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했던 여성 심윤경, 그녀가 사랑 예찬론자가 되기까지
작가는 평범함이 지겹도록 싫었다. 서울 사대문 안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보내고, 얌전한 직장에 다녔다. 과학자를 꿈꾸었기에 연구소에 들어갔지만, 그곳에서 발견한 건 ‘이야기’였다. 그녀는 세상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기로 했다. 『사랑이 채우다』의 작가, 심윤경과 함께하는 낭독의 밤을 찾았다.
글ㆍ사진 송인희
2013.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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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8일 저녁, 젊음의 거리 홍대에 사랑 변주곡이 울려 퍼졌다. ‘살롱드팩토리’의 무대 위로 심윤경 작가가 자리했다. 낭독회 자리에는 『죽을 만큼 아프지 않아』를 쓴 소설가 황현진도 함께했다. 심윤경은 1972년 서울 출생으로 서울대 분자생물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쳤다. 대학 졸업 후 그다지 길지 않았던 직장생활을 마치고 1998년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2002년 세상에 처음 내놓는 장편 『나의 아름다운 정원』은 인왕산 아래 산동네에서 자랐던 어린 시절의 경험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자전적 소설이기도 하다. 제7회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래, 2004년 장편소설 『달의 제단』을 발표해 2005년 제6회 무영문학상을 수상했다. 그 밖의 작품으로 『이현의 연애』, 『서라벌 사람들』, 『끝까지 이럴래?』 등이 있다. 최근에는 『사랑이 달리다』의 후속작인 『사랑이 채우다를 썼다. 



소설을 끝내고 나니 비극이 찾아왔다


황현진: 요즘 어떻게 지냈나.


심윤경: 사랑이 달리다와 사랑이 채우다, 두 권 모두 한여름에 초고를 완성했다. 2,400매 정도 됐는데, 끝내고 나니 약간 이상해진 것 같다. 원래 초고를 완성하면 뛸 듯이 기쁜데, 이번엔 그렇지 않았다. 몹시 큰 상실이고 비극이었다. 내가 이 사람들(등장인물)을 만나지 않고 더 살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만큼 나에겐 이루 말할 수 없이 소중한 소설이다.


황현진: 이전 소설에 비해 밝고 명랑해서 기분이 좋지 않은가?


심윤경: 주인공 ‘혜나’가 내 갈증을 풀어주었다. 나는 모범답안 같은 인생을 살고 있는데, 내 안에 밖으로 꺼내고 싶은 철부지 기질이 분명 있었다. 그간 숨기고 살아온 그 기질이 혜나를 통해 폭발했다. 그녀가 나의 일부여서 그런지 처음부터 어색하지 않았다. 혜나가 예상치 못한 선택을 해도 그녀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을 쓰면서 인물이 이렇게 말을 듣지 않은 건 처음이었다. 혜나와 나의 싸움이 시간이 지나고 나니 무의미해졌다. 나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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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윤경 작가가 사랑이 채우다에서 가장 아끼는 부분을 낭독했다.


차가 멈춘 곳은 꽤 높은 언덕에 위치한 오래된 성곽이 있는 공원이었다. 아직도 대낮처럼 밝았지만 알고 보면 길고긴 여름해도 어느덧 설핏 기울어지려는 참이었다. 그가 차에서 내려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렇게 더운데 손을 잡고 가자니, 미친 남자였다. 나는 살쾡이 같이 캭 소리를 지르면서 주먹을 꼭 쥐고 발을 굴렀다. 그는 손을 거두고 말없이 앞서 걸었다. 나는 하염없이 울면서 그의 뒤를 따랐다. (중략)

삶에는 ‘사랑한다’와 ‘사랑하지 않는다’ 사이에 아무런 경계가 없어지는 그런 지점이 있었다. 그에게 그곳이 나무가 쓰러진 고속도로였다면, 나에게는 산꼭대기에 붉은 빛이 번져가는 이 산성이었다. 그날 그가 전혜원에게 죽도록 사랑한다고 말했어도 인생은 하나도 이상하지 않게 흘러갔을 것이다. 내가 오늘 성민에게 죽도록 사랑한다고 말했어도, 인생은 또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흘러갔을 것이다. 시간과 방향의 감각이 없어지는 그런 공간에서는, 인간이 무엇에 부딪쳐 어디로 가든 아무 차이가 없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고속도로를, 또 산성을 지나쳤다. 한번 지나치고 나면, 또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살게 된다.(중략)

어차피 산성에서는 사랑인지 아닌지, 그런 것은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나는 성민에게 기린을 주고 싶었다. 그것밖에는 아무것도 줄 것이 없었다. (p.148~154)


작가가 소설을 쓰면서 스스로 만족스러웠던 순간이 잘 투영된 부분이다. 삶이 흑과 백으로 정확히 갈리지 않는 부분, 미움이나 사랑이나 아무런 차이가 없어지는 지점. 그런 순간이 우리 삶에 참 많은데, 쓰기 어려운 장면이었다고 전했다. 그렇기에 작가가 가장 사랑하는 부분을 소리 내어 독자와 함께 나누었다. 객석에 앉아있던 독자도 마음에 드는 구절을 소리 내어 화답했다.


이곳은 이상한 공간이었다. 기쁨도 슬픔도 괴상한 중력장에 휘어져 알아볼 수 없는 형태가 되었다. 테이블에 엎드린 그녀의 야윈 등이 고양이처럼 둥글었다. 하나 둘 셋 하고 셀 수 있을 마늠 등뼈가 도드라졌다. 오스스, 강바람에 다시 어깨가 시려왔다. 나는 어깨를 쓸어내리며 강 너머 숲을 바라보았다. 숲에 사는 야윈 새들이 강 쪽으로 날아갔다.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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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윤경 작가는 평범한 중산층을 이야기하는 소설가


황현진: 등단 10년이 넘은 지금, ‘난 왜 소설가가 되었을까?’라는 질문에 답을 구했나?


심윤경: 세 번째 소설까지도 작가의 말에서 그런 질문을 던졌다. 난 큰 어려움 없는 인생을 살았다. 부자는 아니어도 학비 걱정 없었고, 성실한 남편과 결혼했다. 큰 방황이나 가정의 풍파도 없었다. ‘우리 집안은 어쩌면 이리 평범할 수가’, ‘소설가인 나는 과연 무엇으로 먹고살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휩싸여있었다. 궁핍의 두려움이었다. 그러던 중 사랑이 달리다와 『사랑이 채우다가 답이 되었다. 나는 평범한 중산층의 이야기를 하면 되는 거였다. 그게 세월이 지났을 때 내가 이 시대에 대답하는 방식이 되는 거라고 깨달았다.


황현진: 분자생물학 전공인데, 과감히 소설가가 되기로 한 이유는?


심윤경: 생물학을 굉장히 좋아했다. 과학자가 되는 것만이 꿈이었다. 연구원 생활도 3년 했고, 결과도 나쁘지 않았다. 그만둔다고 했을 때 주위에서 안타까운 시선이 많았다. 그런데 나는 3년간 연구소에 있으면서 ‘사람들’만 보였다. 연구를 위한 욕심이나 욕망은 전혀 생기지 않았다. 대신 사람들의 관계, 성격, 이야기에만 자꾸 눈길이 갔다. 한번은 열 명의 저자가 쓴 논문을 읽고 있는데, 내용이 아니라 저자들 간의 관계만 눈에 들어오더라. 결국은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글 쓰는 일을 안 하면 너무 후회할 것 같았다.


황현진: 문장력이 대단하다. 어린 시절부터 다독했는가?


심윤경: 사실 문장이 아름답다는 게 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글쓰기를 배운 적이 없어서 내 문장엔 안정감이 있다. 20대까지도 문학청년이었던 날이 하루도 없었다. ‘편안함’을 좋은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흐름’도 중요하다.


사랑이 달리고, 사랑이 채우다.


황현진: 『사랑이 달리다』의 첫 장면은 어떻게 탄생했나?


심윤경: 친정이 일산이라 자유로를 달려가야 한다. 가끔 엄청난 운전자들에게 매혹되기도 한다. 물론 철없기도 하다. 한번은 빨간 스포츠카가 알파벳 ‘S’자를 그리며 가는데, ‘저 인물 재미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어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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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진: 정욱연이 부른 ‘의사 선생님’에 대해 소개한다면?


심윤경: 어느 주유소에서 들은 ‘뽕짝’유의 노래다. ‘의사 선생님, 내 마음을 고쳐주세요. 약도 없나요.’라고 하는데 참 재미있었다. 차 몰고 나오면서 욱연같이 예리한 남자라면, 이런 순간을 놓치지 않았을 것 같았다.


황현진: 제목에 ‘사랑’을 많이 끌어올리는 이유는?


심윤경: 『서라벌 사람들』과 『달의 제단』을 읽고 어려웠다는 반응이 꽤 있었다. 소설은 편안한 친구 같아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충격이었다. 나이가 60이 돼도 우리는 사랑을 갈망하고, 또 언제나 사랑을 하고 있다. ‘나는 내가 사는 집단의 목격자다.’라는 정신에 따라 계속해서 사랑을 쓰고 싶다. 그야말로 진솔하고 재미있는 이야기일 것이다.


황현진: 제목이 비문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제목을 지은 의도는 무엇인가?


심윤경: 사랑이 달린다는 건 무책임을 뜻한다. 과정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생각하지 않고, 일단 달리고 보는 것이다. 산사태나 쓰나미 같이 무너져 내리는 속도감도 느껴진다. 두 번째 ‘채우다’라는 단어를 선택한 건 이미지에서 시작됐다. ‘널리 퍼져 나가는’ 느낌이 드는 세 글자로 된 단어를 찾아 고민했다. 채운다는 건 사랑의 두 번째 속성이다. 일어나버린 일에 대해 미안해하고, 치유하고, 성숙하며, 느리다. 사랑’을’이 아니라 사랑’이’ 채우는 게 내 의도에 맞다. 어떤 일도 의지대로만 되는 건 거의 없다. 중요한 일은 내 밖에서 이루어진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사랑’이 주어가 맞다.


황현진: 어떠한 비극을 감내하더라도 연애와 사랑을 권하는지?


심윤경: 그렇다. 꼭 연애나 결혼만이 아닌, 여러 형태의 사랑을 취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어떤 걸 가장 잘 알고, 갈망하며, 필요로 하는지 아는 게 우선이다. 더불어 타인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끊임없이 관찰하고 배려하는 게 사랑이 아닐까. 사랑이 사람을 성장하게 한다.


황현진: 다음 작품 계획은?


심윤경: 11년째 소설을 쓰면서 그 외의 것은 생각해본 적 없다. 살면서 아주 아름답고 좋은 장면과 순간들이 많다. 그중에는 소설로 잡아내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어떤 형태이든, 사람들이 ‘아, 맞아.’하고 맞장구 칠 수 있는 이야기를 쓰고 싶다. 꼭 소설이 아니더라도 에세이나, 희곡이 될 수도 있다.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글로 지어내고 싶다.


강산도 변하는 십 년이 넘는 세월이 심윤경의 내면에 ‘작가’라는 자의식을 불어넣어 줬다. 그녀는 움츠리고 있던 자신을 표면으로 끌어올린 건 독자들의 사랑이라고 말했다. 작가의 낭독에 박수가 이어졌다. 뜨거운 한여름에 어떤 사랑 이야기가 태어났다. 사랑이 달리고, 사랑이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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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채우다 심윤경 저 | 문학동네
여기, 흔한 사랑 이야기가 있다. 우리와 똑같이 평범하게 화내고 기뻐하고 거짓과 진심을 반복하며 치열하게 사랑하는 이들의 이야기가 있다. 모든 걸 집어던지고서라도 사랑에 빠지고 싶은 상대가 나타난다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심윤경의 신작 장편소설 『사랑이 채우다』는 이런 물음에서 시작되었다. 『나의 아름다운 정원』으로 한겨레문학상을, 『달의 제단』으로 무영문학상을 수상하며 많은 이들의 애정과 관심을 받아온 그는, 최근작 『사랑이 달리다에서 들려준 ‘혜나’와 ‘욱연’의 사랑 이야기를 고스란히 이어담아 일 년 만에 새로운 연작 장편소설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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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인희

홋카이도의 매력에 흠뻑 빠져 삿포로에서 살고 있다.
새로운 언어와 문화, 일상을 여행한다.
먹고 마시는 것과 사소한 순간을 좋아하며, 종종 글자를 읽고 쓴다.
song_soon2@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