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순간까지 ‘따뜻한 피’가 흐르는 사람들의 이야기 - 『저물어 가는 여름』
아카이 미히로는 유괴 사건 자체에 집중하지 않는다. 사건은 이미 벌어졌다. 지금 남은 것은, 그 사건과 간접적으로 얽힌 ‘남아 있는 자’들의 후일담이다. 그들이 지금의 삶을 제대로,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과거의 ‘진실’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그래서 그들은 사건의 이면을 파고 들어간다. 어떤 가혹한 진실이 기다릴지라도 어쩔 수 없다. 사건의 진실이 중요하다기보다, 사건에 얽힌 그 사람들의 얼굴이 더 궁금하니까. 그들 하나하나의 얼굴이.
2013.05.13
작게
크게
공유
아카이 미히로의 『저물어 가는 여름』을 보면서 가쿠타 미쓰요의 『삼면 기사, 피로 얼룩진』이 떠올랐다. ‘삼면기사’는 일면에 실리지 않는, 그러니까 기사가치가 크지 않다고 판단하여 신문 3면에 작은 단신으로 실리는 기사를 말한다. 살인, 강도, 사기, 폭행 등 우리 주변에서 간혹 볼 수 있는 자질구레한 사건들. 단신 기사에는 6하 원칙에 따라 가해자와 피해자, 사건의 전후 등이 간단하게 기술되어 있다. 삼면 기사를 본 독자들은 대개 이런 일이 있었네, 하며 지나치기 십상인 사건들.
가쿠타 미쓰요는 실제로 있었던 사건 기사를 보여주고, 그 이면을 파고든다. 아니 굳이 이면이라 할 것도 없다. 이면이라 한다면 알려진 사실의 뒤에 숨겨진 무엇을 말하는 경우가 많다. 가쿠타 미쓰요는 기사에서 보도하지 않은, 그 사건의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뿐이다. 사건을 저지른 사람이 자신이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처절하게 털어놓거나, 주변 사람의 시선을 통해서 사건을 세세하게 바라보는 것. 소소한 넋두리들을 보다 보면, 짧은 단신 안에 얼마나 절절한 마음들이 숨어 있는지 실감하게 된다. 평범하고 사소한 범죄일지라도, 그 안에 담겨있는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절실한 것인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세상사가 스치고 지나갔는지를 알게 된다.
『저물어 가는 여름』은 20년 전의 신생아 유괴사건에서 시작한다. 아니 소설의 시작은 그로부터 20년 뒤 도자이 신문사의 신입기자를 뽑는 과정에서 생긴 사건이다. 주로 선정적인 스캔들을 보도하는 주간지에서, 도자이 신문사의 합격자가 20년 전 영아유괴사건의 범인의 딸이라는 것을 폭로한다. 사건 당시 아버지는 사고로 죽었고, 친척집에서 자라난 히로코는 기사가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입사를 포기하려 한다. 하지만 신문사 사장인 스기노와 인사국장인 무토는 히로코를 설득하는 한편 과거의 사건을 재조사한다. 흑막이 있다는 생각보다는, 당시의 상황을 다시 한 번 재조명해보자는 생각이었다.
20년 전의 유괴사건은 특이한 점이 있었다. 신생아실에서 아이를 유괴한 범인은 아이의 부모가 아니라 병원을 협박했다. 아이가 병원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병원의 평판이 떨어진다는 사실을 노린 것이다. 그 말처럼 유괴사건 이후 병원은 점점 기울어지기 시작했고 주인도 바뀌었다. 범인과 그의 애인은 자동차 사고로 현장에서 사망했고, 지금까지도 아이의 생사는 밝혀지지 않았다. 범인은 명백하지만, 사건의 세부사항은 모호한 채로 남겨졌다.
과거의 사건을 재조사하는 일은 자료실에 근무하는 가지에게 맡겨진다. 민완 기자였지만 일반인이 사망하는 사고에 휘말리면서 퇴직 위기에 놓였다가 한직으로 밀려난 가지였다. 현직 기자에게 조사시키는 꺼려지는 일이었기에, 뛰어난 기자이지만 지금 일이 없는 가지를 선택한 것이다. 가지는 사라진 아이의 부모, 병원 관계자, 당시의 담당 형사 등을 차례로 찾아간다. 그리고 명백한 것 같았던 사건에 의외로 공백이 많다는 것을 발견한다. 목격자 진술도 모호했고, 범인의 행적도 의문이 많았다. 유괴사건에서 범인이 잡히는 경우가 많은 것은 돈을 받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안전하게 돈을 받기 위해서는 대단히 치밀하고 정확하게 모든 상황을 고려해서 계획해야 한다. 그런데 죽은 범인이 과연 그런 일을 실행할 수 있을만한 인물인지, 가지는 의심한다.
『저물어 가는 여름』은 2003년 에도가와 란포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마흔 여덟이라는 늦은 나이에 데뷔작을 쓰고 수상까지 한 아카이 미히로는 오랜 시간 방송국에서 일했다. 수많은 사건을 접하고, 사람을 만나야만 하는 직장. 아카이 미히로는 오랜 시간 사람들의 얼굴을 지켜보았던 것이 아닐까. 아카이 미히로는 『저물어 가는 여름』에서 유괴 사건 자체에 집중하지 않는다. 사건은 이미 벌어졌다. 지금 남은 것은, 그 사건과 간접적으로 얽힌 ‘남아 있는 자’들의 후일담이다. 그들이 지금의 삶을 제대로,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과거의 ‘진실’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그래서 그들은 사건의 이면을 파고 들어간다. 어떤 가혹한 진실이 기다릴지라도 어쩔 수 없다. 사건의 진실이 중요하다기보다, 사건에 얽힌 그 사람들의 얼굴이 더 궁금하니까. 그들 하나하나의 얼굴이.
스기노 사장은 과거의 사건을 재조사하는 한편, 히로코를 반드시 입사시키려 한다. 직접 찾아가 권유하기도 한다. 어쩌면 이유는 단순했다. ‘고작 여대생 하나’ 때문에 왜 그러냐는 주간지 편집장의 말 때문이다. 거대한 조직이 왜 여대생 하나의 문제 때문에 그리 화를 내고 신경을 쓰냐는 말. 그런 태도를 가진 기자라면 사건을 취재할 때에도, 결코 사람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지 않을 것이다. 그 사람들이 왜 그런 말과 행동을 했는지는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선정적인 이유와 결과에만 집착하고 폭로하는 것에 열광할 것이다. 그 과정을 통해서 무고한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파괴되고 얼마나 고통스러워하는지는 관심조차 없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사건의 선정성일 뿐이니까. ‘고작 여대생 하나’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그들은 모른다. 그 한 사람이, 자신에게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얼마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 존재인지 그들은 끝내 모를 것이다.
『저물어 가는 여름』은 감추어진 진실과 트릭을 밝혀내는 퍼즐 미스터리로서도 훌륭하다. 그리고 사건에 얽힌 사람들의 많은 이야기, 그들을 바라보는 작가의 온화한 시선은 미스터리를 더욱 풍부하게 만든다. 엄청나게 번뜩이는 무엇인가는 없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따뜻한 피’가 흐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성실하게 들려주는 미스터리다.
가쿠타 미쓰요는 실제로 있었던 사건 기사를 보여주고, 그 이면을 파고든다. 아니 굳이 이면이라 할 것도 없다. 이면이라 한다면 알려진 사실의 뒤에 숨겨진 무엇을 말하는 경우가 많다. 가쿠타 미쓰요는 기사에서 보도하지 않은, 그 사건의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뿐이다. 사건을 저지른 사람이 자신이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처절하게 털어놓거나, 주변 사람의 시선을 통해서 사건을 세세하게 바라보는 것. 소소한 넋두리들을 보다 보면, 짧은 단신 안에 얼마나 절절한 마음들이 숨어 있는지 실감하게 된다. 평범하고 사소한 범죄일지라도, 그 안에 담겨있는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절실한 것인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세상사가 스치고 지나갔는지를 알게 된다.
20년 전의 유괴사건은 특이한 점이 있었다. 신생아실에서 아이를 유괴한 범인은 아이의 부모가 아니라 병원을 협박했다. 아이가 병원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병원의 평판이 떨어진다는 사실을 노린 것이다. 그 말처럼 유괴사건 이후 병원은 점점 기울어지기 시작했고 주인도 바뀌었다. 범인과 그의 애인은 자동차 사고로 현장에서 사망했고, 지금까지도 아이의 생사는 밝혀지지 않았다. 범인은 명백하지만, 사건의 세부사항은 모호한 채로 남겨졌다.
과거의 사건을 재조사하는 일은 자료실에 근무하는 가지에게 맡겨진다. 민완 기자였지만 일반인이 사망하는 사고에 휘말리면서 퇴직 위기에 놓였다가 한직으로 밀려난 가지였다. 현직 기자에게 조사시키는 꺼려지는 일이었기에, 뛰어난 기자이지만 지금 일이 없는 가지를 선택한 것이다. 가지는 사라진 아이의 부모, 병원 관계자, 당시의 담당 형사 등을 차례로 찾아간다. 그리고 명백한 것 같았던 사건에 의외로 공백이 많다는 것을 발견한다. 목격자 진술도 모호했고, 범인의 행적도 의문이 많았다. 유괴사건에서 범인이 잡히는 경우가 많은 것은 돈을 받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안전하게 돈을 받기 위해서는 대단히 치밀하고 정확하게 모든 상황을 고려해서 계획해야 한다. 그런데 죽은 범인이 과연 그런 일을 실행할 수 있을만한 인물인지, 가지는 의심한다.
『저물어 가는 여름』은 2003년 에도가와 란포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마흔 여덟이라는 늦은 나이에 데뷔작을 쓰고 수상까지 한 아카이 미히로는 오랜 시간 방송국에서 일했다. 수많은 사건을 접하고, 사람을 만나야만 하는 직장. 아카이 미히로는 오랜 시간 사람들의 얼굴을 지켜보았던 것이 아닐까. 아카이 미히로는 『저물어 가는 여름』에서 유괴 사건 자체에 집중하지 않는다. 사건은 이미 벌어졌다. 지금 남은 것은, 그 사건과 간접적으로 얽힌 ‘남아 있는 자’들의 후일담이다. 그들이 지금의 삶을 제대로,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과거의 ‘진실’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그래서 그들은 사건의 이면을 파고 들어간다. 어떤 가혹한 진실이 기다릴지라도 어쩔 수 없다. 사건의 진실이 중요하다기보다, 사건에 얽힌 그 사람들의 얼굴이 더 궁금하니까. 그들 하나하나의 얼굴이.
스기노 사장은 과거의 사건을 재조사하는 한편, 히로코를 반드시 입사시키려 한다. 직접 찾아가 권유하기도 한다. 어쩌면 이유는 단순했다. ‘고작 여대생 하나’ 때문에 왜 그러냐는 주간지 편집장의 말 때문이다. 거대한 조직이 왜 여대생 하나의 문제 때문에 그리 화를 내고 신경을 쓰냐는 말. 그런 태도를 가진 기자라면 사건을 취재할 때에도, 결코 사람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지 않을 것이다. 그 사람들이 왜 그런 말과 행동을 했는지는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선정적인 이유와 결과에만 집착하고 폭로하는 것에 열광할 것이다. 그 과정을 통해서 무고한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파괴되고 얼마나 고통스러워하는지는 관심조차 없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사건의 선정성일 뿐이니까. ‘고작 여대생 하나’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그들은 모른다. 그 한 사람이, 자신에게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얼마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 존재인지 그들은 끝내 모를 것이다.
『저물어 가는 여름』은 감추어진 진실과 트릭을 밝혀내는 퍼즐 미스터리로서도 훌륭하다. 그리고 사건에 얽힌 사람들의 많은 이야기, 그들을 바라보는 작가의 온화한 시선은 미스터리를 더욱 풍부하게 만든다. 엄청나게 번뜩이는 무엇인가는 없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따뜻한 피’가 흐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성실하게 들려주는 미스터리다.
- 저물어 가는 여름 아카이 미히로 저/박진세 역 | 피니스아프리카에
대부분의 유괴 미스터리가 범인의 시점에서 독자에게 유괴 과정을 보여주는 도서추리물인 데 반해 『저물어 가는 여름』은 유괴를 주제로 한 본격 미스터리이기도 하며 과거의 사건을 추적하는 회상형 추리소설이기도 하다. 20년 전 일어났던 유괴 사건 범인의 딸이 20년 후 유명 신문사 기자로 합격이 내정된다. 이 사실을 폭로한 경쟁사 주간지의 기사를 계기로 신문사는 20년 전 유괴 사건의 재조사를 개시한다. 몇 년 전 사고로 신문사의 한직에서 시간을 보내던 전직 기자 가지가 회사의 명령으로 범인의 주변, 피해자, 당시의 담당 형사와 병원관계자를 거듭 취재한 끝에 봉인되어 있던 진실을 밝혀내는데...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8개의 댓글
추천 상품
필자
김봉석
대중문화평론가, 영화평론가. 현 <에이코믹스> 편집장. <씨네21> <한겨레> 기자, 컬처 매거진 <브뤼트>의 편집장을 지냈고 영화, 장르소설, 만화, 대중문화, 일본문화 등에 대한 글을 다양하게 쓴다.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 『컬처 트렌드를 읽는 즐거움』 『전방위 글쓰기』 『영화리뷰쓰기』 『공상이상 직업의 세계』 등을 썼고, 공저로는 <좀비사전』 『시네마 수학』 등이 있다. 『자퇴 매뉴얼』 『한국스릴러문학단편선』 등을 기획했다.
sind1318
2013.05.31
즌이
2013.05.31
heliokjh
2013.05.28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