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드레 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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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세상에서 가장 나쁜 짓을 한 다음 경찰에 쫓긴다면 누가 나를 숨겨줄까? 어릴 때 ‘베프의 요건’을 생각하며 가장 많이 시도했던 극단적인 상상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을 때, 어떤 영문이나 곡절도 묻거나 따지지 않고, 나를 무작정 숨겨주는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이 진짜 베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살다 보니 그런 극단적인 가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친구가 나를 대하는 일상적인 태도였다. 특히 나의 장단점을 향한 친구의 즉각적인 반응은 관계의 지속성을 결정하는 바로미터가 되곤 했다.
처음엔 당연히 나에게 칭찬을 해주는 친구들에게 마음이 끌리곤 했다. 누구나 칭찬은 듣기 좋고 비난은 듣기 싫다. 하지만 상대방의 눈치를 살피며 칭찬만 하다 보면, 결국 진심이란 눈 녹듯 사라져가고 관계는 딱딱하게 응고되어버린다. 칭찬은 상대방이 눈치 채지 못하게 스리슬쩍. 비판은 지성과 감성의 최대치를 담아 눈부시게. 나는 그것이 친구를 향한 최고의 예우라고 생각한다.
나의 베프 K는 사실 나에 대한 칭찬에 가장 인색한 친구다. 타인이 자신을 어떻게 보든 말든 오직 자신이 바라보는 자신에만 흠뻑 빠져 있는 K. 나는 그런 K의 세련된 무관심이 좋았다. 표현은 잘 못하지만 오지랖이 태평양인 나는, 타인을 향한 내 마음의 일렁임을 다스리지 못해 좌충우돌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나와는 정반대되는 유전자만 골라 정교하게 짜 맞춘 듯한 K의 성격은 매번 ‘나’라는 사람의 인격을 시험하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되어주었다. K의 칭찬은 예측 불가능한 순간에 불현듯 찾아와 미처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집에 가서 곰곰 생각해보면 그게 바로 나를 향한 눈물겨운 칭찬이었다.
반면 나를 향한 K의 비판은 너무도 정교하고 심오해서 때로는 그 비판의 내용보다 그 비판의 논리에 홀딱 반할 정도였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그건 뼈아픈 비판이었다. 그런데 그 비판의 수사학이 워낙 아름다워, 나는 그때마다 K의 현란한 말솜씨에 혀를 내둘렀다. 그렇게 그 비판의 정교함을 섬세하게 곱씹다보면, 어느새 나는 나의 치명적인 단점들을 스스로 반추해볼 수 있었다. 내가 나의 장점 탓에 우쭐하지 않도록 무심하게 칭찬해주고, 내가 나의 결점 탓에 질식사하지 않도록 열과 성의를 다해 비판해주는 것. 그것이 나를 향한 K의 진심 어린 우정임을 깨달은 것은, 사실 서른이 훌쩍 넘은 후였다. K의 칭찬을 수없이 곡해하고, K의 비판에 수없이 상처받은 후이기도 했다.
예컨대 나를 향한 K의 기념비적인 비판은 이런 문장으로 기억된다. 세월이 많이 지나 나의 각색도 한몫하겠지만, 내 마음 속에 아로새겨진 말은 이런 것이었다.
“너랑 내가 안 친했을 때 말이지. 우리가 20대 초반이었지, 아마. 내가 기억하는 네 모습은 항상 주먹을 꽉 쥐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어. 실제로 주먹을 쥐고 있진 않았지만, 마음속으로 항상 주먹을 꽉 쥐고 있는 것 같은 표정이었지. 사실 난 그런 스타일 딱 싫어하는데, 너는 이상하게 마음에 들어오더라고. 그땐 저 녀석이 저 작은 주먹으로 뭐라도 던질 것 같았어. 세상을 향해서 제대로 한 방 날릴 것 같은 주먹이었거든. 전혀 아무 것도 던지지 않고 있는데도, 있는 힘을 다해 뭔가 던지는 것 같더라고. 그런데 요샌 말이야. 네가 세상을 향해 돌을 던지는 빈도는 그때보다 훨씬 많아졌는데, 그 돌이 별로 힘세 보이지도 않고, 정확한 방향인 것 같지도 않아. 왜 그렇지?”
나는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허를 찔려 그 자리에서 픽 쓰러질 것만 같았다. 사실 난 그때 심각한 일중독과 매너리즘에 빠져 있었다. 돈을 벌기 위해 하기 싫은 아르바이트도 엄청나게 많이 하고 있었고, 늘 피곤에 절어 진정 내가 무얼 하고 있는지도 모를 때가 많았다. 하지만 ‘그래도 난 열심히 살 테야’라는 대책 없는 방향성을 자부하며 하루하루 버티고 있는 중이었다. 뭔가 가장 친한 벗을 향해 내 입장을 거창하게 변명하고 싶은데, 아무런 멋진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수치와 모멸감에 눈물이 삐져나올 것 같았지만 간신히 참았던 기억만 남아 있다. 솔직히 그 순간엔 K가 끔찍이도 미웠다. 쳇, 제까짓 게 뭔데 나를 판단한담!
우정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니까
진정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결코 하기 싫은 일들도 꾹 참고 견뎌야 한다고 생각했던 그때는, 그 수많은 하기 싫은 일들을 해치우느라 나의 나다움이 얼마나 속수무책으로 닳아 없어지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 문장들이 마음속에서 새록새록 아픔을 더해가면서, 비수 같은 날카로움이 모지라지고 환하고 따스한 울림으로 변해갔다. 그건 단순한 비난이 아니라 나를 진정 아끼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충고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내가 뭘 할 수 있는가’보다는 ‘내가 뭘 하고 싶은가’를 진심으로 매일매일 고민하게 되었다. 외부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보다는, 오랜 시간이 흘러도 후회하지 않을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일에 대한 욕심이 많았던 나는 한때 일중독이야말로 진정한 꿈을 향한 우회로라고 믿었지만, 돌이켜보면 ‘일 욕심’과 ‘꿈’은 전혀 상관이 없었다. 오히려 꿈을 위해서는 일을 접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진짜 나와의 투명한 대면을 위해서는, 외부를 향한 시끌벅적한 스피커를 끄고 내 안에서 울리는 내 마음의 복화술을 들어야 했다.
한참 지나 생각해보니, 친구의 그 충격적인 비난의 메시지는 더없는 칭찬이기도 했다. 내 안에는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내면의 황금이 있다는 것. 굳이 세상을 향해 눈에 보이는 짱돌을 던지지 않아도, 나라는 존재 자체가 이미 있는 그대로 충분히 씩씩하고 단단한(?) 돌멩이였음을. 그 친구는 알아봐주고 기억해주었던 것이다.
오히려 20대 초반에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기 때문에 ‘보여줄 돌’도 없었다. 이제 막 글 쓰는 사람으로 조금씩 자리를 잡기 시작했던 서른 즈음의 그때가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는 ‘괜찮은 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K는 얼핏 보면 ‘괜찮아 보이는 돌’ 속에 숨은 심각한 병증을 꿰뚫어보고, 내가 더 망가지기 전에, 내가 더 타락하기 전에, 시들어가는 내 영혼의 등짝에 상큼한 죽비를 날려주었던 것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을 때 우리의 새침데기 K가 과연 나를 진짜 숨겨줄지는 정녕 알 수 없다. 지금까지의 데이터를 종합해보자면, K는 그 와중에도 온갖 질문을 퍼부으며 궁지에 빠진 나를 결국 안 숨겨줄 가능성도 매우 높다. 하지만 난 그런 K가 마냥 좋다. 내가 진정 나쁜 짓을 했다면 아무리 친구라도 숨겨주어서는 안되고, 내가 불가피하게 궁지에 빠졌다면 자신이 아무리 힘들어도 숨겨주겠지. K는 어떤 순간에도 공정할 것이다.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는 맹목적인 편들기, 그건 우정이 아니니까.
벗이 한밤중에 이상한 길로 빠지기 일보 직전에, 벗 앞에 나타나 ‘짠’하고 헤드라이트를 밝혀주는 센스. 벗을 더 오래 제대로 사랑하기 위해 서로를 향한 ‘미적 거리’를 둘 줄 아는 여유와 예의. 진정한 벗이 되기 위한 마음의 레시피는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수많은 우정의 매뉴얼 중에 굳이 하나를 꼽자면, 나는 이걸 뽑고 싶다. ‘나’를 ‘내 편’이 아닌 관점에서 바라보는 참신한 시점. 나를 1인칭 주인공 시점이 아닌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바라볼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사람. 그런 사람과의 우정이라면, 평생을 함께 해도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사랑처럼, 여행처럼, 문학처럼. 우정은 얌전히 고여 있는 ‘명사’가 아니라 영원히 움직이는 ‘동사’니까.
p.s. 다음 주부터는 20대에 간직할 소중한 키워드, 그 두 번째 이야기, ‘여행’ 편이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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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
정여울은…
타칭 문학평론가, 자칭 글쟁이 또는 글순이.
문학과 영화와 드라마, 그리고 여행과 음악을 짝사랑하는 사람.
<한겨레신문>에 ‘정여울의 청소년 인문학’ 코너를 연재하고 있으며, 2012년 현재 서울대학교에서 글쓰기를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는 ≪시네필 다이어리1, 2≫ ≪정여울의 소설 읽는 시간≫, ≪미디어 아라크네≫, ≪내 서재에 꽂은 작은 안테나≫, ≪정여울의 문학멘토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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