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과 김치만 주문한 중년신사, 무슨 사연이길래…
우리네 상차림 역시 한 편의 미술작품 못지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양한 색감과 질감, 그리고 예술가의 고귀한 숨결과도 같은 투박한 손맛이 함께 어우러져 나오는 우리네 상차림이야말로 작품으로서의 가치가 충분하지 않을까? 박물관의 미술작품을 감상하듯 우리네 상차림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못지않은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았다.
글ㆍ사진 채널예스
2013.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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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가을, 국도변 기사식당으로 기억된다. 프로그램 취재를 마치고 귀경길에 우연히 들른 식당 안에는 왁자지껄 여러 명의 기사분들이 식사를 하고 계셨다. 기분이 좋아졌다. 식당을 잘 찾았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예상은 그리 틀리지 않아서 젓가락이 닿자마자 없어지는 밑반찬 때문에 두세 번이나 주방 아주머니를 호출하는 무례를 범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였다. 옆 테이블에 앉은 손님이 식당 주인으로 보이는 할머니에게 이상한 주문을 하는 것이었다.

“할머니, 나 그거 주소.”
“아이구, 이 양반 오랜만에 오셨고마! 아, 글씨 우리 집 그거 말고도 먹을 거 많은디, 올 때마다 그것만 찾고 그랴. 딴 것도 먹어봐. 내 손맛 아직 녹슬지 않았당께.”
“허허, 그냥 그거 주소.”

두 분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긴장감 덕분에 필자는 정체 모를 손님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그것이 무엇일까? 궁금증을 푸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할머니가 가져온 음식은 고작 물 한 사발과 밥 한 그릇 그리고 열무김치가 다였기 때문이다.

신기한 것은 손님이었던 그 중년의 신사가 음식을 대하는 태도였다. 한참 동안이나 밥상을 바라보던 그 사내는 정성스레 밥 한 그릇을 비워내기 시작했다. 밥과 김치만 있는 초라한 밥상이었지만 먹는 모습으로만 봐서는, 세상에서 둘도 없는 진미를 대하는 듯했다. 그분의 사연이 궁금해진 것은 그때였다.

학창시절, 찢어지게 가난했던 그 사내는 매일 저녁 식당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한 끼를 해결했다. 품삯조차 아끼려 물 한 그릇으로 찬을 대신하려던 청년에게 주인아주머니는 묵묵히 열무김치 한 접시를 내오곤 했는데, 청년이 손사래를 치며 거절할 적마다 들은 척도 않고 주방으로 휘휘 들어갔다고 했다.

그리고 청년이 직장을 구하기 위해 상경하기 전날, 여느 때보다 일찍 식당에 들어선 그는 열무김치 한 접시와 밥 한 그릇이 하얀 손수건에 덮여져 상 위에 정성스레 놓인 것을 보았단다. 청년의 자존심에 행여 상처를 줄까 열무김치만 조심스레 내놓았던 주인의 따뜻한 마음이 소박한 상차림 속에 담겨 있었던 것이다. 그 후, 청년은 제법 성공한 사회인이 되었고 식당 아주머니는 백발의 할머니가 되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난 후 방금 전까지 보았던 열무김치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김치는 같은 김치인데 이야기를 듣고 난 후와 듣기 전의 맛이 달랐다. 무슨 특별한 조미료를 넣은 것도 아닐 텐데 이야기 하나에 따라 이렇게 맛이 달라질 줄이야! 필자의 일행은 모두 열무김치 한 접시를 순식간에 비워내며 뒤늦게 발견한 그 깊은 맛(?)에 감탄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때 머리를 스치듯 지나간 생각이 있었다. ‘음식을 이야기와 함께 차려내면 어떨까? 사람의 체취가 물씬 나는, 우리네 할머님들의 장독 속에 스며든 그 시절의 이야기들은 무엇일까?’


흔히들 한 편의 미술작품 속에는 당대의 사회문화적 배경을 알 수 있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고 한다.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몇 백 년 전 그려진 그림 한 장에 열광하며 그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숨을 죽인다. 세계 유수의 박물관에 걸린 미술작품들이 인류의 유산이 된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런데 우리네 상차림 역시 한 편의 미술작품 못지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양한 색감과 질감, 그리고 예술가의 고귀한 숨결과도 같은 투박한 손맛이 함께 어우러져 나오는 우리네 상차림이야말로 작품으로서의 가치가 충분하지 않을까? 박물관의 미술작품을 감상하듯 우리네 상차림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못지않은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았다.

상차림을 통하여 그 시대의 역사적 상황과 배경을 시청자들에게 선보이고 싶었다. 한 점의 유물이 전달하는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우리 상차림 속에도 스며들 수 있음을 증명해보고 싶었다. 이것이 『천년의 밥상』이 태어난 계기다.

이제 그 결실이 또 다른 열매를 맺어 이렇게 책으로 선보이게 되었다. 듬뿍 뜬 밥숟가락 위에 선조들의 속 깊은 이야기를 얹어내려 했던 제작진의 의도가 어떤 맛으로 전달될지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 설렘을 안고 첫 방송 때와 같은 기분으로 독자 여러분께 다시금 인사를 드린다.


『천년의 밥상』에 여러분들을 초대합니다
차림이 조금 모자랄지라도 부디 정성을 보시어
한껏 드시길 부탁드립니다

2012년 10월
어느 청명한 가을날 오후
오한샘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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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천년의 밥상 오한샘,최유진 글/양벙글 사진 | MID 엠아이디
이 책은 음식을 통해 한국사를 새롭게 조명해봄으로써 우리 민족의 ‘맛’과 ‘멋’과 ‘삶’을 오롯이 맛볼 수 있다. 음식은 그 나라의 문화를 담는 그릇일 뿐 아니라, 문화적인 파장이 가장 강한 매개체다. 그러니 음식은 그 나라의 문화 사절단이자 외교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EBS 천년의 밥상』은 오천년이란 시간에 깃든 우리의 희로애락을 음식으로 비벼내 천년을 거슬러 올라가 이야기한다. 시공을 초월하여 천 년을 뛰어넘는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를 되돌아보게 하며, 세계인과 소통하게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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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쳔년의 밥상 #오한샘 #최유진
1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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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ㅋ

2014.07.03

한반도의 천년의 밥상위에 올라올 음식은 보리 간장 소금 아닐까요. 고춧가루의 원료인 고추은 임란이후에 들어왔으니 ..
스텐 수저를 보니 굴비생각이 꿀떡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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