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짐승의 길을 선택한 이유 - 『짐승의 길』
사람이 짐승의 길을 착각하여 들어서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길이라 생각하고 가다 보면 수풀 밑으로 길이 나 있기도 하고, 진흙탕을 통과할 수도 있다. 사람이 다니기에는 도통 불가능한 험한 길을 만날 수도 있다. 애초에 짐승의 길이란, 사람이 다닐만한 곳이 아니다. 그렇다면 마쓰모토 세이초는 어떤 의미로 ‘짐승의 길’이란 제목을 붙인 것일까?
글ㆍ사진 김봉석
2012.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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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모토 세이초의 『짐승의 길』 초입에 ‘짐승 길’이 무엇인지 설명이 나온다.

산양이나 멧돼지 등이 지나다녀서 산중에 생긴 좁은 길을 말한다. 산을 걷는 사람이 길로 착각할 때가 있다.

사람이 짐승의 길을 착각하여 들어서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길이라 생각하고 가다 보면 수풀 밑으로 길이 나 있기도 하고, 진흙탕을 통과할 수도 있다. 사람이 다니기에는 도통 불가능한 험한 길을 만날 수도 있다. 애초에 짐승의 길이란, 사람이 다닐만한 곳이 아니다. 그렇다면 마쓰모토 세이초는 어떤 의미로 ‘짐승의 길’이란 제목을 붙인 것일까?


다미코란 여인이 있다. 병에 걸려 쓰러진 남편은 거동이 불편하여 일을 할 수가 없다. 어쩔 수 없이 다미코는 고급 온천 여관에서 일을 하며 며칠에 한 번씩 집에 들른다. 남편은 그런 다미코를 의심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의심이라기보다는 질투이고 욕정이다. 자신은 하루 종일 누워서 허송세월하고 있다. 그런데 아내는 혹시, 이런 나를 비웃으며 누군가의 품에 안겨 있는 것은 아닐까. 질투는 망상을 부르고, 집착은 날로 심해져만 간다. 다미코는 알고 있다. 이런 남편과 함께 있는 이상, 시들어가는 날들밖에는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런 다미코에게 제안이 들어온다. 뉴 로얄 호텔의 지배인 고다키는, 잠시 동안 도구가 되지 않겠냐고 물어온다. 일본 정재계를 쥐고 흔드는 기토 고타라는 노인의 애인이자 하녀가 되어달라는 것이다. 당분간 그 일을 하고 나면, 오히려 누군가를 쥐고 흔들 수도 있는 미래가 열릴 수 있다면서. 다미코는 망설인다. 과연 이대로 가면 내 인생은 좋아질 수 있을까? 뼈 빠지게 일해서 돈을 벌어봐야 남편의 병간호에 다 들어갈 것이고, 그래 봐야 얻을 것은 남편의 질투와 시기가 아닐까. 고다키는 말한다. 보통 사람이 보통의 심리로 당신을 행복하게 해 주고 싶다고.

행복해지고 싶었던 다미코는 짐승의 길로 들어선다. 골칫거리가 될 수 있는 남편을 죽이고, 도구가 되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짐승의 길에 들어선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들어서기는 쉽지만 헤어 나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기토 고타라는 노인은 일본 사회를 뒤흔드는 실력자다. 돈과 폭력 그리고 섹스를 이용하여 사람들을 조종하고 파멸시키거나 죽이기도 한다. 다미코는 그런 남자의 도구가 되기 위해, 자신 역시 살인을 저지른다. 우발적으로 저지른 살인이 아니기에, 한 번을 하나 두 번을 하나 마찬가지가 된다. 다미코도 잘 알고 있다. 이제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그래서 점점 더 짐승의 길로 깊이 들어간다.

『짐승의 길』에는 특별히 사악한 인간이 나오지 않는다. 대신 ‘짐승 길’에 접어든 인간의 말로가 생생하게 드러난다. 다미코는 보통의 여자였다.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고다키는 ‘보통의 행복’을 들먹였던 것이다. 이대로 살아갈 수는 없다, 는 불안감 그리고 도망치고 싶은 욕망이 다미코를 ‘짐승’이 되게 했다. 살인이나 강도 같은 흉악한 범죄를 겪지 못한 보통 사람들은 ‘범죄자’를 특별한 사람으로 보는 경우가 종종 있다. 뭔가 성정이 포악하거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범죄자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세상에는 ‘사이코패스’라고 부를만한 범죄자들이 존재한다.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이 전혀 없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태연하게 타인을 희생시키는 특별한 인간들이 범죄자가 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현실에는 의외로, 보통 사람들이 저지르는 흉악한 범죄가 상상 이상으로 많다. 별로 범죄를 저지르려는 생각은 없었어. 하지만 그건 커다란 소용돌이 속에 들어가 있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휘말려서 위법 행위를 해야 하지. 어쩔 수 없는 일이야.’라는 말을 생각해보자. 다미코는 남편을 죽였다. 형사인 히사쓰네는 다미코를 의심한다. 그런데 히사쓰네는 의혹을 상부에 알리고 정식으로 수사를 하는 대신 홀로 다미코의 뒤를 추적한다. 히사쓰네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지만, 다미코는 그 이후가 더욱 더 두렵다. 짐승의 길에 이미 접어든 다미코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아예 짐승의 길에서 나오면 좋겠지만 이미 다미코는 소용돌이 속에 갇혀 있다. 다미코가 살아나는 방법은 히사쓰네를 제거하는 것뿐이다. 그렇게 그들은 공범자가 되고, 악인을 넘어 짐승이 된다.

사회파 미스터리의 선구자인 마쓰모토 세이초는 추리소설이 트릭과 반전을 위주로 한 ‘논리 게임’에 치우치는 것에 반대하며 ‘사회’를 전면으로 끌어들였다. 『짐승의 길』에서도 다미코는 그저 보통의 여자였다. 그러나 고다키의 제의를 받아들이는 순간, 그녀는 범죄자가 되고 짐승이 되어버린다. 이처럼 보통 사람들이 범죄에 휘말리거나 선택을 하면서 벌어지는 일상적인 범죄들을, 사회파 미스터리는 주요 제재로 삼는다. 그리고 개인의 일상적인 범죄들을 파헤쳐 보면,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거나 간섭하는 더욱 더 큰 권력과 음모들이 드러난다. 개인을 통해서, 개인적인 범죄를 통해서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와 모순을 들여다보는 것. 마쓰모토 세이초의 소설에서 범죄는 별세계의 게임이나 사건이 아니다. 아사다 지로의 말처럼독자들은 그의 소설 속 등장인물을, 자기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자신과 같이 어쩔 수 없는, 인간으로 느낀다.’



물론 마쓰모토 세이초는 사회 전체를 뒤덮고 있는 ‘흑막’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그것을 누구는 단지 음모론일 뿐이라며 일축하기도 한다. 그런데 마쓰모토 세이초의 소설을 읽다 보면 흑막의 존재에 대해서 놀라기보다는, 보통 사람들이 짐승이 되어가는 과정에 먼저 공감하게 된다. 『제로의 초점』이나 『모래 그릇』 같은 작품들에서는, 범죄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슬픈 과거가 드러난다. 물론 그들은 범죄를 택했고, 짐승이 되기를 자처했기에 용서받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들을 이해할 수는 있다. 그들이 왜 짐승의 길로 접어드는 선택을 했는지는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내가 다미코와 같은 상황에 놓여 있다면 어떻게 할까? 도구를 거부하고, 매일같이 열심히 일하면서도 어떤 희망도 미래도 없는 날들을 택했을까? 아니면 다미코와 같은 짐승의 길? 모르겠다. 단번에 결정할 수가 없다. 고심하고 고심하다가, 어느 순간에 한쪽으로 기울어져버렸을 것 같다. 그리고 어느 쪽이건 후회했을 것 같다. 왜 나는 다른 길로 가지 않았을까, 라며.

『짐승의 길』은 1962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무려 50년 전의 소설. 그런데도 핸드폰이 없고 인터넷이 없다는 사실 정도를 제외하면 뭔가 낡았다는 느낌이 그다지 들지 않는다. 그것은 곧 『짐승의 길』이 쓰여진 당시와 50여년 후의 지금이, 별 차이가 없다는 말도 된다. 즉 인간이 살아가는 조건, 보통 사람들이 느끼는 고통과 절망은 전혀 바뀐 것이 없다는 것. 그 말은 곧 지금 우리들 역시 똑같은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짐승의 길에 접어들 것인가, 말 것인가.




< 국내에 번역, 출간된 ‘마쓰모토 세이초’ 저서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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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의 길 (상) 마쓰모토 세이초 저/김소연 역 | 북스피어

『짐승의 길』은 1962년 1월 8일부터 1963년 12월 30일까지 《주간신초》에 연재되었다가 다음해인 1964년에 단행본으로 나온 작품이다. 당시 세이초는 작가 부문 소득액 순위에서 매년 1위를 달렸고, 나오키 상 선고위원이었으며, 무려 열여덟 편이나 되는 장편소설을 신문과 잡지에 폭풍 연재하던 중이었다. 아울러 논픽션 『일본의 검은 안개』, 『심층 해류』, 『현대 관료론』 등을 쓴 공로를 인정받아 제5회 일본 저널리스트회의 상을 수상하고, 일본 추리 작가 협회 이사장으로 취임하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작가의 이력을 통틀어 가장 정력적으로 활동한 시기라 볼 수 있을 듯하다…

 



12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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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2012.08.09

그럼에도 불구하고 . 이말이 정말 슬프다. 알면서도 가는 길. 보통 사람이 그렇게 밖에 할 수 없게 만드는 사회적 문제. 얼마전에 끝난 추적자. 를 연상하게 만드는 글의 내용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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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모노로그

2012.03.28

사회파 미스터리의 선구자인 마쓰모토 세이초는 추리소설이 트릭과 반전을 위주로 한 ‘논리 게임’에 치우치는 것에 반대하며 ‘사회’를 전면으로 끌어들인 추리소설가라는 평은 익히 들어왔으나, 세이초의 소설을 한번도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 사람이 가지 못하는 길 , 짐승의 길 정말 궁금하네요 ^^ 언제 한번 세이초의 작품을 탐독해야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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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jmcp25

2012.03.28

남편의 병간호를 하며 힘들게 살던 다미코가 나쁜 제안을 받아들여 결국 짐승의 길을 가게 되었군요. 그길에서 어떤 선택을 할 수도 없이 계속 짐승의 길을 가게 되는 다미코를 통해서 작가는 개인적인 범죄를 통해서 사회의 모순과 문제를 드러내고 독자들에게 다미코도 원래 보통 여자였고 범죄자는 특별하게 이상한 사람들이 아니고 주변의 환경과 사회의 불합리한 구조속에서 만들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전해주고 있는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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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석

대중문화평론가, 영화평론가. 현 <에이코믹스> 편집장. <씨네21> <한겨레> 기자, 컬처 매거진 <브뤼트>의 편집장을 지냈고 영화, 장르소설, 만화, 대중문화, 일본문화 등에 대한 글을 다양하게 쓴다.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 『컬처 트렌드를 읽는 즐거움』 『전방위 글쓰기』 『영화리뷰쓰기』 『공상이상 직업의 세계』 등을 썼고, 공저로는 <좀비사전』 『시네마 수학』 등이 있다. 『자퇴 매뉴얼』 『한국스릴러문학단편선』 등을 기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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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모토 세이초

‘일본 문학의 거인’, ‘일본의 진정한 국민 작가’, … 이런 수식어로도 마쓰모토 세이초를 전부 표현할 수 없다. 보편적인 테마로 인간을 그리고, 역사와 사회의 어둠을 파헤치려 했던 세이초의 창작 영역은 픽션, 논픽션, 평전, 고대사, 현대사 등 무궁무진했다. 트릭이나 범죄 자체에 매달리기보다는 범죄의 사회적 동기를 드러내서 인간성의 문제를 파고드는 ‘사회파 추리소설’의 붐을 일으킨 마쓰모토 세이초는, 오늘날 일본 미스터리 소설 작가들의 문학적 뿌리이자 영원한 스승으로 존경받고 있다. 41세 늦은 나이로 문단에 들어서 숨을 거둔 82세까지 세이초는 ‘내용은 시대의 반영이나 사상의 빛을 받아 변모를 이루어 간다’는 변함없는 신념을 가지고 현역으로 글을 썼다. 1909년 기타큐슈의 작은 도시 고쿠라에서 태어난 세이초는, 40세가 될 때까지 작가가 될 어떠한 희망도 보이지 않을 만큼 궁핍한 환경에서 열악한 세월을 보냈다. 작가 마쓰모토 세이초의 역사는 1950년부터 마침내 극적으로 펼쳐졌다. [주간 아사히] 공모전에 그의 데뷔작 「사이고사쓰」가 당선되었고, 이후 비록 재능은 있지만 고단한 인생을 보낼 수밖에 없는 비극적인 주인공을 그린 「어느 '고쿠라 일기' 전」으로, 대중적 인기를 반영하는 나오키 상에 후보로 올랐다가 도리어 아쿠타가와 상에 당선되는 행운을 거머쥔다. 대중문학과 순문학의 경계가 무너지는 실로 파천황 같은 대반전이었다. 이후 전업작가로 나선 세이초는 창작력에 불이 붙으면서 “공부하면서 쓰고, 쓰면서 공부한다”는 각오를 실천하기 시작했다. 1958년에 발표하여 베스트셀러가 된 추리 소설 『점과 선』, 『눈의 벽』은 범죄의 동기를 중시한 ‘사회파 추리 소설’로 불리며 세이초 붐을 일으켰다. 연이어 『제로의 초점』, 『눈동자의 벽』, 『모래그릇』 등을 내면서 세이초는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부동의 지위를 쌓는다. 그러나 그의 작품을 한 가지 형태나 일정한 범주에 가둘 수는 없었다. 소설가로 자리를 잡자마자, 세이초가 다음으로 파고든 것은 논픽션이었다. 1961년 51세에 문제작 『일본의 검은 안개』를 발표해서 일본 사회를 뒤흔들었다. 이때부터 일본에서는 사회나 조직의 불투명한 비리를 표현할 때 ‘검은 안개’라는 말이 대유행처럼 쓰였다. 이어서 1964년부터 7년간에 걸쳐 집필한 『쇼와사 발굴』은 그의 작품 가운데 혼신의 대작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끊임없는 자기공부와 불굴의 정신력으로 자신을 채찍질했던 세이초였기 때문에 픽션, 논픽션, 평전, 고대사, 현대사 등으로 창작 세계를 무한히 확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대중적인 인기는 물론, 『마쓰모토 세이초 걸작 단편 컬렉션』의 편집을 직접 맡은 미야베 미유키, 마쓰모토 세이초 연구서를 다수 발표한 아토다 다카시, 세이초 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두각을 드러낸 요코야마 히데오, 야마모토 겐이치 등 일본의 많은 작가들이 마쓰모토 세이초를 읽고 사랑하고 있다. 2009년 마쓰모토 세이초 탄생 100돌을 기념해 『제로의 초점』, 『검은 회랑』, 『귀축』 등이 영화와 드라마로 발표되었다. 그는 마치 중년에 데뷔한 한을 풀기 위해 일분일초도 헛되이 낭비하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그의 모든 생애를 창작활동에 쏟아 부었다. 작가 생활 40년 동안에 쓴 장편이 약 100편이고, 중단편 등을 포함한 편수로는 거의 1,000편, 단행본으로는 700여 권에 이른다. 많이 썼다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엄청난 양이다. 세이초는 평생 온갖 규범을 넘어선 작가였고, 전쟁과 조직과 권력에 반대한 사람이었다. 그로 인해 문단과 학계에서는 한 번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1976년부터 실시한 전국 독서 여론조사(마이니치 신문 주최)에서 10년 동안 ‘좋아하는 작가’ 1위에 선정되면서 명실상부하게 국민작가의 지위를 얻었지만, 관에서 받은 훈장은 평생 동안 단 하나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