것도 아니다. 오래된 책의 곰팡이 냄새를 맡아도 좋고. 높고 낮은 책의 키들과 그 색깔, 두께 등이 만들어내는 음악을 즐길 수도 있다…… 도서관은 책을 보는 곳이기도 하지만 창밖을 보는 곳이기도 해야 한다. 풍경은 상념이 되고 상념은 책 읽기의 연장이다...... 햇살 중에서 가장 매력적인 햇살은 봄날 아침 쪽마루에 내려앉는 햇살과 도서관 한 귀퉁이에 들어와 문자의 적막을 조심스레 희롱하는 햇살이다. - 이남호 <보르헤스 만나러 가는 길> 중에서
도서관 창가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다. 창을 통해 변덕스러운 날씨와 자연을 고스란히 목격한다. 오랜만에 긴 호흡도 내쉰다. 일본의 삿포로, 삿포로의 모이와 산 밑 도서관까지 왔다. 그 누구도 내가 지금, 홋카이도의 역사나 인류의 기원 따위를 적은 책에 둘러싸여 있다고 상상하지 못한다. 고로 나에게 닿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다. 앞으로 읽을 일 없을 확률이 높은 책들 사이에서 생각의 파도가 밀려온다. 아무 것도 쓰여있지 않은 파도도 밀려온다. 도서관은 모름지기 외톨이의 세상이다. 사유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도시의 공간 중 하나다.
* 삿포로시 중앙 도서관 (http://www.city.sapporo.jp/toshokan/english/english.html)
-야경으로 유명한 모이와 산 로프웨이를 타러 가기 전, 근처에 위치한 중앙 도서관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느껴 보자. 누구나 열람실에 출입할 수 있으며, 삿포로 거주 시민의 경우 대출도 가능하다. 구내식당엔 다양한 일본식 메뉴가 있고 저렴하다. (영업시간: 오전 11시 ~ 오후 4시)
- 찾아가는 길: 스스키노에서 전차를 타고 ‘중앙도서관앞(中央?書館前)’ 정거장에서 하차
(주소: 札幌市中央?南22?西13丁目)
- 개관 시간: 오전 9시 15분 ~ 오후 8시 (주말ㆍ공휴일은 오후 5시까지/ 제 2ㆍ4 수요일 휴관)
- 시설 개요: (1층) 전시관 및 카페 / (1ㆍ2층) 열람실 / (지하 1층) 구내식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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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인희
홋카이도의 매력에 흠뻑 빠져 삿포로에서 살고 있다.
새로운 언어와 문화, 일상을 여행한다.
먹고 마시는 것과 사소한 순간을 좋아하며, 종종 글자를 읽고 쓴다.
song_soon2@naver.com
뚱이
2014.0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