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7일 금요일, 홍대의 한 카페에서 ‘밝히는 여자가 되자’는 주제로 수다를 떠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대니얼 버그너가 쓴 『욕망하는 여자』 출간 기념으로 열린 이 자리에는 책을 번역한 김학영 번역가, 김주대 시인, 김현진 칼럼니스트, <미디어스> 김 완 기자가 참석했다. 김 완 기자의 사회로 진행한 이 날 행사에는 50여 명의 독자가 함께했다. 이들은 출연진과 함께 ‘여성의 성’에 관해 다양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왼쪽부터)김 완, 김현진, 김주대, 김학영
남자는 능동적, 여성은 수동적?
『욕망하는 여자』는 과학저술가인 대니얼 버그너가 성과학자, 심리학자, 행동과학자 그리고 다양한 여성과 만나 심층적인 인터뷰를 거친 뒤 쓴 책이다. 한국판 제목 『욕망하는 여자』(원제 : What do women want)는 이 책의 주제의식을 잘 드러낸다. 여성도 남자와 마찬가지로 성욕이 있다는 게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다.
남자의 성욕은 자연스럽고 이성으로는 통제하기 어렵지만, 여성의 성욕은 남자의 그것보다 덜하기에 충분히 절제 가능하다는 인식이 한국에 있다. 그래서 남자들은 자신의 성욕을 드러내는 데 주저하지 않지만, 여성은 자신의 성욕을 드러내놓고 표현하지 않는다. 이런 인식은 한국이 아니라 미국에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피셔는 200명의 남녀 대학생에게 자위행위와 포르노에 대한 설문지를 나누어주었다. (중략) A그룹은 강의실 문을 열어 놓은 채 설문지를 작성하게 하고 작성이 끝나면 문 앞에서 기다리는 동료 학생에게 제출하도록 지시했다. A그룹에는 설문지를 수거하는 동료 학생이 응답자들의 설문 내용을 볼 수 있다고 미리 알려주었다. 또 B그룹에는 설문지 내용을 익명으로 처리한다고 분명히 알려주고 작성하게 했다. 나머지 C그룹에는 거짓말 탐지기를 부착하고 설문지를 작성하게 했다. 물론 이 장치는 가짜였고 응답자들의 손과 아래팔 그리고 목에 가짜 전극 테이프를 붙여주었다.
세 그룹의 남자 응답자들은 그룹 분류와 상관없이 그 응답 비율이 비슷한 반면, 여자 응답자들은 그룹에 따라 응답 비율이 판이했다. (중략) A그룹의 여학생들 중 상당수가 자위행위를 한 적이 없으며 포르노 영화도 대여해 본 적이 없다고 답했다. (중략) B그룹에서는 두 가지 질문에 대해 ‘그렇다’라고 대답한 학생이 훨씬 많았다. (중략) C그룹의 여학생들은 같은 그룹의 남학생들과 거의 동일한 비율로 ‘그렇다’라고 응답했다. (31쪽)
이 실험에서 2가지를 유추할 수 있다. 첫째, 익명성이 보장되든 안 되든 성욕과 성생활에 관해 남자가 여성보다 더 솔직하게 표현한다. 둘째, C그룹에서 보듯 여성도 남자처럼 성욕을 느낀다. 그럼에도 여성이 여성의 성욕에 관해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없는 이유는 뭘까? 성욕을 긍정하면 ‘밝히는 여자’라는 사회적 낙인이 붙고, 그 여성을 향해서 비난과 분노가 쏟아지기 때문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주체적인 성은 오로지 남자다. 여성의 성은 수동적이어야 한다. 여성이 먼저 요구해서 안 된다. 심지어 질투해서도 안 된다. 수동적인 성으로써 여성을 바라보는 인식은 수천 년 동안 정치와 종교, 교육 등으로 굳어져 왔다. 페미니즘이 성 해방을 주장하며 자신의 욕구를 긍정하려 한 이유가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럼에도 여전히 진화심리학이나 성 담론은 여성의 수동성을 강조하려 한다. 예컨대, 수컷은 최대한 많은 씨를 뿌리기 위해 다양한 파트너와 교류하려는 성향이 강하고 암컷은 아이를 안정적으로 크게 할 수 있는 강력한 파트너 한 명을 찾으려는 경향이 있다는 설명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남자의 외도를 정당화하고 여성을 수동적인 존재로 그린다. 남자가 성욕을 느끼는 빈도가 여성보다 잦고 강하다는 주장도 마찬가지다. 『욕망하는 여자』는 현대에도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진화심리학을 이렇게 평가한다.
진화심리학이 우연히 보수적인 입장을 갖게 된 것인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그 정신만큼은 성에 관한 한 현재 상태를 유지하려는 강경한 보존주의일 것이다. 우화는 우리에게 여성은 선천적으로 절제심이 더 강한 성이라고 가르친다. 이것은 날 때부터 정해진 표준이며 그래야 정상적이라고 가르친다. 정상적이라는 것은 언제나 자기 확증적이고 자기 영속적인 힘을 행사한다. 정상에 반항하려는 사람도 이탈하려는 사람도 거의 없기 때문이다. (64쪽)
예전에는 주로 종교와 윤리가 여성의 욕망을 부정하려 했다면, 현대에는 과학의 목소리로도 그 작업이 이루어진다. 그래서 자신의 욕망을 용감하게 ‘밝히는’ 여성은 쉽게 찾아볼 수 없다. 심지어 ‘밝히는 여자가 되자’는 주제로 열린 이번 행사에서도 여성의 성욕에 관한 거침없는 표현 대신 ‘플라토닉 러브’와 같은 단어가 자주 등장하곤 했다. 그만큼 사회가 여성의 성욕에 관해 얼마나 금기시했는지를 증명하는 대목이었다. 김학영 번역가는 여성이 욕망이 있다는 것조차 모를 수도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욕망하는 여자』는 성욕 한 가지만 조망하겠다는 전제로 쓴 책이다. 저자는 과학적인 실험으로 우리 관습이 얼마나 무거웠는지를 보여준다. (여성은 자신의 욕망을) 의식하지조차 못하고 억누르고 있다. 정신과 몸이 다르게 반응하고 있다는 자각조차 못하게 됐다는 걸 지적한 책이다.”
김 완 기자는 책이 던지는 주제 의식에 동감하면서도 과학으로 관습을 혁파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굉장히 어려운 작업일 텐데, 그럼에도 이 책이 가지는 의미가 궁금하다는 질문이었다. 이 질문에 김학영 평론가는 “첫 포문을 열었다”라고 답했다. 김현진은 “진화심리학이나, 성과학에서는 (남자 쪽으로는) 말이 안 되는 이야기가 없다. 다만, 여성이 끌어들일 만한 성과학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면서 이 책의 출간 의의를 조명했다.
이날 수다에 오른 화제는 다양했다. 페티쉬, 외도, 강간, 플라토닉 러브 등등. 개인적인 이야기인 만큼, 같은 사안임에도 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다른 게 다수였다. 그럼에도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이었다.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모이는 이날 자리야말로 공론장이라고 할 만했다. 다른 이야기만 나온 게 아니었다. 4명의 패널이 공감한 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이 책이 ‘과학적’이라는 지적. 과학에도 서로 다른 담론이 진리를 위해 경합하는데, 이 책은 과학적인 방법으로 여성의 욕망을 긍정하려 한다. 기존의 성과학이나 진화 심리학이 주장했던 이론을 반박하기 위해 다양한 실험 결과와 기존 실험의 문제점을 제시했다.
수다가 끝나가려는 시점에서 독자 한 명이 질문했다. 남자 독자, 여성 독자 이 중 어떤 독자를 염두에 뒀느냐는 물음. 이에 번역가 김학영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밝힌다는 건, 나 하고 싶어, 이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나 자신을 스스로 아는 게 밝히는 것의 의미다. 결혼한 사람과 출산을 위해서만 성관계를 가진다? 아니다. 우리는 (욕구를) 죄악시 했다. 젊은 사람은 현명하게 생각해야 한다. 부부는 플라토닉 러브 관계가 아니다. 플라토닉 러브도 있지만 그 이면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야 한다. 일부일처제를 깨지 않을 것이라면 잘 알고 결혼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남자와 여성이 모두 읽어야 한다. 세상에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없지 않나.”
그간 인류는 주로 남자의 욕망에 주목해 왔다. 이제는 여성의 욕망에 여성과 남자 모두가 관심을 가져야 할 때가 아닐까 싶다. 김학영의 말처럼 세상에는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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