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변으로부터 날아라, 멸치 - 부산시 기장군 대변포구
사회를 굴러가게 하는 조용한 힘, 바로 소시민적인 삶의 태도가 멸치의 쓰임과 많이 닮아 있다. 멸치가 있어 국물이 진해지고, 김치 맛이 깊어지며, 도시락이 풍성해진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래서일까, 멸치가 좋다. 멸치를 좋아하는 사람이 좋다. 멸치처럼 사는 사람이 참 좋다.
2013.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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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치처럼 살아가는 사람이 나는 참 좋다
박형서 작가의 「자정의 픽션」(『핸드메이드 픽션』)은 동거를 하는 젊은 연인이 냉동실에서 사라진 멸치를 추적해 가는 소설이다. 일터에서 고된 하루를 보낸 이들이 당장에 할 수 있는 방법은 딱히 없어 보인다. 침대에 누워 멸치의 행방을 상상해보는 일이 고작이다. 옆집 아주머니가 훔쳐갔다, 꿈을 잡아먹는 짐승인 트리오핀이 잡아먹었다, 등 발칙한 가설을 세우지만 이 소설의 압권은 멸치 스스로 이 집을 탈출했다는 이야기다.
자연스럽게 화자는 ‘나’에서 멸치로 이동한다. 주인공은 이제 남해, 통영, 완도, 기장 등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멸치들이다. 이 멸치들은 변기를 이용해서 탈출을 하려는 기상천외한 계획을 세우는데, 당연히 이들 무리에도 갈등의 요소가 있다. 남해 죽방멸치 성범수와 투덜거리는 기장멸치 황기택이 그들이다. 결국 멸치들은 고난을 단합으로 이겨내며 이 집에서 탈출한다. 재기발랄한 상상력으로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이 소설의 매력을 차치하고서라도 내가 이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멸치를 캐스팅한 사실, 그 자체 때문이다.
우리집 식탁에서 멸치는 주인공을 차지한 적이 거의 없었다. 육수를 우려내다 건져졌고, 김치를 만들기 위한 젓갈로 쓰여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었으며, 도시락 반찬에서도 소시지에 밀려 구석을 차지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조금 거칠게 말해, 소설이라는 장르의 주인공들 역시 사회에서는 별 대단해 보이지 않는 이들이 대다수였다. 「자정의 픽션」에 등장하는 젊은 연인의 직업이 학원 강사와 마트 직원인 것도 작가의 섬세한 의도인 것이다. 사회를 굴러가게 하는 조용한 힘, 바로 소시민적인 삶의 태도가 멸치의 쓰임과 많이 닮아 있다. 멸치가 있어 국물이 진해지고, 김치 맛이 깊어지며, 도시락이 풍성해진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래서일까, 멸치가 좋다. 멸치를 좋아하는 사람이 좋다. 멸치처럼 사는 사람이 참 좋다.
멸치를 기다리며
멸치 얘기를 꺼낸 이상 멸치잡이의 기억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남해에서, 통영에서, 거제도에서, 기장에서, 나는 멸치잡이 배에 올랐다. 아무래도 멸치는 연안에서 떼를 지어 이동하기 때문에 조업시간이 길지 않은 편이다. 하지만 유독 기장의 대변항은 달랐다. 출항 전, 배위에서 담배를 꼬나물던 선원들이 나를 빤히 내려다 볼 때부터 그랬다. 의기양양하게 배에 오르는 나에게 청한 악수에서도 남다른 기운이 느껴졌다. 하지만 괜히 날씨 얘기나 지껄이고, 멸치에 대해 젠체했던 나는 이후 벌어질 일들에 대해선 무감각했고, 자만했다. 결국에는 출항한 지 두 시간 만에 머리를 바다로 처박고 구토를 하는 신세가 되었다.
갈매기 한 마리가 파도에 유유히 몸을 실으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몇 번이고 바다에 부리를 쪼더니 날개를 활짝 펼쳐선 날아올랐다. 처음으로 나는 갈매기가 부러웠다. 날 수 있는 모든 것이 부러웠다. 만선의 포부는 물거품이 되었고, 갑판 위에 너부러져 잠이 들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섬 하나가 보였다. 저긴 어디죠? 가까스로 힘을 짜내어 옆에 있던 선원에게 물었다. 나보다 한참이나 어려보이는 중국인 선원이었다. 그는 검게 수염이 난 그는 어눌한 듯 무심한 미소를 내보였다. 대마도? 그의 대답은 질문처럼 끝이 올라가 있었다. 잘못 들은 것일까. 그가 놀려먹으려고 한 말일까.
점점 가까워지는 섬과 멀어지는 육지를 번갈아 보며, 오지 않는 멸치를 기다렸다. 그로부터 8시간이나 파도와 맞서고, 바람을 정면으로 견뎌내야 했다. 쏟아지는 태양빛을 피할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바다가 요동쳤던 탓일까, 멸치들이 숨죽이며 잠수를 한 탓일까. 10시간의 항해는 살면서 내가 경험한 가장 힘든 노동이었다.
광활한 바다에서 매일같이 그물을 내리고 올리는 자들, 나는 그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보일까. 하얀 피부와 썬크림으로 덮은 얼굴, 틈만 나면 사진을 찍어대며, 쓸데없는 질문이나 툭툭 던지는 나를 어떻게 보았을까. 조리사는 라면을 끓여주며 국물이라도 한입만 먹어보라고, 그러면 속이 편해진다고 했지만 나는 끝내 그 정성을 거절하고 말았다. 결국 그 라면은 중국인 선원에게로 돌아갔다.
“우리에게는 육지보단 바다가 편하지. 육지에 가면 울렁거려.”
갑판장이 내게 해 주었던 말이다. 나는 바다를 온몸으로 느꼈다.
날아라, 멸치
조업을 마치고 육지를 밟자마자, 나는 그대로 엎어져 누웠다. 땅에 너부러져 있는 동안, 선원들이 모두 배에서 내려 분주하게 그물을 끌어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양손에 그물을 부여잡고 위에서 아래로 힘껏 털기 시작했다. 이는 작업을 마친 화가가 붓을 씻고 말리는 일이나, 사진가가 새 필름을 갈아 끼우는 일과 다름없었다. 아니, 그렇게 단순한 작업이 아니었다. 온몸을 바쳐서 해야만 하는, 어쩌면 멸치잡이의 가장 중요한 과정이 바로 이 멸치털이였다.
촘촘히 짜인 그물에 끼어 있는 멸치를 떼어 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선원들은 같은 동작, 같은 힘으로 큰 그물을 일렁이게 해야 했다. 마치 2002년 월드컵 때 대형 태극기가 관중석 모두의 힘에 의해 힘차게 출렁이듯 그렇게 힘을 모아야 했다. 온종일 바다와의 사투를 치러온 선원들에게 마지막 남은 힘을 모두 쏟아 붓는 이 작업은 일종의 의식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그들은 입을 함지박 만하게 벌렸고, 기합을 주며 노래를 불렀다. 내가 알 수 없는, 결코 닿을 수 없는 노래를, 언제부터 내려져왔는지, 어떻게 부르는지 도무지 짐작할 수도 없는 노래를 불렀다. 순수한 노동의 노래였고, 하루를 돌아보는 반성의 노래였고, 내일을 준비하는 희망의 노래였다. 나는 노래 앞에서 부끄러워졌고, 도저히 정면으로 그들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그들의 등을 찍고 말았다.
가끔씩은 대변항에 들러 내가 내부러져 있었던 그 곳에 서 있곤 한다. 짙은 밤하늘과 외따로이 떨어진 초승달, 그 아래에서 힘차게 멸치를 터는 사람들, 그들의 등을 찍고 있는 나. 그날, 배가 항구에 닿자마자 갑판장이 내게 해주었던 말을 곧바로 실감했던 게 기억난다. 평평한 땅을 밟고 섰는데도 몸이 물결치듯 일렁였다. 육지에서도 멀미가 도진 것이다.
하지만 지금 포구에서 서서 바다를 바라보면 갑판장의 말이 조금은 다르게 들린다. 쉴 틈 없이 시간에 쫓겨 살아가는 일에 익숙해진 나는, 육지에서도 여전히 어지럽지 않은가. 다만 익숙해져 느끼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바다 위에서 바라보면 빡빡한 도시의 삶이라는 것은 그토록 허무한 것이다.
언젠가는 용기를 내서 멸치를 터는 사람들의 입을 찍어내고 싶다. 오늘도 멸치털이는 쉬는 일이 없다. 그들이 들려준 노래가 그물 위로 힘차게 날아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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