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서울에서도 충분히 행복한 여자
누군가 말했다. 자기 사는 곳 5㎞ 내에서 행복을 못 찾는 사람은 어디서고 행복을 못 찾는 사람이라고. 나는 왜 행복이 5㎞ 밖에 존재한다고 생각했을까. 떠나지 못해 안달했을까. 떠나면 답이 있다고 생각했을까. 일단 내 집에서 5㎞가 어디까지인지 그것부터 확인하고자 했다.
2013.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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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베이 외곽에 위치한 온천마을 우라이는 여느 관광지와 다를 바 없는 풍경이었다. 로를 중심으로 양 옆으로 온천장이 오밀조밀 모여 있고, 길가엔 식당과 기념품 상점들이 있는 곳.
관광이란 게 이런 거지. 산돼지로 만들어 육질이 더 쫄깃하다는 우라이의 명물 산돼지 꼬치구이나 서울의 흔한 닭꼬치나 뭐가 다를까, 싶은 생각이 드는 매우 권태로운 여행 중이었다. 그러다 점심때가 되어 완자탕을 먹으러 들어간 어느 노점식당. 나는 그 곳 여종업원의 눈빛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20대 초반쯤 되었을까. 저 수많은 관광객들은 여기 뭐 볼게 있다고 꾸역꾸역 찾아오나 싶은 권태로운 표정.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 또한 저 관광객 무리에 있었다. 그녀한테는 이곳이 너무 시시하겠지. 어쩌면 그녀는 완자탕을 판 돈으로 서울에 오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대만에서는 TV 켜면 한국 드라마와 가요 프로그램이 판을 치고 있었으니까. 대장금을 인상 깊게 봤고, 소녀시대와 빅뱅의 팬일지도 모른다. 퇴근 후 집에 가면 한국여행 안내서를 펼쳐 볼지도 모른다. 내 또래의 여자들이 뉴욕이나 파리에서 한 달쯤 지내는 여행을 꿈꾸듯 말이다.
얼마나 재미있는가? 나는 서울이 지겨워서 대만으로 왔는데 그녀는 대만이 지겨워 서울을 꿈꾸다니. 자기 사는 도시에 권태로움을 품는 건 누구나 다 똑같은 거겠지. 누군가에겐 떠나고 싶은 곳이 누군가에겐 떠나온 곳이겠지. 결국 문제는 ‘어디에 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일 텐데 우리는 방법의 문제를 장소의 탓으로 돌리는데 익숙해 있는 거겠지. 완 자탕 파는 소녀의 눈빛에서 나 자신을 본 후 생각했다. 이번 여행을 마치고 서울에 돌아가면 더 재밌게 지낼 궁리를 해봐야지 라고.
누군가 말했다. 자기 사는 곳 5㎞ 내에서 행복을 못 찾는 사람은 어디서고 행복을 못 찾는 사람이라고. 나는 왜 행복이 5㎞ 밖에 존재한다고 생각했을까. 떠나지 못해 안달했을까. 떠나면 답이 있다고 생각했을까. 일단 내 집에서 5㎞가 어디까지인지 그것부터 확인하고자 했다.
그때 살았던 세검정에서 출발해 부암동을 넘어 효자동으로 걸었다. 부암동엔 서울의 비밀정원이라 불리는 백사실 계곡이 있고, 북한산을 보며 커피 한잔 할 수 있는 커피집이 있다. 또 여름밤 서울성곽 위에 올라앉으면 서울에서 두 번째로 멋진 야경을 감상할 수 있다.
효자동으로 내려오면 조선의 궁궐이 있고, 툇마루에 걸터앉아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는 한옥미술관이 있다. 호떡을 좋아해 화덕호떡을 같이 내는 숯불 로스팅 커피집이 있고, 재료를 아끼지 않고 듬뿍 담아내는 프렌치 토스트 집이 있다. 어느 날엔 홍은동, 홍제동 방향으로 간다. 아기자기한 홍은동의 천변 길을 따라 걷다보면 홍제천이 나오고 홍제천은 다시 한강으로 흘러 든다.
또 어떤 날엔 북악터널을 지나 정릉 쪽으로 걷는다. 영화 <빈집>을 찍었던 69년산 아파트를 보고, 순대국밥 맛있기로 유명한 길음시장에 들리고, 정릉천을 따라 걷는다.
이 모든 것들이 원래 존재했던 것들인데 그전엔 몰랐거나 알아도 그다지 관심 갖지 않던 것들이다. 어떻게 이제야 이 흥미로운 것들이 발견된 걸까. 즐겁다. 재밌다.
어떤 이념에 사로잡혀 모든 걸 그 틀로 해석하는 게 싫어 지금껏 그 어떤 ‘주의자’도 되길 거부했던 나에게 처음으로 추구하고 싶은 ‘주의’가 생겼다. ‘지금 여기 주의자’. 나는 지금, 여기에서 행복해지기로 했다.
- 디테일, 서울 김지현 저 | 네시간
방송작가 특유의 객관성 있는 담담한 어조로 ‘도시, 서울 살이’의 다양한 모습을 현장성 있게 그리고 있다. 마치 나래이션을 듣는 듯한 느낌은 읽는 재미를 더하고 자신을 타인화하여 감정을 한 꺼풀 걷어낸 단조롭고 관조적인 감성도 매력적이다. 여행과 지리적 공간, 풍광이나 맛집 등을 찾아다니는 표피적인 도시 즐기기에만 국한하지 않고, 소박하고 자잘한 기쁨들이 조용히 이어지는 사소한 일상의 모습을 통해 서울의 지도에 끊임없이 새로운 삶의 노선을 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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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김지현
1975년생, 14년차 방송작가, 2년 전세 계약이 만료될 때마다 서울을 뜰 생각을 하지만 19년째 유예하고 있는 중견 서울생활자다. 요리와 정리정돈을 잘하고 맥주, 씨네큐브, 수영장, 효자동을 좋아한다. 게스트하우스, 똠얌꿍 식당, 독신자 맨션처럼 실천 가능성 없는 사업을 자주 구상하며 그나마 가장 오래 하고 있는 일이 글쓰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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