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태어난 곳은 아주 시골이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을 한 반에 20명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학교가 한 반에 60명이 넘었으니, 제가 다닌 학교는 상당히 작은 학교였죠. 학년마다 1반씩 밖에 없었으니 전교생이 100명이 약간 넘었어요. 당시 겨울에는 조개탄 난로를 피웠는데, 조개탄을 아낀다고 선생님과 함께 산으로 나무를 하러 다닌 기억이 납니다(웃음). 워낙 시골이다 보니 별달리 놀만한 게 없었어요. 낮이면 친구들과 들판으로 쏘다니고 어두워져서야 집으로 돌아가곤 했습니다. 그때만해도 책 외판원이 많았는데 세계문학전집, 위인전집, 세계명작동화, 백과사전 같은 책을 가지고 다니곤 했어요. 다행히 부모님께서 책을 많이 사주셔서 밤이면 방에서 그 책들을 읽곤 했습니다. 『플루타르크 영웅전』 『그리스 로마 신화』 같은 책들을 잔뜩 읽었죠. 어디서 나왔는지는 잊어버렸는데, 백과사전도 참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소년중앙》 《어깨동무》 같은 어린이 잡지도 열심히 읽었습니다.”
“중학교에 가서는 애거사 크리스티, 셜록 홈즈, 아르센 뤼팡 같은 소설들을 많이 읽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애거사 크리스티 전집, 셜록홈즈 전집, 뤼팡 전집이 서재 한 켠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참, 한수산의 연애소설들도 기억이 나네요. 어린 나이에도 그런 연애를 해봤으면 좋겠다 뭐, 이런 생각을 해본 것도 같습니다. 고등학교 때에는 당시 대히트를 쳤던 『영웅문』 에 빠져 있었습니다. 영웅문의 주인공인 곽정과 양과, 장무기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성문영어 커버를 소설에 씌워서 수업시간에 몰래 보던 생각이 납니다.”
“고등학교 때에는 이과였는데 우여곡절 끝에 국문과에 진학하게 됐습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잘 모르겠지만 고3때 문득 시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담임선생님과 아버님께 야단을 엄청 맞고 겨우겨우 국문과에 입학했습니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하루 종일 책만 봤던 것 같아요. 수업에는 들어가지 않고 도서관에 살았죠.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 《현대문학》 등 문예지들과 시전문지들, 시집, 소설, 문학비평서 등을 닥치는 대로 읽었습니다. 문지 시인선, 창비 시인선, 청하 시인선, 문학동네 시인선, 세계사 시인선 등 하루 종일 시집을 베끼고 또 베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 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대학시절, 어느 날 남해의 허름한 여관에서 왕자웨이 감독의 <동사서독>을 보게 되었습니다. 장만옥, 그녀는 복숭아꽃잎이 난분분 날리는 어느 봄날의 한 가운데 앉아 있었죠. 턱을 괴고 앉아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사랑을 기다리고 있었던 거죠. 허술한 창문 틈으로 밀물 드는 소리가 아득하게 밀려왔습니다. ‘그와 혼인했을 줄 알았는데 왜 하지 않았소?’ ‘날 사랑한다고 말을 안 했어요.’ ‘굳이 할 필요가 없는 말도 있소.’ ‘전엔 사랑이란 말을 중시해서 말로 해야만 영원한 줄 알았죠.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하든 안 하든 차이가 없어요. 사랑 역시 변하니까요.’ ‘내가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없었죠.’ 저는 이 영화를 보고 이틀 동안 그 여관방에서 ‘밀물 여인숙’이라는 연작시 3편을 만들었고 얼마 뒤 그 시로 등단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잡지사를 거쳐 신문사에 들어갈 때가지 제 인생에 대부분은 책이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만 해도 여행과 사진이 제 인생에 이렇게 많은 부분을 차지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출판전문지에서 일할 때는 업무로서 책을 읽었죠. 신화, 철학, 역사, 문학, 과학, 종교 등 손에 잡히는 대로 읽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읽었던 책으로는 에드워드 윌슨의 『인간 본성에 대하여』 최재천 교수의 책들 그리고 제인 구달의 책들이 기억에 남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읽어오던 세계와는 전혀 다른 구체적이고 실재적인 세계를 보여주었으니까요. 뭐라고 할까요, 손에 잡히고 감각할 수 있는 세계라고 할까요. 그리고 다시 신문사로 자리를 옮겨 문학담당 기자로 일하다 여행탐장으로 발령을 받고 나서 여행 인생이 시작됐습니다. 여행 쪽 일을 시작하면서 여행가들과 사진가들, 생태학자들의 책에 관심을 가지게 됐죠.”
여행작가 최갑수가 지금까지 펴낸 모든 책들은 책으로부터 받은 영감으로 탄생됐다. 최갑수는 무수한 사진집과 소설, 가이드북을 볼 때마다, 떠나고 싶고 사진을 찍고 싶고 그곳에 관한 책을 쓰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을 느낀다. 『행복이 오지 않으면 만나러 가야지』 는 요제프 쿠델카의 사진집과 피에르 쌍소의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를 루앙프라방 식으로 쓴 것이다. 최근 『내가 나를 사랑하는 일 당신이 당신을 사랑하는 일』 의 개정판을 펴낸 최갑수는 지금까지 찍어왔던 사진과는 다른 색깔의 사진을 찍고 싶다고 한다. 여행을 하며 사진을 독학으로 배웠기 때문에 체계적으로 공부하지 못한 것이 늘 아쉬워, 요즘은 사진에 관한 다양한 이론서와 역사서를 탐독하고 있다.
최갑수의 서재는 ‘길 다방’이다. 작은 난로가 있고 그 위에 주전자가 놓여 있는, 테이블은 서너 개만 놓인 찻집을 꾸며보고 싶기 때문이다. 한 켠에는 표지가 닳은 책이 놓여있고, 여행자들이 편하게 책을 읽고 차를 마시다가 갈 수 있는, 작업실 겸 서재 겸 찻집을 갖고 싶다. 여행작가 최갑수는 2014년부터 ‘여행의 시즌2’를 시작하려고 한다. 그는 독자에게 말한다. “조금 더 깊어지고 조금 더 다정해진 여행과 글, 사진을 기대해달라.”
명사의 추천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크쥐시토프 키에슬롭스키 | 에이나인 미디어
내 인생의 영화로는 크지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을 꼽고 싶다. <사랑과 관한 짧은 필름>은 한 우체국 직원이 맞은편 아파트에 사는 독신녀를 망원경으로 훔쳐 보다 사랑을 느끼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테이프가 다 감기고 스태프의 이름이 올라 갈 때 진공상태를 경험하고 있었다, 는 것을 기억한다. 그 영화를 보고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이라는 제목의 시다. “아주 짧았던 순간 어떤 여자를 사랑하게 된 적이 있다/ 봄날이었다. 나는 창 밖을 지나는 한 여자를 보게 되었는데/ (…) // 그 짧았던 순간 동안 나는 그만 그 여자를 사랑하게 되어서/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그 여자를 사랑해 왔던 것처럼// 햇빛이 개나리 여린 꽃망울을 살짝 뒤집어/ 개나리의 노란 속살을 엿보려는 순간, 그 여자를 그만 사랑하게 되어서”
웰컴 투 사우스
루카 미니에로/클라우디오 비시오/알레산드로 시아니
최근 이탈리아 영화 <웰컴 투 사우스>를 보고 많이 웃었다. 작은 도시의 평범한 가장이 이탈리아 남부의 시골로 쫓겨나 겪는 에피소드를 그렸다. 몇 해 전 여행했던 시칠리아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책그림책
미셸 투르니에,헤르타 뮐러,아모스 오즈 등저/크빈트 부흐홀츠 그림/장희창 역 | 민음사
아주 아끼는 책이다. 46명의 세계적인 작가들의 글과, 화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인 크빈트 부흐홀츠의 그림들이 어우러져 있다. 아주 고요한 책이다. 나무 아래에 혼자 앉아 있는 것만 같다. 여행을 가지 않을 때 자주 펼쳐본다.
헬렌 니어링의 소박한 밥상
헬렌 니어링 저 | 디자인하우스
요즘 온 국민의 관심은 맛집과 먹는 것에 쏠려 있는 것만 같다. 나 역시 그러한 듯. 그러다 이 책을 지난해 다시 펼쳐 읽었다. 그리고 1년 간 채식을 결심했고 다음주면 딱 1년이 된다.
동양기행 1
후지와라 신야 저,사진/김욱 역 | 청어람미디어
이 책에서 후지와라 신야가 여행한 많은 장소들을 나도 다녀왔다. 하지만 똑같은 장소를 여행하고 쓴 그의 글과 나의 글, 똑같은 장소를 여행하고 찍은 그의 사진과 나의 사진은 너무나 달랐다. 나와 전혀 다른 시각, 나와는 전혀 다른 앵글을 가지고 있는 그의 책은 하나의 여행지였다. 그의 책을 읽으며 나는 지금까지 내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여행을 한다.
론리플래닛 디스커버 인도
여희주 등역 | 안그라픽스
여행작가이지만 여행에 관한 책을 많이 읽는 편이 아니다. 하지만 『론리 플래닛』은 예외다. 이 시리즈를 소설책처럼 읽곤 한다. 낯선 지명과 호텔, 비행기 버스 기차 시간표, 레스토랑 전화번호, 그 나라 사람들의 습관과 생활양식 등으로 가득한 이 책은 세상 어느 모험기보다 흥미진진하다. 말레이시아에서 베트남 편을 읽고서는 이듬해 베트남으로 여행을 떠났다. 베트남에서는 아일랜드 편을 읽고서는 아일랜드로 여행을 떠났다. 지금은 인도 편을 읽고 있다. 아마도 내년에는 인도 바라나시로 떠날지도 모를 일이다.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피에르 쌍소 저/김주경 역 | 동문선
몇 해 전 여름 라오스 루앙프라방의 어느 게스트하우스에서 이 책을 뒤적였다. 애초 루앙프라방에서 2박3일을 머문 후 태국 치앙마이로 떠날 예정이었지만 루앙프라방이 마음에 들어 모든 일정을 취소해버렸다. 그리고 일주일만 더, 하루만 더 하며 루앙프라방 떠나기를 미루던 나는 결국 50여 일을 머물고 말았다. 루앙프라방에서는 한없이 느린 시간을 보냈다. 낮잠을 자고 자전거를 타고 시내를 쏘다녔다. 종려나무 그늘에 앉아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를 읽으며 차가운 맥주를 마시곤 했다. 그리고 이런 문장에 밑줄을 치곤 했다. “느림은 민첩성이 결여된 정신이나 둔감한 기질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들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다 중요하며, 어떤 행동이든 단지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에서 급하게 해치워 버려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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