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만 아니라면 어딘가에, 할 일은 많다
‘3040 지식노동자들의 피로도시 탈출’이라는 부제를 단 『서울을 떠나는 사람들』이 서울에 짓눌린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 지난 8월 21일, 서울 마포구의 성미산마을극장에서 아홉 명의 저자 가운데, 세 명의 서울을 떠난 사람들이 독자들과 만났다.
글ㆍ사진 김이준수
2013.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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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독존의 수도. 서울을 일컫는 표현이다. 역사학자 전우용의 말이다. 그에 의하면 서울은 역사적으로도 유별났다. 생존과 확장을 위해 농촌을 수탈해야 했던 도시 중에서도 유별났으며, 다른 도시의 발전 가능성을 봉쇄한 채 경제적ㆍ사회적 자원을 독점하면서 커갔다. 그래서일까. 속담도 이에 맞춰졌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말은 태어나면 제주로 보내고 사람은 태어나면 서울로 보내라. 모든 것은 서울로 향했고, 집중됐다. 서울민국, 틀린 말이 아니었다.

서울은 식신이었다. 그만큼 경쟁해야했고, 미친 듯이 달려야했으며, 지옥 같은 삶을 꾸려야했다. “서울은 한번 빨아들인 것은 사람이든 물질이든 되뱉지 않았다. 급기야는 스스로 자신의 중력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되어 ‘빅뱅’을 기다리는 처지가 되어 있다.”(『서울은 깊다』 중에서) 시간을 새기지 않는 괴벽을 지닌 도시 서울은 숱한 사람과 물질을 빨아들이고 모든 것을 삼켰다. 그리고 그 자체로 폭력이 됐다. 일례로 ‘지방’이라는 말에서 그것을 읽을 수 있다.

대부분 국가에서 지방은 전국의 상대 개념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서울의 반대말은 지방이다. 서울도 지방의 하나임에도, 지방은 서울 아닌 모든 지역을 일컫는 말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다양한 개성을 지낸 별개의 대상을 한 덩어리로 묶는 것, 모멸적이고 폭력적이다. 서울이 뭐기에, 우리는 지방이라는 말로 각기 다른 지역을 통칭할까. 같은 맥락에서 ‘지잡대’는 그러한 폭력의 끝판왕이다. 서울(수도권)이 아닌 지역에, 이른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대학을 일컫는 ‘지방 잡 대학’의 줄임말로, 그것은 우리 사회 전체를 모욕하는 말이다. “한국은 학교든 기업이든 개인이든, 서울 안에 존재하는 것 자체를 특권화하는 경향이 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얻는 것은 심각한 집중화, 위계화, 획일화다.”(『망가뜨린 것 모른척한 것 바꿔야할 것』 중에서)

빅뱅 직전의 서울, 폭력적인 서울을 떠나는 사람들이 있다. 피로도시 서울이 강요하는 억압에서 탈피하여 ‘저녁이 있는 삶’을 꾸리는 사람들이다. 서울에서 경쟁에 패배하여 떠난 것이 아니라, 타인의 삶을 사느니 자기 생을 주체적으로 기획하는 삶을 선택한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 아홉 명의 이야기를 담은, ‘3040 지식노동자들의 피로도시 탈출’이라는 부제를 단 『서울을 떠나는 사람들』이 서울에 짓눌린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 서울이 아닌 지역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지역 비즈니스에 도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김은홍 더플라잉팬 대표가 ‘전주에서 재래시장 오너셰프로 사는 법’을, 이명훈 예술공간 돈키호테 대표가 ‘순천에서 문화콘텐츠 기획자로 사는 법’을, 오은주 다음커뮤니케이션 팀장이 ‘제주에서 IT콘텐츠 기획자로 사는 법’을 들려줬던 어느 여름밤.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서울의 시계추 앞에서 이제 누군가는 멈춤을 이야기해야 한다. 통제할 수 없이 거대해진 서울의 피로감을 씻어낼 수 없다면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 서울을 벗어나서도 얼마든지 우리의 일상은 가능하고, 그 삶은 오히려 더 풍요롭고 여유로울 수 있음을 나누어야 한다.”(p.11)


적당히 벌고 아주 잘 산다, 김은홍

그림에 관심이 많았고, 디자인을 전공했던 김은홍 대표였다. 요리에 재능이 있음을 알고, 전업을 했다. 그가 서울을 떠난 이유는 단순했다. 복잡한 게 싫었다. 고향 전주로 삶의 발걸음을 돌렸다. 적당히 벌고 아주 잘 살고 싶었다. 전주 남부시장 2층 청년몰에 자리를 잡았다. ‘더플라잉팬’이라는 음식점을 차렸다. 복잡한 것, 귀찮은 것을 싫어하는 성정 덕분에 요리도 단순하다고 말을 건넨다. 그가 서울을 떠나 자리 잡은 전주는 어떤 곳일까.

“전주는 슬로시티다. 혹자는 한량의 도시라고 한다. 사람들이 느리고, 즐길 것을 찾고 노는 것을 좋아한다. 음식 맛있고, 도심 한 가운데를 흐르는 전주천에는 쉬리와 수달이 산다. 인근에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이 많아 서울보다 레저나 취미생활을 즐길 수 있는 곳이 더 많다. 하지만 전주엔 먹고 살 게 없다. 대기업 취직은 힘들고, 중소기업 월급은 어마어마하게 짜다. 그래서 공무원이 굉장히 많다. 많은 사람이 자영업을 생각하고 그 가운데서도 음식점을 생각하는 분들이 많다. 곡창지대라 음식이 많이 발달했다.”

그러나 문제는 서울 사람들이다. 다른 지역도 그러하듯, 전주의 대표 명물은 한옥마을인데, 주요 건물은 서울에 사는 사람들의 소유다. 정작 전주에 사는 사람들은 세 들어 산다. 투자는 전주시에서 하나 돈은 서울에 사는 사람들이 번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버’는 격이다. 별 수 있나. 전주 젊은이들, 서울로 향할 수밖에. 김 대표도 그랬었다.

서울의 복잡함이 싫어서 돌아온 김 대표의 요리공간 더플라잉팬은 전주 남부시장에 둥지를 틀고 있다. 1960년대까지 한강이남 최대 물류집산지였고, 80년대 중반까지도 전북권 농산물이 거래되던 최대 시장이었다. 이후 쇠퇴의 길을 걷던 남부시장에 문화로 전통시장을 활성화하는 ‘문전성시’사업과 그에 따른 프로젝트 청년몰이 또 다른 활력을 몰고 왔다. 특히 2011년부터 청년장사꾼 아카데미가 시작됐다. 청년들이 장사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끔 만든 계기였다. 두 팀이 시범적으로 남부시장 2층 버려진 공간에서 개업을 했다. 청년몰의 시작이었다.

“창고 등을 개조해 그해 11월 카페 나비가 오픈했는데, 겨울이라 춥고, 주인이 여성이었는데, 당시 굉장히 무서웠다고 하더라(웃음). 추운 겨울을 버티고 2012년 열 두 가게가 모여 공간 워크숍도 하고, 공부도 했다. 버려진 것을 주워 재활용하고 직접 다 꾸몄다. 문화로놀이짱이 같이 했고, ‘열두간지 개업파티’를 열었다. 오픈과 함께 1, 3주 토요일마다 야시장을 여는 등 많은 이벤트를 했다. 청년문화강좌도 하고, 다양한 체험도 할 수 있게. 아이들에게 시장과 친해지게끔 만드는 이벤트(남부시장 미션투어, 인디푸드 교실)도 하고. 방송도 종종 탔다.”

청년몰이 문 연 뒤, 쇠락하던 남부시장이 살아나고 있다. 연령별 유입량을 보니, 10~30대의 유입이 크게 늘어났다. 재래시장을 찾는 청년들이 많아진 것이다. 청년몰에서 행하는 다양한 문화체험 프로그램 등이 그 구심점 역할을 했다. 서울을 떠난 김 대표, 어떤 것을 느낄까.

“나는 서울에서 U턴한 경우다. 문화귀촌이라고 말하고, 자신이 살고 싶은 곳에 정착하더라도, 그것 역시 삶이고 생활이다. 나도 제주에서 살고 싶다(웃음).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제주에 가도 생활에 찌들어 보고 싶은 것을 못보고 다닐 것 같다. 전주에 있으면서 놀러가고 싶을 때 제주에 가면 좋을 것 같다. 귀촌도 결국 생활이다. 조금만 여유를 가지고, 욕심을 조금 버리면 여유롭게 살 수 있다.”

청년몰에는 원래 전주에 살던 분이 많나? 서울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나?

지금은 총 스무 가게가 있는데, 전주나 전북에 살고 있던 사람이 많고, 서울에서 내려온 사람은 별로 없다. 연고 없이 서울에서 와서 해도 크게 두려워하실 건 없다. 서울에 다시 돌아가야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은 전혀 없다. 이곳이 고향이고, 아는 사람이 있어서 편하기도 하겠지만, 서울에 살 때 오히려 삶을 즐기지도 못했다. 청년몰알 찾는 분들도 전주 사람보다 타지역 사람이 더 많다. 청년몰을 검색해서 오시더라. 꼭 한 번 와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여러 가지 분야에 깊고 다양한 생각을 가진 많은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와 생각을 나누다 보니 협동조합 설립이나, 사회적 기업, 문화적인 소통 등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금 하고 있는 점포 외에도 단순히 먹는 가게만이 아닌 무언가 문화적으로 소외된 지역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일에도 참여하고 이끌어 나가고 싶다는 건강한 욕심이 생기게 된 것이다.”(p.132)


순천에서 돈키호테처럼 산다, 이명훈

순천에서 태어나 서울에 가서 홍익대 미대를 졸업하고 미술전문기자와 큐레이터 등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순천으로 돌아가 예술공간 돈키호테를 운영하는 이명훈 대표. 그는 왜 서울을 떠나 순천에 둥지를 틀었을까.

“서울에서 대학을 나오고 직장생활도 십 수 년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서울은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술 전공인데, 졸업하면서 경제적 활동에 대한 테스트가 필요하다고 보고 잡지기자를 택했는데, 1년 정도 하니 지치더라. 그만두고 공부하러 독일로 갔으나 원활하게 되진 않았다. 다시 서울에 돌아와 미술단체나 큐레이터, 프리랜서를 했는데, 40~50대를 상상하니 미래가 안 보였다. 서울에선 안 되겠다고 생각했지만 어떻게 하겠다고 생각한 바는 없었다.”

그때, 그가 경험했던 독일에서의 인상이 그를 부추겼다. 독일은 지역마다 색깔과 자부심이 있었다. 2000년 초 지역이 대안이며, 언젠가 자신이 갈 곳은 지역이라고 생각했다. 이왕 간다면, 고향이 의미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습득한 능력을 지역에 환원하고 같이 할 수 있다면 더 좋겠다. 서울은 더구나 경쟁구도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엄청 컸다. 경쟁을 좋아하지 않는 성정이었는데, 서울에선 경쟁을 부추기고, 의사와는 무관하게 신경이 쓰였다. 서울에 횡행하는 경쟁패러다임이 싫었고, 지역에는 경쟁패러다임이 약한 반면 다른 패러다임이 있었다.

그가 돌아가 둥지를 튼 순천은 어떤 곳일까. 순천은 인근 도시와 결부돼 소비도시로서 성장해왔다. 인근의 광양에는 포스코, 여수에도 공단이 있는데, 남해안벨트를 보면 포항부터 산업시설이 전개돼 오다가 광양, 여수에서 끝난다. 순천만부터 자연생태해안, 즉 개발이 덜 됐다.

“전라도는 전주와 나주에서 따온 말이다. 전주와 나주가 전라도를 대표했었던 도시인데, 세 번째가 전북은 남원이었는데, 지금 많이 쇠퇴했다. 나주 다음 순천에 문화적인 것이 많이 남아 있다. 순천은 교통의 중심지다보니 일제강점기에 철도가 놓였다. 경전선 열차로 여행하는 것도 재밌다. 가장 최근 작업인 아트맵은 순천의 문화예술 공간을 매핑했다. 순천 인구가 27만 명인데, 원도심에 문화예술공간이 집중돼 있다. 이것을 통해 순천을 방문한 사람들이 관광지 중심이 아닌 순천 안에서 돌아다니게 하기 위함이다. 순천도 도심 재생의 방법을 문화예술에서 찾고 있다. 문화예술가를 투입해 붐을 일으키려고 한다.”

서울 중심에서 벗어나 지역을 살리기 위해 필요한 건 무엇일까. 서울의 마을공동체 사업이 지역으로 확산되고 있는 측면이 있으나, 그가 보기엔 중소도시에 인위적으로 사업을 시도할 필요는 없다. 주변에 빈 공터, 농경지가 많다. 뭣보다 필요한 것은 지역 인재들이 모여야 한다. 문제는 서울로만 간다. 이 대표는 서울에서 좋은 문화적 경험을 하고 능력을 키워서 다시 지역에서 그 역량을 펼치는 방안을 제시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지역은 경쟁력을 키울 수 있다.

그는 사회적으로 더 많이 귀촌, 귀농, 귀향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럼으로써 문화기획 등을 하는 사람이 지역으로 올 수 있게 해야 한단다. 문화기획자들이 서울 아닌 다른 지역에서 잘 할 수 있는 것이 많다는 것. 그도 순천에 돌아가 3층 건물을 임대, 돈키호테라고 이름 짓고 문화공간을 가꿨다. 2층은 카페로 꾸몄다. ‘카페 산초’라고 이름 지었다. 돈키호테가 저돌적이고 이상적인 캐릭터라면 산초는 현실적이고 돈키호테를 잘 받드는 캐릭터라서 그렇게 지었다. 공간 디자인을 직접 했다. 업자에게 맡겼다면 1개월이면 끝났을 것을 6개월 이상 공들여 직접 꾸몄다. 그러다 계약 기간이 끝나고 협상이 잘 안 돼서 철수를 했지만, 그 경험은 지역에서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지역에서는 예술을 한다고 하면 호기심을 갖는다. 예술공간 돈키호테가 뭐하는 곳인지 계속 물어온다. 잘난척한다, 너무 어렵다는 말도 들었지만, 우리는 하향평준화를 거부했다. 지역에 완벽하게 스며든 공간은 아니나 동시대적으로 전국에 돈키호테의 활동을 알리기 위해 고민한 끝에 우리 소식을 저널로 만들어 발송하고 있다. 대중 공간이 아닌 전문적인 공간으로 비춰지길 원해서 텍스트 중심으로 채우고 있다. 받는 사람들이 읽든지 말든지 간에 말이다(웃음).”

그가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어떻게 먹고사느냐”이다. 이 대표에 의하면, 문화예술과 관련한 펀딩을 해주는 지자체 등의 예산이 있다. 그도 순천시에서 맡긴 문화예술 관련 책자 등을 제작하고 번 돈으로 프로그램을 돌리기도 한다. 지역에선 기획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 이것이 지역에 둥지를 틀 때 이점이 될 수 있다. 그도 골라서 할 정도다. 대신 한 번 할 때는 제대로 해준단다. 그는 적게 벌고 적게 쓰자는 개념으로 일하고 있다.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한 규모를 유지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지만 지혜와 묘책을 동원해서 꾸리고 있다.

“문화는 교류를 통해 섞여야 한다. 다만 지역에선 텃세가 있다. 내 고향이지만 나를 경계하는 사람도 있다. 지역에서의 삶이 낭만적으로 비춰지는 것은 우려한다. 많은 사람이 자기 지역 역사를 잘 모른다. 지역사를 공부하면 창조적으로 뭔가를 만들 수 있는 소스를 발굴할 수 있다. 그러면서 자신이 있는 지역이 만만하게 볼 곳, 낙후된 촌동네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문화적으로 끄집어내고 알려주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측면에서 순천의 ‘기억 3부작’을 기획했다. 작년부터 시작한 5년 프로젝트인데, 과거부터 지금까지를 추적하고 조사?기록하는 작업이다.”

그는 고향 순천으로 돌아갔지만 애향심으로 머물고 있는 건 아니다. 사실 애증이 서린 곳이라고 실토한다. 그럼에도 서울에서의 삶과 지금 순천의 삶을 비교하면, 서울로 돌아가고 싶진 않단다. 다만 그도 연고가 없는 지역으로 옮기고픈 생각은 있다. 역시 서울이 아닌 어딘가.
“지역에서 스스로 권력이 되지 않고, 권력에 기생하지 않고, 외부로부터 간섭받지 않으며, 스스로 일구어가는 삶의 다양성. 이런 다양성이 빚어내는 것을 문화라 하고 ‘삶이 예술인 경지’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변화를 원한다. 나는 예술인이다. 나는 문화인이다.”(p.154)


제주의 IT기획자, 오은주

그는 IT회사 포털 다음에서 일한다. 입사 11년차로 제주에서 9년째 살고 있다. 다른 경우와 달리 연고 없이 회사 때문에 이전한 경우다. 회사의 부서 일부가 제주로 이전했고, 본인이 전적으로 의도했던 바는 아니지만 이에 따라 제주로 갔다. 업종과 업무의 특성상 제주로 이전했다고 해서 큰 무리는 없었다. 인터넷 업종이었기 때문이다. 업무 환경에선 큰 불편을 못 느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는 지금 부모도 모셔 와서 살고 있다. 다른 경우와 또 다른 것이 제주에서만 살지 않는다. 서울-제주를 자주 오가면서 산다. 요즘 제주 이민은 하나의 트렌드다. 제주 이민을 꿈꾸는 사람들을 위해 그가 팁을 던진다.

“제주에 정착하려고 한다면, 두 가지를 말하고 싶다. 본인의 업종에 맞는 기업이 지역에 있을 가능성이 있다. 지역의 기업에 들어가서 일하는 방법이 있다. 지역은 작은 메커니즘이 돌아가는 곳이다. 처음에 갈 때는 불편하고 없는 것도 많고 뭘 해먹고 살 수 있을까 생각했지만, 사람 사는데 비슷하더라. 요즘 제주로 이주하는 분들 많은데, 내가 권하고 싶은 것은 1년을 살다보면 뭐가 필요한지 보인다. 둘러보면 제주에 필요한 것이 있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지역에 발붙이고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

그는 제주의 특징 중 하나로, 유명한 곳이 하나씩임을 든다. 하나의 예를 드는 것이 서울에서 제주로 내려간 치과 의사다. 큰 병원이 하나밖에 없는데, 홍대 부근에서 치과를 하던 의사가 한량처럼 지내고자 제주로 옮겼단다. 그러나 제주로 온 의도와는 달리 놀러갈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쁘게 돈을 벌고 있다는 것. 최근에는 할리 데이비슨을 끌고 다닌다는 소식도 전한다.

“다른 지역과 달라서 제주는 관광수지도 높고 정착한 사람 수도 많아서 제주에서 유일한 아이템을 하면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 대신 진솔하게 해야 한다.”
“인생이란 확실히 알 수 없고, 또 삶을 항상 여행처럼 살아가는 나는 어느 곳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가능하다면 이곳에서 오래 살아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될 만큼 제주를 제2의 고향으로 느끼고 있다.”(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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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을 떠나는 사람들 김승완 외 공저 | 남해의봄날
3040 지식노동자들의 서울 탈출. 제주의 IT 기획자와 바리스타, 충북 괴산의 지역 뮤지션, 강원도 화천의 연극 연출가, 강원도 속초의 번역가, 전북 전주의 오너쉐프, 전남 순천의 큐레이터, 경남 통영의 기획, 편집인까지 9명의 젊은 지식노동자들의 서울 탈출과 지역 비즈니스 도전기를 생생하게 담았다. 느리게 흘러가는 지역의 시계추를 따라 좌충우돌하면서 낯선 문화와 일상에 스며들고, 비로소 일과 삶의 자유를 만나기 시작한 사람들. 진정한 자기 계발은 바로 자기 탐구, 즉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데서 시작한다는 것을, 그들은 달라진 삶을 통해 증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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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을 떠나는 사람들 #김은홍 #이명훈 #오은주
6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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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kdldodh

2013.09.01

'그래도 서울'이란 인식이 아직 저에겐 남아있는걸보니, 아직은 버틸만한가봅니다 저는ㅎ 서울토박이라 그런지 뭔가ㅇ애증의 관계라고나 할까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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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sslqkqn

2013.08.31

예전에는 서울이 화려하고, 재밌는게 많아서 졸업만하면, 취업만 하면 인서울인서울을 외쳤는데ᆢ지금은 비싸고, 피곤하고, 사람많아서 어지럽고ᆢ나이가 들었나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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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라새

2013.08.31

때로는 서울의 복잡함에 문득 놀랄때가 많아요. 사람도 길도 거리도 그저 북적북적. 서울은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지만 항상 바쁜 얼굴인건 변하지않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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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준수

커피로 세상을 사유하는,
당신 하나만을 위한 커피를 내리는 남자.

마을 공동체 꽃을 피우기 위한 이야기도 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