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진은 소설 속 인물 중 누구와 가장 비슷할까?
자기 자신을 소설 속 캐릭터로 표현한다면 어떤 사람으로 표현하고 싶은지? 책을 좋아하며 자란 소녀들은 대부분 『빨간머리 앤』의 앤에 자신을 투영하거나 『작은 아씨들』의 둘째딸 조에 자신을 비춰 보곤 하지만 나는 어머님의 남다른 빨간머리 앤에 대한 사랑에 아주 질려 버렸기 때문에 앤이라면 아주 질색이었다.
글ㆍ사진 김현진(칼럼니스트)
2014.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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썰을 좀 풀자면, 어머니는 지브리에서 만든 빨간머리 앤을 텔레비전에서 해 줄 때 완전히 푹 빠져서 보실 정도였는데 내가 무심코 보고 계시지 않은 줄 알고 초등학교 시절 리모콘으로 채널을 돌렸다가 따귀를 철썩 얻어맞을 정도였다. 그 다음부터 나는 본격적으로 비뚤어지기 시작하며, 왜 애를 낳아서 키운담 비쩍 말라서 주근깨 투성이에 상상 잘하고 트렁크 위에 앉아서 두 손을 모으고 마차에 흔들리며 집에 갈 길을 기다리는 여자애나 어디 가서 하나 주워 오지 않고, 하고 투덜거리는 삐딱한 여자애로 자라났다. 


덕분에 모든 소녀들의 친구인 앤은 나의 주적이 되어, 빨간머리 앤의 추억을 늘어놓는 사람들만 보면 ‘그래봤자 그 여자도 똑같은 여자다, 빨간머리에 빼빼 마른 시절은 한순간 뿐이고 그 목놓아 불만을 외치던 빨간머리는 결국 금갈색이 되었고, 빼빼 마른 몸매는 나중에 길버트와 경쟁자인 아가씨를 보면서 저 애는 나중에 뚱뚱해질 거야, 하고 우월감을 느끼는 소재가 된다, 그리고 결국 마슈 아저씨는 과로를 하다 죽었고 머릴러 아줌마는 레이첼 아줌마와 살림을 합쳐야 하지 않았느냐, 그것도 피 한 방울 안 섞인 그 앤이라는 년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서! 매슈와 머릴러 아저씨를 부스터로 사용해 결국 의사 부인이 되고 만 독한 년이다!’라고 주워섬기면서 모두와 빨간머리 앤을 갈라놓는데 애를 태웠지만 다들 별로 사이가 나빠지지 않았고 나빠진 건 내 평판뿐이었다. 이런 젠장. 하여튼 나로서는 빨간머리 앤과 전혀 자신을 동일시할 수 없었고, 상상에 능하다는 것은 비슷했지만 죄다 아주 음울한 상상들이었고 전혀 앤처럼 해맑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공감이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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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빨간 머리 앤>


오히려 내가 공감을 느낀 캐릭터들은 브론테 자매의 작품들에 나오는 여자들이었다. 가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과 비슷하지 않으냐고 물어 오는 사람들이 있는데, 스칼렛과 정말 비슷한 사람이 있다면 우리나라의 전 대통령 이명박이다. 그들의 외침은 너무나 흡사하지 않은가, 귀 있는 자는 들어 보라! “나는 다시는 도둑질을 하더라도, 거짓말을 하더라도, 설사 살인을 하더라도, 절대 굶지 않아! 나는 부자가 되겠어. 아주 큰 부자가!” 둘 다 말한 것의 대부분을 성취했다는 것도 비슷하다. 게다가 스칼렛 오하라는 여학교에서 다른 과목은 다 틀려도 수학만은 아주 능했는데, 나는 능력별 수업에서 수학만은 전교 꼴찌 반이었으니 도저히 스칼렛 오하라와 비슷하다고는 할 수 없겠다. 굳이 비슷한 걸 찾자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첫 구절인 “스칼렛 오하라는 알고 보면 그리 미인은 아니었다(저자 주 : 그렇지만 남자를 꽤나 많이 낚았다는 의미임).”정도겠지만, 그것 말고야 뭐. 굶기를 싫어한다는 것도 비슷하겠지만, 내가 바로 이거야, 하고 생각하는 것은 브론테네 여인들이다. 


혹시 제인 에어냐고? 무슨 소리, 그 강단 있고 삐쩍 마른 지고지순한 아가씨가 나와 비슷할 리가. 정말 엉큼하기로 따진다면 레트 버틀러와 문학계에서 첫째 둘째 자리를 다툴 로체스터가 제인 에어의 질투심을 자극하기 위해 불러들인 로자몬드 올리버가 바로 그 첫째 주인공이다. 물론 가슴이 크고 당당한 체형은 전혀 다르지만 성격(싸가지)는 상당히 닮은 듯한데, 로체스터에게 무슨 노래를 부르라고 시키면서 외친 한 마디의 대사가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이던 나에게 큰 깨달음으로 다가왔다. 이것이 여자로서 갈 길이 틀림없다! 단역 중의 단역 로자몬트 올리버가 무어라 외쳤는가 하면 다음과 같다. “왕국에 왕좌는 하나뿐이에요!” 그래! 난 이렇게 살겠어! 실제로 어느 정도는 그렇게 살았지만 왕국에 왕좌는 하나였는데 대부분 내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나는 제인 에어 같은 꼬라지를 한 채 로자몬드 올리버인 척 했으니 로체스터들도 눈이 있지 잘 될 리가. 


그보다 더 이 여자는 바로 나 자신이다! 라고 생각한 것은 『폭풍의 언덕』의 캐서린(엄마 쪽)이다. 상스럽게 말하자면 남자한테 목숨 거는 꼴 하며... 물론 체면이나 재산을 중시해서 린턴을 택하는 그런 머리는 내가 좀 모자라지만 속물스러운 면이 아주 없지는 않으니 이것도 비슷하다고 해 주자. 뭐랄까, 이 여자는 그냥 미친년이다.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며 울고 불고 히스클리프. 우리 들판으로 가! 하고 외치는. 그 남자의 손이 잡히지 않으면 발광할 정도로 미쳐 버리는. 그리고, 결국 그 사랑 때문에 미쳐 죽어 버리는. 그런 의미에서 로체스터의 첫 아내 버사에게도 약간의 친근감을 느꼈지만 내가 피부가 흰 관계 및 그녀의 대사가 별로 나오지 않은 바람에 우리의 친근감은 그다지 발전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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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폭풍의 언덕>



어쨌거나 사랑하다가 미쳐 버린 여자,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돌아 버리는 여자, 그러다가 결국 미쳐 죽어 버리는 여자, 캐서린 힌쇼. 이 여자를 만난 것 역시 『제인 에어』를 읽었을 때 언저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나는 내가 이렇게 될 것만 같았다. 사실 그리 되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그러므로 내가 사랑했던 남자들이여, 조심하길. 유령이 되어서도 비오는 날이면 나는 조그만 손에서 피를 흘리면서 사랑했던 당신 집의 유리창을 열어 달라고 애원하면서, 들여 보내 달라고 울면서, 깨뜨릴 만큼 탕탕 두드릴 테니까.   


[관련 기사]

-김현진의 도서관 예찬
-김현진에게 독서의 즐거움을 준 최초의 책
-내가 이야기를 ‘쓰고’ 싶게 만든 어떤 남자
-박완서에게 이별을,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재회를 고하다
-[1] 폭풍의 언덕, 사랑의 고통과 황홀 그리고 잔인함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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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진 #빨간 머리 앤 #폭풍의 언덕
9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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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봄봄

2014.07.20

나랑 닮은 캐릭터는 없군요. 모두 너무 잘난 캐릭터들, 하하.
그냥 동네 아줌마 5~15 사이의 한명. 나름 열심히 살려고 하지만 티가 안나는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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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orfati2

2014.03.31

폭풍의 언덕의 캐서린같은 캐릭터에 매력을 느끼시는군요. 작품 속 캐릭터로는 매력적이겠다라고 생각은 해보지만 글쎄요.. 앤도 좋아했고 조도 좋아했지만 그 소녀들의 사랑스러움 못지않게 저역시 음울한 상상력이 담긴 작품들도 좋아하거든요. 하지만 확실히 캐서린같은 캐릭터는 제가 강한 애착이나 떨쳐낼 수 없는 매력을 느끼는 캐릭터들과는 대척점에 있는 캐릭터라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매력은 있다고 느끼지만 제 경우엔 어디까지나 작품으로서의 매력이지 그걸 현실 세계로 연장해서 내가 되고 싶거나 주변인으로 겪고 싶은 경험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위험하고 격정적인 로맨스나 성격이 극단적인 인물을 현실로 끌고 오고 싶지 않은 이유가 진짜 현실에서의 그런 일들은 대개는 그렇게 아름답지도 매력적이지도 않거든요. 작품 속에선 미쳐버린 집착, 광기같은게 굉장히 매혹적이고 황홀해보이고 저역시 작품을 통해서는 그걸 즐기거나 보통은 관조하는 편이지만 현실로 그걸 끄집어내는 순간 현실에서 접하는 그 집착이란 건 굉장히 구질구질하거나 끔찍하고 때론 공포스럽거나 해서 누군가에게는 피폐해지고 우울한 삶일지도 모를 거란 생각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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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orfati2

2014.03.31

어릴 적 제 주변에도 앤을 두고 과대망상증 환자라고 비아냥거린 사람이 있었어요. 앤을 좋아했던 사람들 주변엔 그런 사람이 한 명쯤은 있는걸까 싶어서 괜히 웃음이 나네요. 저역시 앤을 무척 좋아했는데, 앤의 상상력에 필적할 만큼의 상상력을 지니고 있지 않기에 동일시에서 오는 감정으로 좋아했다기 보다는 앤과 다이아나의 우정이 참 매력적으로 느껴졌고요, 그 캐릭터의 수다스러움이나 극적인 감정 변화, 학구열같은게 굉장히 흥미롭고 매력적이었죠. 여러 차례 방영된 이 일본 애니메이션의 영향도 무시 못했고요. 많은 다른 앤의 팬들이 그러하듯 저역시 과대망상증 환자라는 비아냥에도 앤과의 거리가 더 멀어지진 않았던 거 같습니다. 앤은 앤일 뿐이고 앤을 좋아하지 않던 그 친구는 앤을 좋아하지 않는 한 사람일 뿐이니까요. 생각해보면, 앤도 그렇고 작은 아씨들의 조도 그렇고 동일시에서 오는 감정보다는 그 소녀들의 문학적 감수성 때문에 더 좋아했던거 같습니다. 자기만의 세계가 확실한 소녀들이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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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진(칼럼니스트)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오래된 캐치프레이즈를 증명이라도 하듯 '88만 원 세대'이자 비주류인 자신의 계급과 사회구조적 모순과의 관계를 '특유의 삐딱한 건강함'으로 맛깔스럽게 풀어냈다 평가받으며 이십 대에서 칠십 대까지 폭넓은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에세이스트. 『네 멋대로 해라』, 『뜨겁게 안녕』, 『누구의 연인도 되지 마라』, 『그래도 언니는 간다』, 『불량 소녀 백서』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