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강남 놀이문화가 지금은 중국에서…” -『오렌지 리퍼블릭』 노희준
이 땅의 많은 것은 ‘분리’를 전제로 한다. 사람에 대한 성, 직업, 나이, 정치적 성향. 아주 어이없는 일이지만...
글ㆍ사진 김이준수
2010.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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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많은 것은 ‘분리’를 전제로 한다. 사람에 대한 성, 직업, 나이, 정치적 성향 등을 비롯 시간, 공간, 사물 등 세상 거의 모든 것이 그렇다. 물론 편의상 분리를 하는 경우도 많지만, 이 분리(혹은 분류)가 권력과 차별의 문제를 부르기도 한다. 사람 사이에선 더욱 그렇다. 특정 집단을 구획 짓는 권력의 문제가 작동한다. 얼마 전, ‘그들’의 미친 짓, G20도 그랬듯이. 누가 이 지구를 G20이라고 분리했을까. 그렇다면 힘 있다는 G20은 그 힘만큼 지구에, 인류에 제대로 책임지는 일을 하고 있을까, 뭐 그런 의문들.

아주 어이없는 일이지만, 특정 집단을 구획 짓는 권력의 문제는 이 땅에서 강을 놓고도 형성된다. 강남과 강북이라는 말이 그렇다. 그 말은 처음에는 단순했을 것이다. 한강의 남쪽이냐, 북쪽이냐. 하지만 현실에서 강남과 강북은 그것과 다른 맥락에서 사용되는 경우가 훨씬 많다. 강남 혹은 강북을 호명할 때, 어떤 관계망을 형성하고, 권력이 형성돼 차별이나 소외가 발생하기도 한다.

그건, 교과서나 책에 나온 것도 아니다. 이상하다. 배우지 않았으나 우리에겐 이미 익숙한 레토릭이다. 강동과 강서가 강남과 강북과 같은 상징을 띠진 않는다. 지난 6월의 지방선거, 서울시장 투표 결과. 오죽하면, 지금의 시장은 ‘서울시장’이 아닌 ‘강남시장’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쓸 수밖에 없었을까.

‘강남’을 향한 욕망 혹은 경멸은 치고받으면서도 때론 혼재한다. 우리들의 이중적인 태도와 다르지 않다. 권력과 화폐가 유착한 정치적인 목적과 기득권의 보호 본능에 의해 형성된 강남. 가치 판단은 차치하고 지금-여기에 강남이 갖는 힘과 영향력은 무척 크다. 이른바 ‘중심부 문화’ 혹은 ‘주류 문화’와도 깊은 관련을 맺는 곳이 강남이다.

그렇다면, 이른바 ‘강남 문화’가 본격적으로 한국 사회에 힘을 발휘하고 선망과 욕망의 대상으로 떠오른 1990년대의 강남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특히, 지금 성인이 되어 30~40대로서 대한민국의 주축을 이루는 세대들이 가치관과 세계관을 형성했던 시기에는 어땠을까. 과연 우리는 제대로 단추를 채운 것일까. 지금의 혼돈과 절망은, 그때와 어떤 관련을 맺을까.

여기, 그때를 다룬 문학이 당도했다. 『오렌지 리퍼블릭』(노희준 지음|자음과모음 펴냄). 문학이 할 수 있는 일. 사실과 르포 사이에 텅 빈 공간을 채워서 우리의 사유와 감각을 깨우는 일. 지금을 돌아보게 만드는 일. 노희준이 우울을 무릅쓰고 택한 일이었다. 매년 월간 <현대문학>이 제공하는 문단인 주소록에 ‘강남구 청담2동’이라는 다소 이질적인 주소로 자리매김한 이른바 ‘강남 출신’ 소설가가.

물론 그는 대중에게 익숙한 ‘오렌지’가 아니었다. “개발 전부터 살던 원주민이거나 개발 초기에 집값이 싸다는 이유로 들어온 사람들로, 운이 좋은 편이기는 하나 부자라고는 할 수 없”는 재래종인 ‘감귤’로 스스로를 분류한다. 그런 그가 관통했던 90년대의 강남(압구정) 아이들을 묘사한다.

물론, 오해하지 말지어다. 이 소설은, ‘노희준’의 자전소설이 아니다. 되레, ‘우리 모두’의 자전소설이다. 권력이 작동하고, 우리의 욕망이 투사한 환상이 있다. 그 과정에서 소외시키고 소외당하는 우리들이 있다. 차별을 일상적 기제로 삼은 우리가 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도 있다. 뭣보다 이 소설, 우리들이 있(었)다.

그는 ‘강남’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소설을 바라보지 않았으며 하는 바람을 전했다. 강남 문화라 일컬어지는 것들. 많은 부분이 강남에 사는 사람들이 아닌, 강남 바깥의 사람들이 욕망과 선망을 담고, 질시와 경멸을 곁들여 이를 채웠으니까. 그러니까, 이 책은 강남을 다룬 소설이 아니라, 권력의 작동과 문화의 형성을 생각하게 만든 소설에 가깝지 않을까.

사실, 강남 ‘문화’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문화라는 이름으로 지칭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텅 빈 기표로만 채워진, 가진 사람도 그렇지 못한 사람도 만족시키거나 행복감을 느끼게 하지 못하니까. 나는 소설 속 몰주체적 동일성의 공간에서 ‘강북게임’을 하는 아이들에게서, 서늘한 바람을 느껴야했다. “아무리 발악을 해도 강북 애들은 티가 났다. 외모와 옷차림이 그럴듯해도 태도와 눈빛이 달랐다. 지나치게 차려입은 애들은 백에 구십구 딴 동네 애들이었다.”(p.66) 이런 것이 문화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지난 9일, 서울 상수동의 카페 ‘1992 동경맑음’. 그날 동경이 실제로 맑았는지 알 수 없으나, 서울은 맑았다. 『오렌지 리퍼블릭』의 작가 노희준을 만났다. 소설과 글쓰기에 대한 우문을 했고, 때론 음악을 물었는데, 그는 섣불리 대답하는 법이 없었다. 말투는 차분했고, 또박또박했다. 두서없는 말보다 논리적인 글을 만나는 기분이었다. 아마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어서 쓴 소설이었기 때문이리라 나는 멋대로 생각했다. 한편으로 이 인터뷰 기사가 강남에 대한 편견을 강화하거나 변명하는 것으로 읽히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냥 소설일 뿐입니다. 왕따 탈출의 지침서도, 성장에 성공한 자의 후일담도, 잘나가는 방법을 일러주기 위한 비법서도 아닙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 따위의 거짓말로, 특정 시대 특정 인물의 이야기라는 그럴듯한 구실로 변명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사랑해달라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단지 언제나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었을 뿐이라고 말하겠습니다. (p.328)

웹진에서 연재한 작품을 묶어서 펴낸 두 번째 장편소설이고 네 번째 책이다. 우선, 소회가 어떤가.

“소회랄 건 없다. 세 번째까지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약간 우울했다. 이유는 모르겠다. 대개의 작가들은 첫 책을 내고 나서 우울증에 많이 걸린다. 자신의 얘기가 들어가 있어서 그런 것 같다. 그리곤 책을 내면서 괜찮아진다. 자기 얘기로 시작해서 남 얘기로 가니까. 나는 지금까지 (책에) 내 얘기가 들어간 적이 없는데, 이번에는 많이 들어가다 보니 머리에서 첫 책인 줄로 착각했나 보다. (웃음)”

이 소설 집필을 이문재 시인이 적극 추천했다고 작가의 말에 써놨던데, 어떤 계기로 집필하게 됐나.

“이문재 시인 뿐 아니라 동료들이 ‘너는 왜 네 얘기를 안 쓰느냐’고 했다. ‘내 얘긴 문학적인 게 없다’고 하면, 다들 문학적이지 않은 것 같지 않다, 며 써 봐라, 써도 괜찮겠다고 얘기를 했다. 나도 언젠가는 써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시기적으로 맞아 떨어졌다. 그렇다면 내 얘기를 써야 하는데, 무엇을 쓸까, 하던 차에 20년 전 강남 얘기는 아무도 모르고, 의무감으로라도 써야하는 것 아니냐고 생각했다. (동료들에게 과거 얘기를 좀 했나보다) 동료들과 술 마시면서 얘기한 부분도 있고, 친해지면, 이런 저런 얘기를 하게 되잖나.”

강남 출신 작가의 ‘강남 서사’라고 관심을 받고 있다. 최근 문단을 봐도, 『강남몽』 등 강남이나 압구정을 다룬 서사가 심심찮게 나온다. 곧, 『압구정 소년들』이라는 소설도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고. 왜 지금, ‘강남’을 썼고, 강남이 수면위로 떠오르고 있다고 생각하나.

“강남 얘기가 왜 수면 위로 떠오르는지는 모르겠고. 이른바 ‘중심부 문화’라는 게 있는데, 중심부 문화가 형성되는 시점이 있다. 나의 고등학교 때가 그런 시기에 걸쳐 있지 않나 싶다. 강남문화라고 하는 거, 밤 문화라고 하는 거. 이런 것들에서 문화적인 패턴이 생기기 시작할 즈음이었던 것 같다. 형성단계의 것들을 포착하고 싶었다고나할까. 논리를 헤집어보고 싶었다고나할까. 그런 욕심이 있었다. 물론 이건 쓰면서 나중에 생긴 생각이고, 처음엔 내 얘기를 해보자고 시작했다.”

강남이 현실에서 가진 영향력과 달리, 문단에서는 강남을 외계 취급하지 않았나 싶다. 강남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편견 가득한 공격을 받은 경우도 있었다고 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다 옛날 얘기고. 한겨레 기사(<“나는 강남을 질시하는 강북이 무서워”>)가 나간 뒤, 지인들에게 전화를 많이 받았다. 인터넷에 들어가서 봤더니, 악플이 달려 있더라. 문학기사에 악플이 달리는 건, 흔치 않은데. (웃음) 아직도 민감한 문제구나,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지금은 선입견이나 편견 없이 읽어줄 시기가 되지 않았나 싶었는데, 그렇지 않고 민감하게 반응하더라. 왜 아직 이럴까 궁금증이 생겼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가장 큰 요인은 당대 우리 문학을 지배한 진보적 정치성의 상상력에 억압받았기 때문이다. 상류계층 인물을 부정적인 존재로 선규정해 버리는 진보적 정치성의 상상력이 지배하는 문학판에서 그들의 긍정적인 면모는 아예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p.314, 해설 「‘강남’의 욕망, 성장의 서사」 중에서)

지금의 압구정은 예전의 오렌지족으로 대표되는 공간이 아니다. 예전과 지금의 압구정에는 어떤 차이와 비슷한 점이 있나.

“이 소설의 배경인 시기에도 오렌지족이란 말은 없었다. 90년대 압구정을 다룰 때, 문화적 기표로 받아들이거나 외부인의 시선으로 강남이라는 환상의 공간을 상상력으로 채우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이 책은 내부인의 시선으로도, 물론 소설의 주인공은 내부인도, 외부인도 아니지만, 되짚어봐야 하지 않나, 문제를 제기한다. 강남 문화를 비판하겠다는 것도 아니요, 옹호하겠다는 것도 아니다. 이 이야기는, 한 나라의 문화가 이런 식으로 형성돼도 좋은가, 하는 질문을 던지는 거다.

예전과 지금, 대단히 많은 차이가 날 거다. 지금은 안정기이며, 강남 문화도 많이 퍼져나갔다. 그때는 강남에만 있던 놀이문화가 지금은 그렇지 않다. 지금 중국에서 갑자기 갑부가 된 부모를 둔 아이들 놀이문화가 상상을 초월한다고 그러던데, 당시도 그런 면이 있었던 것 같다. 거품경제가 떠오르기 시작할 때의 이야기다.”


90년대 강남 압구정은 변화하는 시대의 가장 극적인 공간 중 하나가 아니었나 싶다. 이슈만큼이나 왜곡과 단절이 지배하기도 했던…

“많은 사람들이 강남이라는 텅 빈 기표를 갖고 환상을 채웠다. 실제로 있건 없건 간에,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오렌지족이니 야타족이 있었다지만, 나는 본적도 없다. ‘야, 타~’하면 차에 탄다는 게 말이 되나? 공간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주인공인 노준우는 스스로 갖고 있는 게 아무 것도 없고, ‘권력에 기생하는 기능인’이라고 자조하지만, 고래가 되고자 한다. 상처 하나 내세울 게 없음도 콤플렉스로 작동하지만, 상처를 만들 줄도 안다. 계급간 갈등보다 이를 넘어서려는 노준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어떤 의도가 있었나.

“이 소설은, 오렌지족이 이렇게 살았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이 소설은, 권력에 대한 이야기다. 오렌지족이고, 강남이고, 아이들로 보면, 잘 보이지 않을 수 있는데, 많은 어른들이 노준우처럼 살고 있다. 심지어 사랑, 우정 할 때도 이런 논리를 들이댄다. 알고 있으니, (이 소설을) 불편해하는 게 아닌가. 즉, 너희들 얘기지. 강남이 뭐 이렇다, 며 거리를 두고 자기는 탈출해서 나오는 너희들 얘기가 되는 거지. 그런 게 아니거든. 순수한 감정이라고 부르는 것, 사랑이나 우정, 예술에도 권력이 개입되면 어떤 일들이 발생하는 가에 대한 이야기다.”

나는 그들과 같은 부류가 아니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나는 감귤일 뿐, 그들처럼 상등품 오렌지가 될 수 없었다. (p.100)

소설은 왕따에서 시작해서 왕따로 끝난다. 그건 평범하게 살다 죽는 것을 무서워하는 노준우의 캐릭터를 보여주는 코드다. 그는 따돌림을 당하기보다 따돌리는 존재 같은데…

“자신만의 무언가를 만들고 싶었을 거다. 아이고, 어른이고, 생활이 한정되다보니 자신만의 문화를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다. 권력에 침전당하고.”

어차피 스물아홉까지만 살다 죽을 거였다. 진정으로 무서운 건 비운의 죽음이 아니라,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다 늙어 죽는 삶이었다. (p.120)

준우는 모든 걸 갖고 태어난 아이들에 대한 증오도 드러낸다. 개천에서 용 나지 않는 시대, 불공정과 불평등이 내재화된 시대에 그 증오는 한편으로 정당해 뵌다.

“90년대에도 개천에서 용 나는 경우는 없지. 대신 개천에서 용 나는 것을 만들어서 선전을 했지. 그런 성공스토리를 통해 당신도 열심히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판타지와 국민의식을 만드는 데 주력하고. 당시만 해도 그러지 않으면 안 됐지만, 지금은 톱니바퀴처럼 돌아가서, 그러지 않아도 될 정도가 됐다.”

내 목적은 킹카가 되는 게 아니었다. 맨몸으로 모든 걸 갖고 태어난 놈들을 이겨보는 거였다. (p.146)

그 무엇도 아닌, 하지만 아무 것도 아니지 않은, un은 청춘의 치기를 극대화하면서 위악을 부리는 것 같아도 그 이면엔 어찌할 수 없는 아픔과 공허가 있다. 외부에 의해 왜곡된 시선에 포착되지 않는 것을 드러내는 것 같다.

“음, 그런 것도 있는 한편, 내가 세련돼서 압구정이나 강남이 아니고, 내가 강남이니 세련된 거라는 역전된 태도 같은 거. 즉, 선민의식이랄 수 있는데, 그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게 한 면이고, 사실 노준우가 애매한 인물이다. 속물이 되기도 싫지만, 주변의 속물 친구를 통한 이득을 포기할 수도 없고. 둘을 버무려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드는데 친구를 동참시키는 이야기다. 그냥 순응도 싫고 순응 안하자니 못 살겠고.”

무엇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정치가나 기업가나 의사나 검사나…… 어른들이 훌륭하다고 말하는 것에는 취미 없었다. 잘나간다는 미명하에 평생을 고리타분하게 살아가는 바보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남고 싶지는 않았다. 한참을 궁싯거리다 ‘un’이라는 접두어를 떠올렸다. 그 무엇도 ‘아닌’, 하지만 아무것도 아니지는 ‘않은’. (p.172)

1990년대 강남을 구체적으로 재현하면서 가장 어려운 점은 뭐였나.

“심리적인 것. 인물들의 세세한 심리를 표현하는 게 쉽지 않았다. 소설 쓸 때, 죽는 줄 알았다. (웃음) 이야기에 심리를 묻혀서 전달해야 한다는 게 힘든 일이 아니었나 싶다. 또 하나 힘든 건, 사실(팩트)을 허구화시켜야 한다는 것. 사실이 굳건히 서 있으니 어떻게 허구화해야 하나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사실에 휘둘리다보니, 조금 까다롭게 썼다.”

이번 작품, 얼마나 걸렸나

“첫 작품은 항일 빨치산 얘기를 다뤘는데, 6개월 만에 썼다. 이번 작품은, 1년 넘게, 16개월 정도 걸렸다. 아직까지 만나는 동창이 2명 있는데, 그 친구들이 많이 도와줬다. 20년 전이다보니 가물가물하더라. 친구들에게 전화해서 그때 거기가 어디였지, 하고 물었다. 장소나 그때 있었던 일들. 마찬가지겠지만, 주변 학교의 에피소드 등을 얘기하면서 그런 일도 있었지, 하며 떠올리기도 했다.”

이야기가 실재 아니냐는 질문을 엄청 받았을 것 같다.

“감당해야 할 일이다. 내 얘기는 아니나, 내 얘기로 읽어도 소설이고, 그렇지 않아도 완전 픽션(허구)은 아니다. 처음부터 감당할 생각이 없으면 안 썼을 것이다. 자전소설은 아니다.”

‘공산당 선언’, 재밌고 흥미롭더라. 강남 상류층 자제들이 선언하는, 공산주의, 평등주의, 실천주의가 묘한 아이러니도 불러오고.

“강남 아이들이 그랬던 게 아니고, 준우가 이념을 갖고 노는 거다. 자기목적에 맞춰서 조작하는 거지. un이라는 그룹도 오리진(origin)을 조작한다. 이런 건, 국가도 비일비재하게 하는 일이다. 정통을 형성하려고. 정통성이 없으면 허구에 관심이 많아진다. 80년대가 물리적 폭력의 시대였다면, 90년대는 상징권력으로 넘어갔다. 그것이, 사람들에게 주어진 대로 살수 밖에 없게 만드는 새로운 권력으로 등장했다. 상징권력이 작동하는 기원이자 시작점에 이 친구들이 있었던 거다.”

세상에는 없는 공산당을 창조할 것이다. 굳이 설명하자면 ‘소수정예의 부르주아 공산당’이고자 한다. 공산(共産)이란 무엇이냐. 정신뿐만 아니라 물질 또한 나누는 것이다. (p.208)

세상의 도둑질을 사라지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 준우가 제시한 것은 강남의 지배적 정서와 동떨어져 있다. 바람직한 체제라고 생각하는 게 있나.

“바람직한 체제라고 생각하는 게 있다면 학자여야 하겠지. 난 작가니까, 이건 뭔가 잘못되지 않았나, 하고 질문을 던지는 거다. 세상을 바꾸는 건 내 몫이 아니다. 문화라는 것은 즐기기 위해 만든 거다.

나는 귀족문화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귀족문화라고 했을 때, 가장 치사하고 저급한 귀족문화가 돈 없는 사람이 향유할 수 없다고 말하는 거다. 공부 많이 하고 소양이 높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을 거야, 라고 말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의 귀족문화가 소양 높은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것인가.

문화라는 건 모든 사람을 즐겁게 해줘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존재 이유가 없다. 강남을 다룬 소설도 봤지만, 그건 강남을 다루는 게 아니라 대한민국 소비문화를 다루고 있다고 생각했다. 도시 문화를 보면 명품 문화로도 상징되는데, 가지지 못한 사람은 가지지 못해서 박탈감을 느끼고, 가진 사람도 콘텐츠가 있는 것도 아니고… 쓸모없는 기표만 소유해서 텅 빈 거지. 이런 문화는 서로를 즐겁게 만드는 문화가 아니다. 이런 건 제대로 된 문화가 아니다.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웠다. 문화가 다양한 성향을 충족시키는 게 아니라 많은 사람을 배제하고 상처주고, 심지어 문화적 기표를 소유한 사람들조차 허망함을 느껴야 하다니. 아무도 행복하지 않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나는 썼다. 한국에 있는 도둑을 죄다 감옥에 가둬도 똑같은 수의 도둑이 다시 생겨날 거라고. 도둑질은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사회의 책임이라고. 그러므로 도둑을 없애려면 부짓집의 담벼락부터 허물어야 한다, 부잣집 마당에서 그들을 재워주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충분히 나눠주면 세상의 도둑질은 사라지리라. (p.12)

성장소설로 분류할 수 있을 것 같다. 간혹 드러나는 후일담은 그들이 1990년대를 관통해 지금의 강남을 형성하고 있으리란 생각을 들게 한다. 아직 그들의 성장담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느낌도 있다. 혹시 계속 이어질만한 연작을 계획하는 것이 있나.

“이어지려면 대학 얘기를 써야하는데, 먼 세월이 지나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럴 생각이 없다. 다른 작가들이 다 썼고, 나는 안 쓸 거 같다. 80~90년대 후일담 문학으로 캠퍼스가 많이 다뤄졌는데, 그것을 소재로 쓰진 않을 것 같다.”

『혼불』의 작가 최명희 씨를 묘사한 대목이 나온다. 실제로 있었던 일 같은데…

“맞다.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그런 걸 허구로 쓰면 안 된다. 본적이 있다. 레스토랑에 가끔씩 와서 하루 종일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녀는 내가 실제로 본 최초의 소설가였다. 그녀를 보면서 나는 소설만은 쓰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귀신에 홀린 사람 같았다. 이 세상이 아니라, 자신이 창조한 소설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담배를 필터까지 빨아들일 때마다 나는 한 인간의 영혼이 작품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p.62)

곳곳에 배치된 음악도 다양하다. 푸르니에(무반주 첼로) 등 클래식부터 팝, 대중음악까지 장르도 다양하고 취향도 반영된 것 같다. 이 소설을 음악으로 표현한다면, 어떤 곡을 꼽고 싶나.

『오렌지 리퍼블릭』주제곡을 만들었다. 록버전으로. 아는 작곡가가 기본을 만들고 나는 멜로디와 가사를 입혀서 만든 곡이다. 이어 소프트록이나 재즈발라드 장르로 또 한곡을 만들 거다. 록버전으로 만든 곡은, 11월30일에 홍대부근의 클럽 프리버드에서 출간기념 콘서트를 하는데, 그때 공개할 거다. 또 다른 버전은 만드는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


작가 밴드 ‘말도안돼’의 보컬을 맡고 있다. 노래한다는 것, 음악을 한다는 것, 노희준에겐 어떤 의미인가.

“재밌게 놀자는 의미다. 다른 친구는 모르겠지만, 음악을 하겠다고 시작한 게 아니다. 동료들과 술 먹고 노래방 가는 것도 지겨웠고, 우리가 모여서 악기 갖고 놀다가 술 마시러 가서 연주하고 그러자. 이렇게 시작한 거다. 소문이 퍼져서 공연이 잡히고, 예상치 못한 일들이 생겼다. 공연하려? 밴드를 만든 건 아니다. 공연 할 수 있는 준비나 실력도 안 돼 있고. 잘 한다기보다 못하는 애들이 하니까, 재밌다, 이런 반응인 거지.

(독자와의) 접근성도 쉬웠다. 세 번째 책을 냈을 때, 박상과 독자만남을 같이 했다. 그런 생각이 들더라. 독자들과 만나서 즐거우려면 직접 공연하는 건 어떻겠나. 북콘서트를 할 때 우리가 직접 공연해주자. 어차피 북콘서트를 할 거, 공연 형태로 가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음악을 하겠다고 만든 건 아니지만.”


음악과 글 쓰는 것과 차이가 있다면.

“음악은 퇴고가 안 된다. 관객들과 바로 앞에서 호흡하는 직접적인 측면이 강하다. 음악은 시간 예술인 반면, 소설은 시간 예술이 아니다. 노래는 시작해서 끝까지 가야한다. 음반도 있지만, 노래를 할 때 그 당시의 현장성도 좌우되고, 혼자 할 수 없다. 소설은 혼자 쓰는 것이 가능하지만.”

음악 할 생각도 있었나.

“어렸을 때, 합창단을 했다. 변성기 때 목을 잘못 놀려서, 변한 목소리로는 들어갈 데가 없었다. 바리톤도 아니고 테너도 아니고. 노래를 계속 할까 생각도 있었는데, 포기했다. 고등학교 때는 미술을 하다가 그것도 관두고. 국문학과도 갈 생각이 없었다. 소설도 우연히 접했다. 대학 때 처음 소설을 썼는데, 그런 생각이 들더라. 이것까지 포기하면 안 되겠다. 두 개나 포기했는데… (웃음)”

그래서인가. 정호웅 평론가는 음악 또는 미술과 관련된 예술가소설을 기대해도 좋을 듯싶다고 하더라.

“그게 신기했다. 지금 쓰고 있는 단편이 쟁이들 이야기다. 사진작가 편은 하나 나갔고, 그 다음이 글을 쓰려고 하는 친구 이야기가 나오고, 미술 하는 친구 이야기도 쓰려고 하고. 그 ‘쟁이’는 예술가는 아니고, 예수쟁이, 차력쟁이도 들어가는데, 그런 쟁이를 모은 창작집을 구상하고 있다. 몇 년 뒤에나 나오겠지만, 그러던 차에, 정호웅 평론가의 말씀을 보고 깜짝 놀랐다.”

글 쓸 때 주기적으로 쓰는 편인가, 징크스 같은 게 있다면.

“오전에는 산책이나 운동을 한다. 점심을 먹고 작업실에 가서 2시경부터 10~11시까지 작업을 한다. 중간에 밥도 먹고. 분량은 원고지 5장정도? 쓰기는 한 10장정도 쓰는데, 다음날 되면 많이 없어진다. (웃음)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그렇다.

글이 잘 안 써지면 손톱을 기른다. 대학원과 직장을 다니고, 등단도 해서 소설을 써야겠다는 압박이 있던 시절이 있었다. 잠을 4~5시간밖에 못 잤다. 사람이 강제적으로 주어진 일과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이 동시에 생기면, 대개 스스로 하고픈 일을 못한다. 넋 놓고 보면 한 두 달이 지난다. 그래서 손톱을 길렀다. 손톱을 한 달 여 기르면 거동이 불편해진다. 이 손톱을 깎으려면 빨리 써야한다”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이런 바람이 있다. 이 소설을 한때, 돈 있는 애들이 이랬다더라, 가 아니고 상징권력에 대한 이야기로 읽어줬으면 좋겠다. 아이들이 하는 행위도 행위지만, 행위를 하기까지의 심리, 상징권력에 대한 것들, 공포, 불안, 정체성에 관련된 것을 읽어줬으면 좋겠다. 강남 얘기다, 강남을 비판하느냐, 옹호하느냐를 벗어나서, 이야기를 이야기로 읽어줬으면 좋겠다.

강남인 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디에든 있는 얘기고, 90년대 강남에서 있었던 일들이 지금은 굉장히 많은 곳에서 일상이 됐다. 휴대폰을 모든 사람이 가진 문화가 됐고, 가라오케가 노래방으로 퍼졌다. 문화는 그런 식으로 확산되는 경향이 있다. 보편화되고 저렴한 형태로 확산되는데, 그래서 문화를 처음 접하고 만드는 사람들이 잘 해야 한다.”




#노희준 #오렌지 리퍼블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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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 동훈

2010.11.23

귀족문화라고 했을 때, 가장 치사하고 저급한 귀족문화가 돈 없는 사람이 향유할 수 없다고 말하는 거다. 공부 많이 하고 소양이 높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을 거야, 라고 말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의 귀족문화가 소양 높은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것인가. - 작가의 이 말이 인상 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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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준수

커피로 세상을 사유하는,
당신 하나만을 위한 커피를 내리는 남자.

마을 공동체 꽃을 피우기 위한 이야기도 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