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거짓말 - 『존재하지 않는 기사』
이 이탈리아풍 원더랜드는 『나무 위의 남작』, 『반쪼가리 자작』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세 권 모두, 정직한 제목을 배반하듯(아니, 충실하듯?), 기상천외한 거짓말은 주변에서 가끔 보이는 특이한 성격의 정수만을 모아낸 등장 인물들, 이들이 불협화음을 빚어내며 그리는 갈등들, 기이한 모험을 엮어내며 내내 내달린다. 그런데 이 꾸며낸 이야기들을 읽고 나면 공감이 퐁퐁 솟아난다.
2013.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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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림피아 체테리오레와 페츠의 기사, 코르벤트라츠와 수라의 구일디베르나 구문과 기타 가문 출신인 아질울포 에모 베르트란디노’ (아질울포 같은 기사들 다섯 명만 모이면 자기 소개로 하루를 꼬박 보내는 건 일도 아니겠다)는 무지갯빛 깃털이 달린 투구와 이어진 백색 갑옷을 입었지만, 그 속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는 오직 의지의 힘으로만 존재하고, 자신을 참전하게 만든 ‘정의’에 대한 굳은 믿음으로써 갑옷을 움직인다. 그렇다. 제목은 정직하지만 소설은 말도 안 되는 내용들로 가득 차 있다.
예를 들어서 부르는 사람에 따라서 이름이 수도 없이 바뀌는 떠돌이, 구르둘루가 있다. 그에게는 자아라는 개념이 없다시피 해서, 자신이 오리인지 개구리인지 아니면 구르둘루인지 분간을 못할 지경이다. 심지어는 고슴도치에 발이 찔리면 미리 피하지 않은 자신의 발을 욕하기 까지 하는데,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자신의 발에 안부를 전해달라던 앨리스를 떠올렸다. 정말로, 이 책에는 정신 병리학적으로 접근하면 흥미로운 결과가 나올 것 같은 인물들이 빼곡하다. 또, 아질울포가 속한 군대는 규율로 가득하지만 그들의 일처리는 장미에 페인트칠을 하는 수준이다.
이 이탈리아풍 원더랜드는 『나무 위의 남작』, 『반쪼가리 자작』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세 권 모두, 정직한 제목을 배반하듯(아니, 충실하듯?), 기상천외한 거짓말은 주변에서 가끔 보이는 특이한 성격의 정수만을 모아낸 등장 인물들, 이들이 불협화음을 빚어내며 그리는 갈등들, 기이한 모험을 엮어내며 내내 내달린다. 그런데 이 꾸며낸 이야기들을 읽고 나면 공감이 퐁퐁 솟아난다. 아무리 특이한 캐릭터가 나오고 이상한 일들이 벌어져도, 농도만 좀 낮추면 어딘가에서 만난 적 있는 사람, 당한 적 있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특히 『존재하지 않는 기사』는 다른 두 권과 달리 역사적인 배경 설정이 아주 희박해서(가끔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고유명사들이 등장하더라도, 실존하는 단체 및 인물과의 상관성을 찾지 않아도 될 정도로), 배경지식 없이 게으르게 읽어나갈 수 있는 게 특징이다. 그 덕분에 나는 멋대로 내 기억들을 떠올리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무슨 트릭인지 얘기하면 재미가 없어지니까 자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여기에만 귀여운 트릭이 들어간 것도 빼놓을 수 없다.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이탈리아산 거짓말과 만나보면 어떨까?
- 존재하지 않는 기사 이탈로 칼비노 저/이현경 역 | 민음사
‘존재하지 않는 기사’ 아질울포는 형체 없이, 오로지 존재하고 싶다는 열망과 이념만으로 백색 갑옷 속에 머문다. 오래전 한낱 떠돌이였던 아질울포는 겁탈당하려던 소프로니아를 구해 주고 기사 작위를 받았다. 하지만 어느 날 소프로니아의 아들임을 주장하는 청년 토리스먼드가 나타난다. 소프로니아의 처녀성을 지킴으로써 비로소 기사로 존재할 수 있었던 아질울포는 진실을 밝히기 위해 길을 떠난다. 그리고 아질울포의 하인 구르둘루, 아질울포를 짝사랑하는 여기사 브리다만테, 브리다만테를 짝사랑하는 풋내기 기사 랭보가 그의 뒤를 쫓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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