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할머니들 찾아간 일본인, 그가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 히데토 오가와
일본인으로서 사죄하는 마음으로 용기 내어 <나눔의 집>을 찾아간 오가와 씨를 할머니들께선 반갑게 맞아주셨다고 했다. 죄송하다고 거듭된 사과를 할머니들은 유창한 일본어로 받아주셨다고. 유관순부터 ‘위안부’ 할머니들을 만나기까지, 보통의 일본인이 하기 힘든 경험을 한 오가와 씨의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면 좋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2012.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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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웠던 피스보트에서의 120분 토론회
한국 드라마는 잘 보지 않는다는 오가와 씨는 유난히 한국 근현대사에 관심이 많았다. 심지어 몇 년 전에 방문한 전태일 기념관에서는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를 만난 적도 있다고. 역사를 공부하며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도 당연히 알게 된 그는 <수요 집회>뿐만 아니라 할머니들이 살고 있는 <나눔의 집>까지 방문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며 베트남에서 내가 느꼈던 두려움이 떠올랐다. 끔찍한 학살에서 살아남은 베트남 생존자를 만났을 때, 한국인으로서 느끼는 죄책감과 의무감보다는 알 수 없는 두려움과 공포가 더 컸었다. 절규하듯 토해내던 울음소리에 숨죽여 눈물 흘릴 수밖에 없었던 순간들. <나눔의 집>을 찾아갔던 오가와 씨도 어쩌면 나와 비슷한 심정이 아니었을까.
일본인으로서 사죄하는 마음으로 용기 내어 <나눔의 집>을 찾아간 오가와 씨를 할머니들께선 반갑게 맞아주셨다고 했다. 죄송하다고 거듭된 사과를 할머니들은 유창한 일본어로 받아주셨다고. 유관순부터 ‘위안부’ 할머니들을 만나기까지, 보통의 일본인이 하기 힘든 경험을 한 오가와 씨의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면 좋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위안부’ 할머니들을 만나고, 일본 대사관 앞에서 함께 구호를 외쳤던 귀한 경험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씀해주실 것을 정중하게 부탁드렸다. 흔쾌히 그러겠다고 약속해주시던 오가와 씨! 든든한 지원군을 얻은 나는 식사를 마치고 곧바로 토론회 개최 준비를 시작했다.
드디어 기다렸던 토론회 날이 밝았다. 서명운동을 준비하던 그날처럼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 사람들이 너무 없으면 어떡하지? 혹시 누가 와서 할머니들을 비난하는 이야기라도 하면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그래도 피스보트니까 관심 갖고 토론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겠지.
20분짜리 할머니들에 관한 영상으로 막을 올린 토론회. 영상이 끝나고 오가와 씨가 자신의 경험담을 공유하는 것을 시작으로 뜨거운 토론이 시작되었다. 치열함, 그 자체였다.
100분으로 예정했던 토론회는 20분을 더 채우고서야 잦아들었다. 그 토론의 뜨거운 열기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던 나는 마지막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마이크를 잡을 수 있었다. 맨 먼저 할머니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여주신 것에 감사하다는 말로 발언을 시작했다. 그리고 할머니들의 아픔은 역사 속에 화석으로 남은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달라고 부탁드렸다. 이것을 다른 누구의 잘못이나 책임으로 미룰 것이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아울러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 건립이 준비 중이라는 사실을 알리며, 항해가 끝나고도 꼭 우리 할머니들을 위해 잊지 말고 노력해달라는 당부로 뜨거운 토론의 막을 내렸다.
그는 달랐다. 그런데 나는…?
역사 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하는 일본인 학자나 활동가는 만나본 적이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관심을 갖고 노력하는 일본인을 만난 경우는 처음이었다. 물론 전날 토론을 진행하며. 언론이라는 ‘창’에 비치지 않은 수많은 ‘오가와 씨’가 일본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한국 사람으로 태어나서 한국말을 쓰는 나는 과연 그처럼 열정을 갖고 행동하고 있는 걸까? 다른 한국인들은 이 문제에 얼마나 관심을 갖고 있을까? 현대를 사는 우리는 문제 해결을 위해 당연히 행동으로 나서야 하는 게 아닌가.
한국 드라마는 잘 보지 않는다는 오가와 씨는 유난히 한국 근현대사에 관심이 많았다. 심지어 몇 년 전에 방문한 전태일 기념관에서는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를 만난 적도 있다고. 역사를 공부하며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도 당연히 알게 된 그는 <수요 집회>뿐만 아니라 할머니들이 살고 있는 <나눔의 집>까지 방문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며 베트남에서 내가 느꼈던 두려움이 떠올랐다. 끔찍한 학살에서 살아남은 베트남 생존자를 만났을 때, 한국인으로서 느끼는 죄책감과 의무감보다는 알 수 없는 두려움과 공포가 더 컸었다. 절규하듯 토해내던 울음소리에 숨죽여 눈물 흘릴 수밖에 없었던 순간들. <나눔의 집>을 찾아갔던 오가와 씨도 어쩌면 나와 비슷한 심정이 아니었을까.
일본인으로서 사죄하는 마음으로 용기 내어 <나눔의 집>을 찾아간 오가와 씨를 할머니들께선 반갑게 맞아주셨다고 했다. 죄송하다고 거듭된 사과를 할머니들은 유창한 일본어로 받아주셨다고. 유관순부터 ‘위안부’ 할머니들을 만나기까지, 보통의 일본인이 하기 힘든 경험을 한 오가와 씨의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면 좋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위안부’ 할머니들을 만나고, 일본 대사관 앞에서 함께 구호를 외쳤던 귀한 경험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씀해주실 것을 정중하게 부탁드렸다. 흔쾌히 그러겠다고 약속해주시던 오가와 씨! 든든한 지원군을 얻은 나는 식사를 마치고 곧바로 토론회 개최 준비를 시작했다.
드디어 기다렸던 토론회 날이 밝았다. 서명운동을 준비하던 그날처럼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 사람들이 너무 없으면 어떡하지? 혹시 누가 와서 할머니들을 비난하는 이야기라도 하면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그래도 피스보트니까 관심 갖고 토론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겠지.
20분짜리 할머니들에 관한 영상으로 막을 올린 토론회. 영상이 끝나고 오가와 씨가 자신의 경험담을 공유하는 것을 시작으로 뜨거운 토론이 시작되었다. 치열함, 그 자체였다.
100분으로 예정했던 토론회는 20분을 더 채우고서야 잦아들었다. 그 토론의 뜨거운 열기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던 나는 마지막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마이크를 잡을 수 있었다. 맨 먼저 할머니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여주신 것에 감사하다는 말로 발언을 시작했다. 그리고 할머니들의 아픔은 역사 속에 화석으로 남은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달라고 부탁드렸다. 이것을 다른 누구의 잘못이나 책임으로 미룰 것이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아울러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 건립이 준비 중이라는 사실을 알리며, 항해가 끝나고도 꼭 우리 할머니들을 위해 잊지 말고 노력해달라는 당부로 뜨거운 토론의 막을 내렸다.
그는 달랐다. 그런데 나는…?
역사 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하는 일본인 학자나 활동가는 만나본 적이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관심을 갖고 노력하는 일본인을 만난 경우는 처음이었다. 물론 전날 토론을 진행하며. 언론이라는 ‘창’에 비치지 않은 수많은 ‘오가와 씨’가 일본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한국 사람으로 태어나서 한국말을 쓰는 나는 과연 그처럼 열정을 갖고 행동하고 있는 걸까? 다른 한국인들은 이 문제에 얼마나 관심을 갖고 있을까? 현대를 사는 우리는 문제 해결을 위해 당연히 행동으로 나서야 하는 게 아닌가.
- 조금 다른 지구마을 여행 이동원 저 | 예담
대학생이 되면 누구나 공식처럼 떠나는 배낭여행이 아닌 자신만의 세계 일주를 기획하던 스물다섯 살 청년, 이동원은 단순히 관광만 하는 여행이 아닌 지구마을 사람들 사이에 스미고 싶은 여행을 위해 전 세계의 NGO 단체에 무차별로 메일을 보낸다. 그리고 수많은 NGO 단체에서 자신을 애타게 기다린다는 사실에 즐거운 마음으로 배낭을 멘다. 그렇게 남들과는 ‘조금 다른’ 7개월간의 전 세계를 향한 청춘 여행이 시작되었다…
8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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