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과학이란 무엇인가?
인지과학이란 인간의 마음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인간의 마음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심리학’을 꼽을 수 있는데 인지과학의 학문적 토대가 된다. 인지과학은 다양한 학문들과 융합을 시도한다. 심리학과 관련한 ‘인지심리학’, 언어학과 연관된 ‘인지언어학’이 그 예다. 이뿐만이 아니다. 인지과학은 많은 분야로 학문 주제를 넓이는데, 인간의 마음을 연구하는 목표가 최우선이다.
인간의 마음은 어떻게 존재하며, 과연 우리는 그 실체를 파악할 수 있을까? 만약 ‘마음’이라는 실체가 존재한다면,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인간과 로봇을 비교해 보자. 만약 인간과 똑같은 로봇을 만들었다고 가정한다면 로봇은 인간과 같은 존재라고 볼 수 있을까? 로봇은 인간과 달리 마음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같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인간과 로봇의 차이가 ‘마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과연 ‘마음’이란 무엇일까? 인지과학에서 마음은 곧 인간의 뇌라고 정의를 내린다. 따라서 인간의 뇌를 연구하면 마음을 알 수 있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인지과학은 수많은 질문에 해답을 제공하지만 복잡해 보이고 어렵게 느껴진다. 당연하다. 인지과학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이루어진 것은 불과 50년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제학도 학문으로 인정받기까지 100년의 시간이 걸린 점을 생각한다면, 인지과학이 학문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명백한 것은 인지과학은 인간의 마음을 연구하는 학문이고 인지과학의 등장은 과학혁명이라는 점이다.
인간은 컴퓨터와 다르다.
그 정점에 있는 ‘튜링테스트(Turing Test)’ 와 ‘중국어 방’ 논쟁.
디지털 혁명이 일어난 후, 디지털기계(예를 들면, 컴퓨터)가 없는 일상을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마치 기계와 인간이 한 몸처럼 움직이는 사회가 되었다. 과연 기계와 인간은 같은 존재일까? 인간과 동물을 ‘언어’라는 도구를 통해 차이점을 설명했다면 기계와 인간은 ‘언어의 이해’를 초점으로 설명을 할 수 있다. 알랑 튜닝(Alan Mathison Turing)의 튜링테스트(Turing Test)가 위와 같은 질문에 답을 제공한다. 튜링테스트는 많은 분야에 영향을 끼쳤지만 컴퓨터 과학 분야에 끼친 영향이 가장 크다. 그리고 훗날 인지과학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튜링테스트의 정보처리 과정은 다음과 같은 생각을 가능하게 했다. 만약 인간의 마음을 정보시스템이라 간주하고 정보처리시스템의 과정을 이해한다면, 인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정보처리의 이해를 바탕으로 인간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맥락이다. 따라서 구조화된 인간의 언어를 정보 처리하는 과정과 그 결과를 바탕으로 인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구조화된 언어를 컴퓨터가 처리한다는 것이 과연 언어를 ‘이해’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그리고 만약 이해를 했다면 기계는 마음이 있는 것일까? 이 논란의 중심에 ‘중국어 방’ 문제가 있다.
알란 튜닝(Alan Mathison Turing). 그는 진정한 천재였다.
‘중국어 방’ 논쟁은 존설(John Searle)이 주장한 것으로, 중국어 방은 상징을 입력과 출력으로 사용하는 입출력 시스템을 구조화한 방이다. 중국어 방에 대해서 두 가지 가정을 해보자. 첫 번째는 중국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방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문서를 중국어로 출력을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중국어 방은 받아들이는 문서에 근거하여 어떤 문서를 내보내야 하는 것인지를 알려 주는 거대한 설명서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두 가지 가정에 따라서 중국어 방으로 어떤 문서가 입력이 되었다면, 설명서에 따라서 그에 상응하는 출력물이 나올 것이다. 하지만 중국어 방에 있는 사람은 방 안에 존재하는 매뉴얼에 따른 통사적 방법만을 출력한 것이다. 여기서 “중국어로 출력을 한 사용자가 과연 중국어를 이해한 것인가?” 라는 의문점이 생긴다. 당연히 중국어를 이해했다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매뉴얼에 따른 규칙에 의해서 언어를 출력했을 뿐 이해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중국어 방 논쟁으로 “컴퓨터의 입출력 = 이해”와 같은 공식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 결론은 “인간과 구별할 수 없다면 컴퓨터는 생각(사고, thinking)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튜링테스트를 전적으로 반박한다.
물론, 기술의 발달로 다양한 뇌 측정 장비가 등장하여 중국어 방과 같은 논쟁은 어느 정도 사라졌다. 직접적으로 인간의 뇌를 살펴볼 수 있으며 바로 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와 관련된 많은 실험들이 행해지고 있다. 인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언어’다. 언어학자들은 다양한 이론을 통해서 언어의 규칙과 언어의 보편성을 설명했다. 언어가 가진 보편성과 규칙을 컴퓨터로 적용시킨다면, 인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언어란 단순하지 않기 때문에 쉽게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여러 가지 변수가 존재한다. 예를 들어 “밤은 언제가 좋아?” 라는 문장을 보면, ‘밤’이 먹는 밤인지 저녁을 나타내는 밤인지 주변맥락이 없다면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을 ‘언어의 중의성’이라 하는데, 현재까지도 명쾌한 해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단순하게 통계적으로 근접한 의미를 찾아 해결할 뿐이다. 이처럼 언어는 인간의 뇌를 이해 할 수 있는 하나의 도구로서 사용된다. 언어에 대한 완벽한 이해가 되지 않고서 인간의 두뇌를 파악하고 마음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어불성설처럼 느껴진다.
학문 간의 융합에 문제는 없나?
2013. 6. 27 Hub 컨퍼런스 <창조의 공동체: 인문과 예술, 그리고 기술> 이란 주제로 진행되었다.
이 글에서는 인지과학을 논하면서 학문 간의 융합이 주는 문제점을 가장 말하고 싶었다. 현재 대한민국은 “희망의 인문학”, “인문학 살리기”, “인문학을 통한 창조”등 너무 많은 슬로건이 생겨나고 있다. 실제로 이와 같은 슬로건을 바탕으로 주최된 세미나 또는 학회를 참가하면, 인문학을 배경으로 한 다양한 접근방식들에 입이 떡하고 벌어지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인문학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이란 말처럼 이용되고 있는 것 같아서 안타까운 생각이 들기도 한다. 때로는 “인문학 자체로는 학문적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가?”, “다른 학문과의 융합만이 살길이라 외치는 환경이 인문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을 밖으로 내밀고 있지 않은가?”,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주자.” 라는 생각이 들고 곧 좌절감에 빠진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다.)
시대의 흐름에 맞혀서 기존의 학문들 간의 접목만을 추구한다면 진정으로 학문이 추구하는 목적이 모호해질 수 있다. 게다가 ‘학문이 추구하는 본질의 훼손’, ‘시간이 지남에 따라 폐기로 처분되는 학문’, 그리고 ‘전공하는 사람들의 학문적 미아’ 등을 생각 할 수 있다. 하지만 시대에 따른 학문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 그리고 이런 환경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다른 학문 간의 융합에 매달려야 하는 현실에 처해있다. 시간이 지나면 “바이오 생명 공학 언어”, “바이오 생명 철학” 와 같은 융합학문이 쏟아져 나올 것만 같다.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일까? 문제점은 무엇일까?
“1 1 = 2” 라는 수학공식처럼, 학문 간의 융합은 그에 걸맞은 시너지를 낳을 수 있다. 단순하게 2가 아닌 3이 될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10이 될 수 있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 단순하게 대학교의 학과 명칭을 바꾸고 정부 혹은 기업에서 제공하는 과제를 받아 연구하는 방식의 보여주기의 융합만 할 뿐이다. 대학은 상업적 목적에 연연하여 융합과련 학과를 만드는 것을 최선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전공 교수 몇 명이 컨퍼런스 혹은 세미나를 개최하고, 발표 몇 분하고, 관련된 사진을 찍는 성과위주의 행사들이 넘쳐나고 있다. 이건 융합이 아니다. 이와 같이 융합을 생각하고 접근한다면 대한민국의 학문은 뒤쳐질 것이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와 대학의 커리큘럼에 현혹되어 공부를 시작하는 대학교 신입생들이 가장 큰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만약 대외적으로 능력 있는 교수들이 전공과 무관한 새로운 학과를 개설하고 이에 현혹된 신입생들만 잔뜩 모집하여 학과를 운영한다면, 실망한 학생들은 반수 혹은 재수를 준비하게 될 것이다. 원통하고 분하다. 이건 융합이 아니다. 진정한 융합은 학문 간의 경계를 없애고 서로의 학문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공유하여 새로운 창조를 하는 것이다. 또한 세계의 학문적 트렌드에 유연하게 대처해야 한다. 그럴싸한 명목과 구실만을 내세우면 안 된다. 그리고 단순하게 접근해서는 안 된다. 적어도 대한민국의 현실에서는 말이다.
대한민국에서 인지과학과 학문 간의 융합이 나아가야 할 길
2013. 5. 25 인지과학 학술대회에 참석한 ‘The Furious Linguistics’ 학회 멤버들
현재 대한민국에서 인지과학에 대한 관심이 매우 뜨겁다. 5월 25일 서강대학교에서 ‘인지과학 학술대회’가 개최되었는데, 사전 참가자가 약 1,500명이 될 정도로 그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현재 인지과학은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서 뗄 수 없는 하나의 학문으로 자리 잡고 있다. 과거에는 사람이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왔지만 이제는 기술에 적응해야 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지과학은 하나의 중심이 되었고 기술과 인간간에 문제를 해결하고 개선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학문이다. 또한 학문 간의 융합에서도 선두주자로 역할을 하고 있다. 인지과학을 통해서 학문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 생겨났고 기술에 대한 개념도 바뀌어가고 있다. 하지만 한국은 아직도 낡은 틀에 박혀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지금 인지과학은 과도기다. 자칫 잘못하면 학문의 본질을 놓치고 새로운 비지니스 영역으로 이용될 수 있다. 하지만 인지과학을 통해서 인간의 본질을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상대방을 이해한다면 전 세계 인류가 한 걸음 나아가는 계기가 될 것이다.
시대의 흐름에 따른 변화를 피할 수는 없다. 학문도 마찬가지이다. 그 변화의 예로 학문 간의 융합을 생각 할 수 있다. 그리고 세상은 융합을 토대로 새로운 시대로 재편 될 것이다. 따라서 “한 길만 파자.”라는 말은 옛말이 되었다. 하지만 이에 따른 문제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어쩌면 융합은 순수학문과 응용학문의 충돌로 보인다. 그리고 만약 한 쪽에 치우쳐 집중하게 된다면 그에 따른 피해가 나타날 것이다. 따라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조화로운 균형이 중요하다. 순수학문은 인간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켜주고 응용학문은 인간의 삶의 질을 향상시켜주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스마트폰(Smart Phone)을 한 예로 생각해보자.
만약 내 손에 스마트폰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그 즉시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생긴 문제점을 고려해본다면 이런 불편함이 때로는 편안함을 줄 수 있다. 따라서 기술의 발전만을 무작정 찬양할 수만은 없다.
이처럼 학문 간의 융합은 쉬운 문제가 아니다. 풀리지 않은 수학문제와 같다. 하지만 관점을 달리하여 학문 간의 조화를 외치면 어떨까? 학문 간의 조화. 즉, 하모니(Harmony)를 슬로건으로 한다면 적어도 학문 간의 균형을 맞히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을까? 게다가 욕심으로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학문 간의 융합에는 반드시 철학적 사고가 필요하다. 이유는 학문의 본질에 대한 고민과 인간을 위한 학문으로 접근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에 대한 성찰이 가장 중요하다. 만약 철학적 사고를 배제하고 학문의 발전만을 추구한다면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꼴’이 될 수 있다.
인지과학이 이렇게 큰 관심을 받은 이유는 기술의 발전에 지친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하기 싶어서가 아닐까? 기술의 발전만 추구하는 세상에 대한 혁명처럼 말이다. 아이러니 하지만, 기술의 발전으로 세상은 스마트(?)해졌지만 인간은 스마트해지지 않은 것 같다. 기술에 의존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고 인간의 역할이 점점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지과학은 이런 문제점의 해결방안과 인간의 본질을 고민하게 하는 학문으로 접근해야 한다.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세상. 인지과학은 그 중심에 있다.
윤중희
함께 살아야죠. 다 같이 행복해야죠.
뽀로리
2013.07.31
sind1318
2013.07.31
공우민
2013.07.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