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강연회]정말로 당신이 원하는 것? 무의식 속에 숨어 있다 - 『내 안의 아바타를 찾아서』 최준식
삼청동 골목 깊숙한 곳에 아늑한 터를 낸 한옥집. 북성재에서 최준식 교수님과 독자들, 이야기를 나누었다. 심리학에서 최면까지 말이다.
글ㆍ사진 채널예스
2010.04.30
작게
크게
책에 대한 오해 하나. 한창 <아바타>가 한국을 들썩일 무렵 출간된 이 책, 나는 사실 이 책이 영화 관련 서적인 줄만 알았다. 부제인 ‘최준식의 최면 이야기’를 발견할 때까지 말이다. ‘아바타’란 영화 제목이기 이전에 인도어로 지상에 나타난 신의 분신, 화신을 뜻한다. 이 화신은 모든 사람의 내면에 있는 신성을 뜻하기도 한단다.

강의에 대한 오해 하나. 최면이라고 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레드 썬! TV (그것도) 예능 프로그램으로 접해 왔던 최면의 모습이 전부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최면에 대해 미심쩍은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것이 최준식 교수님이 말씀하셨던 편견 고질병!). 종교학을 전공하신 한국학과 최준식 교수님의 최면 강의라, ‘그러니까 나는 최면에 관심이 없는데(=최면에 걸리고 싶지 않은데)’라는 선입견을 안고 4월 2일 강의가 열린 북성재를 찾아갔더랬다.

만약 특별한 인연으로 최면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대부분 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을까? 그래서 더 의미 있었던 이날의 강의, 물론 현장에서 최면을 걸거나 걸리거나 하지 않았고(“제가 최면을 하지는 않을 겁니다. 어차피 지금도 최면에 걸려 살아가는 사람이 많으니까”라는 의미심장한 최 교수님의 말씀), 최면술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지도 않았다. 다만 최면에 대한 오해를 걷어 내고, 최면이 어떤 것이고,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있는 시간이었다.

언제부터 우리는 심리학을 이렇게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게 되었을까? 문득 생각해 보니 심리학은 삶에 친근하고 가까운 학문이 되어 있었다. 우리는 특별한 문제가 없이도 심리학 서적을 펼쳐 읽고, 요즘은 일반인도 심리학의 전문 분야에 어렵지 않게 접근한다. 아마 ‘원래’ 그랬던 것은 아니었으리라. 지금 최면에 대해 우리들이 갖고 있는 낯섦, 미심쩍음, 혹은 오해가 심리학에도 있었을 것이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자꾸 이야기하고 풀어쓰면서 익숙해진 것일 테다.

최면도 심리학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우스갯소리를 하듯 최면이 전생을 찾거나, 내 속에서 다른 기억, 목소리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었다. 최면 역시 무의식에 감춰진 진짜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고, 그것이 바로 내 안의 아바타를 찾아가는 여정인 셈이었다. 삼청동 골목 깊숙한 곳에 아늑한 터를 낸 한옥집. 북성재에서 최준식 교수님과 독자들, 이야기를 나누었다. 심리학에서 최면까지 말이다.

나는 주체적인가? 나는 자유로운가?


역사를 전공하신 최준식 교수님. 어느 날 ‘삶은 괴롭다’는 명제에 ‘왜?’라는 질문을 던지신다. 이 근본적인 질문이 그를 종교학으로 이끌었다. 인간은 왜 불행한가? 그가 찾아낸 답은 이랬다. “인간이 비주체적으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깐. 스스로 한번쯤 생각해 보자. 나, 당신, 우리. 과연 주체적으로 살고 있는가? 물론 그 누구도 자기 맘대로만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은 전제로 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삶은 내 선택과 의지가 작동하고 있는가? 그렇습니까? 어느 정도는, 그렇지 않을까? 하지만 최 교수님,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내 가치관이 엄밀히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어릴 때부터 세뇌받아온 것이고, 사회 편견과 선입견에 둘러싸인 것들이다.” 강의를 시작하면서, 우리 모두는 최면 상태라고 한 말은 이러한 뜻.

우리가 어떤 것을 좋아하고 어떤 것을 싫어하고 하는 등의 태도나 가치관이 사실은 주입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부모나 자기가 속한 사회 혹은 집단에서 주입한 대로 사는 게 우리라는 것이다. 자신이 확고한 주체성을 가졌다고 믿는 망상과 함께 말이다. 우리들은 모두 자신이 택한 삶을 주체적으로 산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상은 이렇듯 ‘그 무엇’인가에 의해 주입된 가치관에 따라 살고 있는 것이다.(p.47)

이를테면 『장자』에 나오는 이런 얘기. 하루는 노자가 산에 사는 광성자(廣成字)를 찾아갔다. “도가 무엇이냐?”는 노자의 질문에 광성자 대뜸 이렇게 말씀하신다. “당신은 혼자 와서 묻지 왜 여러 사람들하고 같이 왔는가?” 혼자 온 노자. 당황스럽다. 그때 광성자의 말, 이러하다. “당신 머릿속에 있는 사람들의 생각을 말하는 것이다. 당신이 비록 혼자 오긴 했지만 머릿속에는 다른 사람들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으니 다른 사람들과 같이 온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다른 사람들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한, 내가 무엇을 가르쳐 줄 수 있겠는가?”

비슷한 얘기가 불교의 선가에도 있단다. 이번에는 대학교수다. 선사에 찾아간 대학교수. “선에 대해 가르쳐 주십사” 청했다. 그때 대답 없는 선사. 묵묵히 찻잔에 물만 부으셨단다. 넘쳐도 아랑곳없이 물을 붓는 선사에게 교수가 ‘물이 넘친다’고 외치자 날리신 일갈. “선을 가르쳐 주려 해도 당신 마음이 이 찻잔처럼 꽉 차 있는데 어떻게 선에 대해 말해 줄 수 있겠소?” 고로, 차라리 비어 있는 것이 깨어 있는 것이라는 얘기. “일상에서 편견과 선입견을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자유로운 척하는 사람은 많이 봤지만, 진짜 자유로운 사람은 못 봤다.”

일상은 편견과 고정관념으로 둘러싸인 감옥 없는 창살! 이 창살을 뜯어내고 멀쩡한 하늘을 볼 수 있는 자가 자유롭고 행복할 것이란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선 창살이 있다는 것을 아는 일이다. 모든 병의 치료는 인정하는 데에서부터 시작되니까.” 각자의 창살, 각자의 질병을 확인할 수 있는 법이 있다. “사람들은 으레 자신의 문제를 외부로 투사시킨다. 다른 사람을 보면서 내 문제를 지적한다. 나의 어두운 면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혹시 주위에 까닭 없이 미운 사람 없나?” 그것이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 그런 작업을 통해서도 우리는 ‘자신’의 본 모습을 찾아 나갈 수 있다.

지배와 복종에 대한 욕망,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한때 이런 카피가 유행했었다. “모두가 ‘Yes’ 할 때, ‘No’ 할 수 있는 사람.” 모두가 자장면 먹을 때, 탕수육 먹고 싶다고 하기 어려운 것만큼, 사회 속에서 다른 사람과 반대 의견을 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미국의 저명한 사회심리학자인 솔로몬 애쉬, 1955년에 ‘선분 맞히기’ 실험을 통해 사람들의 동조 현상에 대해 괄목할 연구 업적을 남겼다. 실험은 간단하다. 하나의 선분을 보여 주고, 예시로 길이가 제각각인 세 개의 선분을 제시한다. 그리고 같은 길이의 선분을 찾아내라는 것. 한눈에도 찾기 쉬운 정답이지만, 만약 다수의 협조자들이(말도 안 되는) 엉뚱한 선분을 골랐을 때, 피실험자는 세 명의 한 명꼴로 틀린 답을 제시한다. 심지어 그들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말했다”고 실토하기까지 했단다. 이렇게 집단의 의견을 맹목적으로 좇는 행위를 심리학에서 동조 현상이라고 부른다.

집단 속에서 세뇌나 동조 현상은 쉽게 일어나는 일이다. 역사 속에도 이런 사례가 빈번했다. 신흥 종교 집단의 자살 사건, 북한 사회의 김일성 숭배, 2차 세계대전 때 히틀러와 독일의 나치들이 행한 일 등이 그러했다. “아이히만은 전쟁이 끝난 뒤 전범재판에 나와 납득할 수 없는 증언을 한다. 즉 자신은 유태인을 죽이지 않았고 이와 관련해서 한 점의 잘못도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아이히만은 더 나아가서 자신은 다만 받은 명령을 수행한 것뿐이고 그 명령을 제대로 이행한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낀다는 믿을 수 없는 진술까지 했다.”(p.93) 과연 이 사람들의 이야기일 뿐인 걸까? 최준식 교수님은 이런 사람들이나 집단들만 이런 경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이런 욕망이 발현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지지 않았을 뿐, 누구나 맹목적인 지배와 복종에 대한 강한 욕망을 갖고 있다. 굉장한 지성과 용기가 아니면 이런 상황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렇다면 이런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좋은 것은 매순간 깨어 있는 것이다. (…) 낮은 수준이라도 좋으니까 깨어나 있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려면 자기 자신을 자꾸 의식해야 한다. 자신을 계속해서 객관적으로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일상생활 속에서 어떤 행동이나 생각을 하든지 아무 생각 없이 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내가 하고 있다고 의식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p.118)

현재에 있으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누군가에게 휘둘리지 않고 스스로 설 수 있는 순간에 인간은 행복을 느낀다. 인간은 그런 존재다. “자아실현을 하기 위해서는 가장 좋아하는 일을 찾아내야 한다. 좋아하는 일이란, 어떤 일을 할 때 아무 이유나 목적 없이도 즐겁고, ‘내가 왜 이런 일을 하지?’라는 의심이 들지 않는 일이다. 어떻게 찾을 것인가? 경험을 많이 하면서 시행착오를 겪어야 한다.” 우리가 좋아하는 일을 못 찾는 이유? 주위의 간섭 때문이다. 내 의식을 불투명하게 덮고 있는 세상의 생각과 이미지들. 거기에는 부모님의 장막도 포함되어 있다.

최면에 관한 오해들

그래서 최준식 교수는, 무의식에서 답을 찾고자 한다. 드러나 있지 않아 훼손되어 있지 않은 무의식에 진짜 우리가 원하는 것이 담겨 있다는 것. 무의식과 만날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잘 알려져 있듯 ‘꿈’이다. “꿈을 통해서 우리는 무의식을 알 수 있다. 다만, 꿈을 해석하는 일에는 훈련이 필요하다.” 꿈은 잊혀진 언어다. 최준식 교수의 말에 의하면, 중요한 일은 꿈에 나오기 마련이고, 꿈속에 등장하는 인물은 대개 자신인 경우가 많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하루의 1/3, 그리고 매일 잠을 자고 꿈을 꾸지만 쉽게 알아채기 어렵다.

무의식을 깨닫는 데 다른 사람의 도움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최면이다. 프로이트는 ‘최면을 경험해 본 사람은 무의식을 의심하지 않는다’고 했다. “최면이라고 하면, 조종이라느니, 거짓이라느니, 방송 쇼라느니 오해가 많다. 최면이란, 무의식을 끌어올려, 의식을 통해 무의식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최면 상태에 빠져 있음에도, 최면술사의 질문에 곧잘 대답한다. 이것은, 최면 상태에도 의식이 꺼지지 않기 때문이다. “의식이 살아 있기 때문에, 걸러서 말한다. 비밀을 다 폭로할까 걱정하는 사람도 있는데 본인에게 나쁜 얘기는 하지 않는다. 최면에 들면 주의 깊고 수용적인 집중 상태가 된다. 자신의 자율성을 부분적으로 최면사에게 양도하는 것이다. 모든 최면은 자기 최면이다. 최면사는 암시만 할 뿐이다.” 때문에, 최면에 걸리면 최면사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하게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오해다. “최면이란 최면사가 혼자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양자의 관계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어느 한쪽이든 최면을 거부하면 걸리지 않는다.”(p.195)

저명한 최면술사도 여럿 있지만, 최면 의학계의 진정한 도인으로 불리는 밀턴 에릭슨의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각각의 내담자를 만날 때마다 새로운 이론과 새로운 접근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말했던 밀턴 에릭슨은 최면을 치료의 차원이 아니라 각 개인의 잠재력을 실현시킬 수 있는 수단으로 생각했다. “무의식은 우리가 살면서 지녔던 생각이나 감정, 행동 등을 송두리째 저장하고 있는 거대한 창고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고 행한 모든 것이 의식에 저장되기에는 의식의 용량이 너무 작기 때문이다. (…) 에릭슨은 인간이 무의식 안에 갖고 있는 거대한 자원을 탐색하고 이용할 수 있는 최고의 수단이 바로 최면이라 믿었다.(p.224)

최준식 교수님이 대표로 있는 단체이자 “인간의식 발달에 관심이 있는 소수의 사람들과 함께 시작”(p.6)한 ‘인간의식연구센터’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활동하고 있다. 무의식을 통해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 내기. 위에서 언급한 대로 우리는 결코 사회의 고정관념과 편견의 울타리를 벗어날 수 없지만, 뜻이 맞는 공동체를 만들어 좋은 분위기를 퍼트리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더불어 우스갯소리로, “가수 2AM의 「죽어도 못 보내」라는 노래가 히트했는데, 이것은 초기 1차 관계를 실패한 사람들에게 보이는 증상이고, 누구나 그런 경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공감한 것”이라며 우리 내면세계에 관찰과 관심을 가질 것을 당부했다. 내 안에 아바타를 찾아서. 진정한 행복을 찾기 위해서 말이다.

자신이 진정으로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면 즐거움만 있을 뿐 그 일을 하는 사람이나 그 일은 없어진다. (…)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해지는 길은 자신을 초월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자신을 찾아야 한다. 자신을 찾지도 않은 상태에서는 초월할 상대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우리들은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한 채로 살고 있기 때문에 초월의 상태로 넘어가는 일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우리 자신을 찾는 일이다.(p.260)

#최준식 #내 안의 아바타를 찾아서
3의 댓글
User Avatar

prognose

2012.05.09

내안의 나를 잘 알고 있고 내가 좋아하고 원하는 일을 한다해도 그것이 남들이 그다지 좋게 보는 일이 아니라면 계속해서 그 일을 하기는 힘들어지죠. 내 자신 아는 것부터도 힘든데.
답글
0
0
User Avatar

앙ㅋ

2012.03.25

내안의 나를 잘알고 있다해도 거울에 비춰보이지 않는 무의 식의 나를 꺼내보는 일이 쉽지만은 안죠. 글쓰기가 자신으 내면을 비춰보는 수행이 된다고 하던군요. 스스로의 한계를 초월하기에 자신을 찾아야한다. 각종 첨단기기에 둘러쌓여서 쉴새없이 쏟아지는 정보와 문자를 외면하는 일부터 해야 겠네요.
답글
0
0
User Avatar

jeongs3

2010.05.06

최면은 선잠에 들었을때 누가 말시키면 대답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해왔는데 자신에게 불리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니 재미있네요. 매일의 일상과 결부된 의식의 껍질이 너무 단단해서 그 껍질을 깨고 본인이 진짜 인생에서 원하는 바를 스스로 찾아내기란 쉽지 않은일인데 최면이 도움이 될 수가 있겠네요. 리뷰 잘 읽었습니다^^
답글
0
0
Writer Avatar

채널예스

채널예스는 예스24에서 운영하는 콘텐츠 플랫폼입니다. 책, 영화, 공연, 음악, 미술, 대중문화, 여행 등 다양한 이야기를 만나 보세요.

Writer Avatar

최준식

이화여자대학교 명예교수이며, 국내 죽음학 연구의 선구자이자 종교학자이다. 서강대학교에서 역사학을 전공하고 미국 템플 대학교 대학원에서 종교학을 전공했다. 1992년에 이화여자대학교 국제대학원 한국학과 교수로 부임하면서 한국 문화에 대해 폭넓은 공부를 시작했다. 1990년대 중반에 ‘국제한국학회’를 만들어 김봉렬 교수, 고 오주석 선생 등의 동학들과 더불어 한국 문화를 다각도로 연구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사단법인 ‘한국문화표현단’을 만들어 우리 예술 문화를 공연 형태로 소개하는 운동을 해오고 있다. 2013년에는 한국 문화가 중심이 된 복합문화공간인 ‘한국문화중심(K-Culture Center)’을 만들어 한국 문화 전반을 대중들에게 알리는 일을 하고 있다.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한국의 고유 종교들을 연구해 종교학의 저변을 넓혔고, 죽음학의 불모지였던 국내에 한국죽음학회를 발족하여 많은 연구 성과를 내놓았다. 이를 통해 인간의 죽음과 무의식, 초의식, 전생, 사후세계 등과 같은 주제를 학문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기반을 다졌다. 주요 저서로 『한국 문화 교과서』, 『한국의 종교, 문화로 읽는다』, 『다시, 한국인』, 『한국 음식은 ‘밥’으로 통한다』, 『예순 즈음에 되돌아보는 우리 대중음악』, 『한국 문화 오리엔테이션』, 『한 권으로 읽는 우리 예술 문화』, 『종묘대제』, 『경복궁 이야기』, 『너무 늦기 전에 들어야 할 죽음학 강의』, 『한국 종교사 바로 보기』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