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라는 이름의 부드러움 - 『사랑의 갈증』/일본식 고기감자조림
2009.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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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쓰코는 점심식사를 준비하면서 작은 접시 하나를 깼다. 또 손가락에 조그만 화상을 입었다. 야키치는 말랑말랑한 것이면 뭐든지 맛있다고 하고 딱딱한 것은 뭐든지 맛없다고 했다.
에쓰코의 요리를 칭찬하는 것은 맛의 문제가 아니라 말랑말랑함의 문제였다. 마루의 덧문이 닫힌 비오는 날 에쓰코는 부엌으로 나가 요리를 했다. 미요가 지은 밥은 식지 않도록 밥통에 퍼 담지 않고 솥째 놓여 있었다. 밥을 다 지은 미요는 여기에 없었다. 숯불은 이미 꺼져 있었다. 치에코에게서 받아온 불씨로 풍로에 불을 붙이려다 에쓰코는 가운뎃손가락에 화상을 입었다. 다섯 평 남짓한 부엌의 봉당 한쪽에는 흘러들어 온 빗물이 고여 있었는데, 유리문의 회색 광선을 나태하게 되풀이하고 있는 그 반사를, 맨발에 들러붙는 축축한 나막신을 신은 에쓰코는 불에 덴 가운뎃손가락을 혀끝으로 핥으면서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은 빗소리로 가득했다.
그렇다고 해도 일상이란 우스꽝스러운 법이다. 그녀의 손은 풀려버린 것처럼 움직이기 시작하여 냄비를 불에 올려놓았다. 물을 부었다. 설탕을 넣었다. 썬 고구마를 넣었다. 오늘 점심메뉴는 달게 조린 고구마와 오카마치에서 사온 저민고기 그리고 버터로 볶은 나팔버섯, 마 요리, 에쓰코는 멍한 열의로 그것들을 만들었다. 그렇게 있으면서도 그녀는 그칠 줄 모르고 부엌데기처럼 몽상 속을 헤맸다.
- 미시마 유키오(본명: 히라오카 키미타케平岡公威), 『사랑의 갈증』

미시마 유키오의 1950년작인 『사랑의 갈증』의 스토리를 요약한다는 것은 무척 힘들다. (그리고 워낙 충격적인 결말이라 결말은 쓰지 않는 것이 혹시 이 책을 읽어보실 분들에게 좋을 것 같아서 생략했다.) 워낙 한 여인의 감정적인 흐름을 자세하고 섬세하게 일상생활과 맞물려 만들어놓은 섬세한 줄거리 때문일 텐데, 읽은 지 15년이 지난 이 소설을 지금 꺼내도 다시 새롭게 읽히는 것은 물론 느껴지는 것이 다르고 마음 아픈 것이 다르다. 앞으로도 과연 몇 번이나 더 읽고 그 겹겹이 겹쳐 있는 에쓰코의 마음을 다르게 바라볼지 짐작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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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야 그가 태어나면서부터 할머니 밑에서 여자아이들과 종이접기와 인형놀이를 하며 병약하게 자란 탓에 콤플렉스를 극복하고자 더더욱 자신의 몸을 남성적으로 만들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동성애적인 성향을 부정하기 위해서 더더욱 근육을 키웠다는 것도.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하고 스스로가 만든 이미지와 사상을 증명하기 위해 매달리고 나중에는 스스로 할복을 해버린 그의 단호하고 거친 삶의 마감과 그의 섬세한 초기작들은 확실히 연결시키기 힘들다. 『우국』이나 자살하기 일 년 전의 『미시마 유키오 對 동경대 전공투 1969~2000』의 대화들과도 역시 그렇다. 하지만 뭘 원하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자신이 느끼는 감정과 싸우며,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스스로를 몰아쳤던 그의 모습은, 그의 대부분의 작품에서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빌려 보여주었다는 것을, 나이가 들어가면서 조금씩 알게 된 것 같다. 동성애자로서의 미시마 스스로의 고백서나 다름없었던 첫 작품 『가면의 고백』부터, 『금각사』도, 그리고 『사랑의 갈증』도.
정계인사들을 상대하는 최고급 요정을 배경으로 한 60년작 『잔치가 끝나고』에서 그야말로 그의 여성적인 묘사는 극에 달한다. 요정주인이 계절마다, 새로운 손님을 맞을 때마다 갈아입는 기모노의 무늬와 감촉에 대한 상세한 묘사와, 글의 일부분이 되어버린 고급 요정 가이세키 요리들의 메뉴들은 화려하기 그지없다. 그런 손님의 기호에 맞춰 메뉴를 짜는 소설에 섬세하게 끼워 넣는 솜씨에서 그의 여성적인 면을 키워준 어린 시절의 모습과 더불어 부잣집 도련님으로서의 생활을 동시에 엿볼 수 있는데 『잔치가 끝나고』에서의 화려한 묘사들보다 나는 에쓰코가 혼자 마음을 키워가던 사부로가 같이 일하는 하녀 미요를 임신시켰다는 것을 알게 된 다음 날, 그 괴로움과 고민 속에서 손가락이 데는지도 모르고 기계적으로 시아버지의 점심밥을 준비하는 그녀의 넋을 조금은 놓은 달뜬 모습과 그 권태로운 하루하루의 따분함을 보여주는, 시아버지의 씹는 능력에 맞춰 반찬을 해야 하는 그녀의 답답함 마음이 들어있는 문장들이 훨씬 더 기억에 오래 남았다. 머릿속과 마음은 온통 다른 생각인데 기계적으로 일상을 이끌어 나가는 수단으로서의 반찬 만들기. 그 지독한 권태로움. 도대체 여자의 일상과 마음과 부엌에 대해 미시마는 어떻게 이토록 잘 알고 있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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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달하게 조려진 일본식 고기감자, 니꾸쟈가를 떠올릴 때마다 난 같은 클래스였던 일본 여자 아이, 토시미가 늘 떠오른다. 달콤한 감자조림과 『사랑의 갈증』, 그리고 토시미. 웃고 있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던 그녀는 누구하고도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니고 좋은 것도 아니지만 항상 우울한 표정으로 쉬는 시간 뜨개질을 하며 구석에 앉아 있었다. 공부 외에도 항상 펍이나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늘 피곤해 하기도 했지만 퉁명스러워 보이는 뒷면에는 항상 주목 받고 싶어 하는 다른 욕망이 숨어 있었던 것 같다. 복잡하고 알기 어려운 그녀의 심리 때문에 가뜩이나 나이 어린 동기 영국 아이들은 물론 몇 안 되는 일본 친구들도 그녀를 상대하기 힘들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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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이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 정해진 메뉴가 아닌 재료를 받고, 스스로 레서피를 창작하는 수업을 받던 날이었다. 모두 배운 기술들을 이용해 고심해서 메뉴를 짜고, 다들 원하는 재료를 가져다가 요리를 만들고 있었다. 누구라도 그동안 배운 요리 스킬을 이용해서 무언가 만들어야 하는 바쁜 상황이었기에 구석 가스레인지 위에서 냄비 하나를 이용해 조용히 간장 향기를 풍기고 있는 그녀를 신경 쓰기엔 나 또한 정신이 없었다. 무언가 소스로 이용하기 위해 간장을 사용한다고 생각하며 내 요리를 완성하고 심사를 받기 위해 요리를 늘어놓는 순간, 접시 위에 예쁘게 플레이팅된 것도 아닌, 보통 사이드 디쉬로 야채나 감자를 담던 투박한 그릇에 그녀가 수북이 담아 내온 요리는 바로 니꾸쟈가였다. 일본식 감자조림인지 그땐 알지 못했던 내 귀에 다른 일본인 클래스 메이트 리사코가 그녀에게 당혹스러운 말투로 속삭이는 것이 들려왔다. “토시미, 반찬을 왜 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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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을 하면서도, 일본에 돌아가서 일할 바에는 그냥 펍에서 감자를 까는 것이 낫다고 영국에 남는 것을 결정한 그녀. 가업을 잇기 위해 요리를 배우러 온 것도 아니라면서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면서 수업 시간에 일본의 밥 반찬을 만들어버린 그 괴팍함. 나 또한 나중에 니꾸쟈가가 비프스튜를 일본식으로 변형한, 영양식으로 개발되었다는 이야기를 알게 되어 스튜로서 그걸 선보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녀를 이해해보려고 했지만, 그런 이유로 그날 그 무심하기 짝이 없었던 고기감자를 내어놓았던 것 같지는 않다. 레서피를 써 내라는 선생님의 말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파일의 요리법을 대충 영어로 베껴 내는 것을, 나도 옆에서 슬쩍 메모했었으니까.
장대비가 아닌, 영국의 일상에서 내리는 비처럼 가늘고 분무기 같은 비가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정신없는 부엌의 열기를 뚫고 가득 퍼지던 그녀의 조림 냄비 안에서 풍기던 간장 냄새가 떠오른다. 비를 보며 들쭉날쭉하는 감정이나, 내 자신이 아직도 파악하지 못한 누군가를 위한 감정을 붕 뜬 기분으로 곱씹고 싶은 날엔 나도 7년 전에 급하게 베껴 쓴 그녀의 레서피로 고기감자를 만든다. 권태롭고 따분한 일상이라고 해도 그걸 반복하는 이유는 어쨌든 살아가야만 하기 때문이고, 그런 무심한 일상 속에서, 어느 정도 우리 모두 치유받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졸업 후 외국인들이 취업비자 따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던 시절, 남겠다던 그녀가 일은 잘 구했는지, 학교가 아닌 험한 사회에서 와르르 무너지지 않고 스스로를 잘 토닥이고 있는지, 아니면 그 역할을 해줄 어떤 좋은 사람을 만났는지도 궁금하다. 세월이 많이 지났으니 부디 지금은 요리가 그녀에게 둘도 없는 치료제가 되어 있다면 좋겠다. 스스로의 어두움이 자신의 요리도 물들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면 극복하는 방법 또한 찾았기를 기도해본다. 자신을 팽팽히 당기고 있던 뭔지 모를 증오의 딱딱함과 푹 무른 감자처럼 따분한 모습 전부, 부드럽게 다시 다듬어냈기를. 적어도 자신의 무너지는 모습을 접시 안에 무심하게 담아내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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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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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mtom
2009.04.06
포기시로
2009.03.25
찬종2
2009.03.23
하여튼 감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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