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삶에서 뭔가가 영영 훼손된 이후의 서사와 음향
『해변의 카프카』는 자신의 삶에서 무엇이 어떻게 훼손됐으며 사랑했던 한 사람을 어떤 식으로 영원히 기억하는지 보여주기 위해서 쓴 기나긴 이야기인 동시에 그게 왜 불가능한지 말하는 소설이다.
글ㆍ사진 11
2009.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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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인생은 스무 살 때 끝났습니다”라는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온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나는 그게 누구의 목소리인지 금방 알아차린다. 그건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짙은 어둠 속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목소리는 계속 이어진다.

“그 뒤의 인생은 끝없이 이어지는 후일담 같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둡고 구불구불한, 아무 곳으로도 통하지 않는 긴 복도 같은 것이에요. 그러나 저는 그런 나날을 살아가야만 했습니다. 공허한 하루하루를 덧없이 받아들이고, 공허한 채로 보내는 것뿐입니다. 그런 나날을 보내면서 저는 많은 잘못을 저지르기도 했지요. 아니, 솔직하게 말하면, 저는 거의 잘못된 일만 했던 것 같은 느낌마저 듭니다. 어떤 때는 저는 혼자 안쪽에 틀어박혀 살았지요. 깊은 우물 밑바닥에서 혼자 살고 있는 것이나 같았습니다. 밖에 있는 모든 것을 저주하고 모든 것을 증오했어요. 어떤 때는 밖으로 나가 남들처럼 사는 척하기도 했습니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무감각하게 세상을 살아왔습니다. 많은 남자들과 자기도 했습니다. 어떤 때는 결혼도 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은 의미가 없는 짓이었어요. 모든 것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리고, 뒤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죠. 내가 더럽히고 훼손한 것들의 상처 자국만이 몇 개 남았을 뿐입니다.”

내가 아는 한, 자신의 삶을 이런 식으로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뿐이다. 스무 살 때 이미 인생이 끝나버려 그 뒤의 인생은 끝없이 이어지는 후일담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 사람. 어쩌면 어린 시절부터 한 몸처럼 붙어 지내던 남자친구 키즈키가 자살하면서 이미 죽어버린 사람. 그러니까 『상실의 시대』의 나오코. 하지만 지금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올 리는 없지 않은가? 나는 의아스럽게 생각한다. 나오코 역시 죽은 지 오래됐으니까. 그렇다면 이건 환청일까? 그녀가 죽은 지도 벌써 한 20년은 지나버린 듯하다.

한 20년 전이라. 그때 나는 대학교 신입생이었고, 서울 명륜동의 한 골목길에 있는 한옥집 문간방에서 살고 있었다. 담장 너머가 바로 문과대 건물이어서 오히려 매일 늦잠을 잤고, 그래서 매일 지각했다. 가끔 술을 마신 다음날이면 아주 늦게, 그러니까 정오를 넘겨 오후에 깨어날 때도 있었는데, 그럴 때면 그 담장 너머로 풍물패가 두들기는 꽹과리 소리나 북소리 같은 게 들리기도 했다. 그 무렵에 나는 벌써 인생을 다 산 것 같은 느낌을 가졌다. 그건 『해변의 카프카』에서 오시마가 고무라 도서관에 대해서 말한 것처럼 “무척 견고하고, 개별적이고, 특별한” 시절의 일이다. 웬일인지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 소설을 읽고 있으면 그 시절의 일들이 떠오른다. 이건 좀 이상한 일이다. 왜냐하면 『해변의 카프카』는 몇 개의 가설로 건설한 메타포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소년 카프카: 가설만 있으면 세상은 모두 연결된다

앞에서 인용한 대사는 이 소설의 후반부 사에키가 마침내 고무라 도서관까지 찾아온 나카타에게 하는 말이다. 사에키는 열다섯 살 주인공 소년 다무라 카프카가 찾아간 고무라 도서관의 관장이며 나카타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뭔가에 의해 공격을 받아 실신한 뒤 기억이 상실된 노인이다. 전혀 관련이 없을 것만 같은 이 세 사람은 다음의 가설에 의해 강하게 연결된다. 즉, 사에키는 누나와 함께 네 살이던 카프카의 곁을 떠난 어머니이며, 나카타는 카프카를 대신해서 그의 아버지를 살해하는 또 다른 자아다. 이건 소설이 끝날 때까지 확인이 불가능한 가설이다. 하지만 이 가설은 『해변의 카프카』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다.

하루키의 오랜 팬에게 『해변의 카프카』는 거대한 놀이공원과 같다. 디즈니랜드에 가면 미키마우스가 있는 것처럼, 이 하루키 월드에는 고양이가 등장한다. 이게 만약 거대한 놀이공원 하루키 월드라면 이 소설을 사실의 세계로 받아들이는 일처럼 곤란한 건 없다. 사실의 세계는 어딘가 다른 곳에 있다. 어쩌면 하루키 월드의 담벼락 너머에. 하지만 일단 이용권을 끊고 들어온 이상, 여기는 전적인 허구이자 완전한 판타지의 세계다. 세상의 모든 놀이공원과 마찬가지로 여기서 맛보는 즐거움은 일시적이라 금방 잊어버?다. 하루키는 『해변의 카프카』가 매번 새로운 작품처럼 읽히기를 원했는데, 그런 점에서 그는 성공한 셈이다.

이 소설이 매번 새롭게 읽히는 까닭은 『해변의 카프카』란 가설에 기초해서 세운 허구와 판타지와 메타포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 허구와 판타지와 메타포를 추억이라고 고쳐 말할 수 있다. 그러니까 스무 살 무렵의 기억들. 우리가 어렴풋하게나마 이 세계는 둘로 이뤄져 있다는 사실에 눈 뜨기 시작하던 그 무렵의 일들. 우정과 사랑의 빛 이면에는 폭력과 섹스의 어둠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무렵의 일들. 우린 그 무렵 최초로 사랑이라는 걸 해보게 될 것이며, 그 사랑은 행복인 동시에 고통이라는 걸 깨닫게 될 것이다. 그 시절을 다시 기억하는 일은 사에키가 나카타에게 말한 것처럼 이중적이다.

“추억이란 당신의 몸을 안쪽에서부터 따뜻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당신의 몸을 안쪽으로부터 심하게 갈기갈기 찢어놓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 시절은 사랑의 시절인 동시에 폭력의 시절로 추억된다. 이 세계가 터프하다고 한다면, 바로 이런 점에서 터프하다. 사에키는 마지막으로 헤어지기 직전에 카프카에게 “내가 다무라 군에게 원하는 건 단 한 가지뿐이야. 나를 기억해주는 것. 다무라 군만 기억해 준다면, 다른 모든 사람이 다 나를 잊어도 괜찮아”라고 말한다. 이렇게 망각 속으로 사라진 사람들을 기억하기 위해서 카프카는 가설을 세운다. 예컨대 자신은 아버지를 죽이게 된다거나, 사랑하는 여인은 근친이라거나. 아마도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을 가장 적합하게 설명하기 때문에 카프카는 그런 가설을 끌어들이는 것이리라.

왜 열다섯 살 카프카인가는 물음에 대해 하루키는 이렇게 대답했다. “열다섯 살이라는 연령대에는 희망과 절망 사이를 격렬하게 왕래하고, 세계의 현실성과 비현실성 사이를 빈번하게 왕래하며, 신체는 도약과 실추 사이를 반복하기 일쑤입니다.” “내 생각으로는 그 소년의 많은 부분은 바로 나 자신인 것이며, 그리고 또 독자 여러분 자신들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열다섯 살 소년이라는 것 역시 희망과 절망, 현실성과 비현실성 사이를 빈번하게 왕래하는 인간에 대한 메타포인 셈이다. 그렇다면 열다섯 살 카프카의 원관념인 ‘바로 나 자신’과 ‘여러분 자신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일까? 그리고 이 모든 사건들의 의미는 또 무슨 뜻일까?

소년 A: 우연한 일들은 서로 연결되면서 의미를 지닌다

라디오헤드가 노래한 「Kid A」 역시 메타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메타포의 원관념은 완전히 지워져 있다. 그건 라디오헤드의 보컬리스트인 톰 요크의 목소리로도 알 수 있다. 노래를 들으면 그의 목소리는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뭉개져 있다. 알아들을 수 있다고 해도 그 가사의 뜻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각자 다르게 해석할 수 있겠지만, 나는 그냥 그 가사를 다음과 같이 직역하겠다.

나는 미끄러졌다.
나는 작고 하얀 거짓말 위로 미끄러졌다.

우리는 막대기들 위에 머리를 뒀다.
너에게는 복화술사들이 있다.

내 침대의 끝에서 그림자들을 바라보며.

쥐와 아이들은 나를 따라 마을을 빠져나올 것이다.
쥐와 아이들은 나를 따라 그들의 집을 빠져나올 것이다.

그걸 보라.


직역하는 까닭은 이 가사에 등장하는 단어들은 아무런 내적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여기 씌어진 단어들은 표면만 존재하는, 텅 빈 기호들이다. 톰 요크는 이 단어들을 모자 속에다 넣고 무작위로 꺼내 가사를 만들었다. 마치 트리스탄 차라가 다다이즘 시를 쓸 때처럼 말이다. 표면만 존재하던 단어들은 다른 단어들 사이에 놓이면서 우연의 의미망을 구축한다. 이 우연의 의미망이 바로 관계성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나카타를 우연히 태워주는 트럭운전기사 하기타가 설명한다.

“그러나 당신은 장어를 좋아하잖아, 안 그래?”
“네, 나카타는 장어를 좋아합니다.”
“그것이 관계성이라는 거야.”
“네?”
“나카타 상은 덮밥은 좋아하나?”
“네, 덮밥도 나카타가 좋아하는 음식입니다.”
“그것도 또한 관계성이라고 하는 거야”하고 운전사는 말했다. “그런 식으로 관계성이 하나하나 모이면, 거기에서 자연히 의미라는 것이 생겨나거든. 관계성이 많이 모이면, 그 의미도 한층 더 깊어지고 말야. 장어든 덮밥이든 생선구이 정식이든, 무엇이든 상관없다고. 알겠어?”


정확하게 바로 이 관계성에 의해 「Kid A」의 가사는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 관계성을 다른 말로 하자면, 가설이랄 수 있다. 전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세 사람, 카프카와 사에키와 나카타를 나란히 놓았더니 어떤 가설이 생기는 것과 마찬가지다. 모자 속에서 나온 단어들로 구성된 「Kid A」가 관계성에 의해 어떤 의미를 지닌 것처럼, 여러 인물들의 우연한 만남으로 이뤄진 『해변의 카프카』는 가설에 의해 하나의 이야기로 구성된다. 만약 하루키의 말대로 소년 카프카가 ‘바로 나 자신’이며 ‘여러분 자신들’이라면, 「Kid A」 역시 ‘바로 나 자신’이며 ‘여러분 자신들’이다. 그리하여 다시 들어보면 「Kid A」는 원래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된 ‘바로 나 자신’, 혹은 ‘여러분 자신들’이라는 걸 알게 된다. 즉 「Kid A」를 듣는다는 건 이 훼손의 흔적에 귀를 기울인다는 뜻이다.

사랑에 대해서 말하면 말할수록 아무런 말도 못한다

「Kid A」 같은 노래를 들을 수 있다는 건 정말 복된 일이다. 이 노래에는 내용도 없고 주제도 없고 따라서 교훈도 없으니까. 그저 우리의 삶이 얼마만큼 훼손됐는지만 보여줄 뿐이다. 『해변의 카프카』가 가진 가장 중요한 미덕도 이와 비슷하다. 말했다시피 이 소설은 메타포의 세계를 보여줄 뿐이다. 이 소설의 원관념은 언젠가 이 세상에 잠시 존재했다가 이제는 영영 사라진 어떤 세계다. 아마 무라카미 하루키가 20년 전에 쓴 소설 『상실의 시대』를 읽으면 그 세계가 원래 어떤 모습이었는지 눈치 챌 수도 있겠다. 『해변의 카프카』는 그 사라진 세계를 원관념으로 하는 메타포의 세계를 다루고 있다. 역시 마찬가지로 『해변의 카프카』는 최종적으로 우리의 삶에서 뭔가가 훼손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이 훼손의 흔적을 알아차리는 순간 소년 카프카는 ‘바로 나 자신’이며 ‘여러분 자신들’일 수 있다. 이 훼손에 대한 사에키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저는 이 도시로 돌아온 이래 줄곧 책상 앞에 앉아서 이 원고를 써왔습니다. 제가 살아온 인생에 대한 글을 쓴 것입니다. 저는 바로 이 근처에서 태어나, 이 집에서 살던 한 소년을 깊이 사랑했어요. 더 이상 사랑할 수 없을 만큼 깊이 사랑했지요. 그도 마찬가지로 저를 사랑해 주었구요. 우리는 완전한 원 안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그 원 안에서 완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언제까지나 계속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어른이 되었고, 시대는 변하고 있었어요. 원은 여기저기 터져서 밖의 것이 낙원 안쪽으로 들어오고, 안쪽의 것이 밖으로 나가려고 했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그때의 저는 그것이 당연한 일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침입이나 유출을 막으려고 입구의 돌을 열었어요.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는지, 지금은 잘 생각나지도 않습니다. 저는 다만 그를 잃지 않기 위해, 밖에 있는 것이 우리 세계를 훼손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 무슨 일이 있어도 돌을 열어야만 한다고 결심했던 것이지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때의 저는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당연한 결과겠지만 저는 그 벌을 받았습니다.”

이 소설에서 전통적인 서사가 될 만한 건 바로 이 부분일 것이다. 한때 하루키는 이 부분만 가지고 한 권의 소설을 썼다. 하지만 『해변의 카프카』는 더 이상 이런 일들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아니, 말하지 못한다는 게 더 옳겠다. 그리하여 「Kid A」가 훼손 이후의 음향만을 들려주는 것처럼 『해변의 카프카』 역시 훼손 이후의 서사, 그러니까 전적인 허구와 메타포와 판타지의 세계만을 보여준다. 자신의 삶에서 무엇이 어떻게 훼손됐는지 말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사랑했던 한 사람을 영원히 기억하는 것 역시 쉽지 않다. 『해변의 카프카』는 자신의 삶에서 무엇이 어떻게 훼손됐으며 사랑했던 한 사람을 어떤 식으로 영원히 기억하는지 보여주기 위해서 쓴 기나긴 이야기인 동시에 그게 왜 불가능한지 말하는 소설이다.
#하루키 #해변의 카프카 #라디오 헤드
11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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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e23

2013.02.03

카프카의 여정을 따라.. 실제 여행지를 방문하며 읽었던 카프카가 떠오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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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gnose

2012.07.25

전 형이상학적인 내용에는 약해서요. 무라카미 소설도 한권도 읽은 적이 없어요.(아니 단편 정도는 읽었을지도?) 하여간 해변의 카프카도 물론 읽은 적은 없지만 이런 소설을 쓰다니 천재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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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ly

2010.04.12

오늘 처음 들어온 이곳에서 많은 걸 읽고 배워가는 느낌이에요.
이 책도 꼭 읽어보고 싶네요. 여러분들 평이 많이 좋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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