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럽게 섞여서, 하나가 되고 싶어 - 양파 마멀레이드를 곁들인 햄버거 스테이크
2008.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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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 주신 편지, 반갑게 받아 보았습니다. 특히 햄버거 스테이크와 향신료의 관계에 대한 대목은, 생동감 넘치는 상당히 훌륭한 문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방의 따스한 향기와 양파를 써는 싹둑싹둑 칼질소리가 생생히 전해져 왔습니다. 그런 데가 한군데라도 있으면, 편지는 살아납니다. 당신의 편지를 읽고 있으려니까 햄버거 스테이크가 못 견디게 먹고 싶어져, 그날 밤 당장 근처 레스토랑에 가서 주문했지요.
… 그건 그렇고, 당신이 만든 것은 극히 보통의 햄버거 스테이크겠지요? 편지를 읽고 있노라니까, 당신이 만든 아주 보통의 햄버거 스테이크를 꼭 먹고 싶어졌답니다.
그녀의 방이 있는 3층 창문에서는 전차선로가 보였다. 그날은 아주 좋은 날씨여서 주위의 아파트 베란다에서는 이불과 시트가 여기저기 널려있었다. 가끔가끔 이불을 두드리는 소리가 탁탁 났다. 나는 지금도 그 소리를 떠올릴 수 있다. 그것은 기묘하게 거리감이 없는 소리였다. 햄버거 스테이크의 맛은 근사했다. 향신료를 알맞게 썼고, 파삭파삭하게 구워진 껍질 안쪽에는 육즙이 잔뜩 괴어 있었다. 소스 상태도 이상적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렇게 맛있는 햄버거 스테이크를 먹은 것이 생전 처음이랄 수는 없어도 실로 오래간만의 일이었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녀는 기뻐했다.
- 무라카미 하루키, 「창」

어린 시절, 아버지께서는 늘 지방에서 근무하시고 어머니는 가게를 운영하시느라 바쁘셨던 탓에, 가족이 모두 모여 놀러 나간다든지, 외식을 하는 일이 무척 드물었다. 하지만 아주 가끔, 온 가족이 소풍을 나갈 때 준비하는 음식은 다름 아닌 햄버거였다. 아무래도 오랜만에 밖에 나가서 먹는 음식이니만큼, 평소에 늘 먹는 것보다 색다른 음식을 준비하려고 해주셨던 것 같다. 싱겁지만,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곳도 아닌 아버지가 숙직을 하시는 회사에 찾아가서 회사 뒷산에 올라 한강을 내려다보며 온 가족이 햄버거를 먹고 아빠와 회사 동료분들이 테니스 치는 것을 구경하곤 했었다. 납작하게 구워진 패티에 들어간 여러 가지 재료들이 고기와 잘 섞여 씹으면 씹을수록 다양한 맛을 내는 것이 신기해 케첩이나 마요네즈를 절대 바르지 않고 고기와 빵, 잘게 썬 양배추만을 꼭꼭 씹곤 했다. 그때 입맛이 굳어서일까? 지금도 햄버거를 먹을 때 케첩보다는 아주 약간의 마요네즈를 바르는 것을 선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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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를 배운 다음부터 다진 고기의 무궁무진한 모습을 더 좋아하게 되어 버렸다. 다진 고기를 이용해서 할 수 있는 요리는 그야말로 끝이 없다. 가장 흔한 저녁밥 메뉴이자 텔레비전을 보면서 먹는 TV 디너의 대명사와도 같은 요리인 진한 그레이비와 구운 양파를 곁들인 햄버거 스테이크, ― 살리스버리 스테이크(Salisbury Steak)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 마카로니 앤 치즈, 다진 고기들과 비계를 이용해 굳힌 애피타이저 파테(Pate), 다진 고기와 토마토, 야채를 넣어 오래오래 끓인 미트소스를 이용하면 파스타뿐 아니라 라자냐(lasagna)도 만들 수 있다. 양고기를 섞어 토마토 미트소스를 만들고 시나몬 약간을 더하면 그리스식 라자냐인 무사카(mousakka)도 만들 수 있다. 나라마다 옥수수나 말린 대구, 새우까지 다양하게 들어가는 고기 완자튀김 리솔(Rissole), 진한 토마토소스를 잔뜩 얹은 미트로프(Meatloaf)와 미트볼, 그리고 큐민과 칠리, 강낭콩을 집어넣은 칠리 콘 카르네(Chili con carne), 다진 고기 반죽으로 삶은 달걀을 싸서 익히는 스코치 에그(Scotch Egg)까지. 동양 요리에도 떡갈비, 마파두부, 만두까지 정말 셀 수 없을 만큼 다양하게 이용된다.
그중에서도 햄버거 스테이크야말로 볶은 양파 곁들여 스테이크처럼 분위기를 내어도 되고, 정말 아삭한 양상추와 양파, 토마토 곁들여 햄버거를 만들어 먹어도 좋다. 건강식으로 두부나 연어, 버섯과 생선을 갈아서 만들 수도 있지만 역시 그래도 햄버거 스테이크는 심플하게 쇠고기, 또는 쇠고기와 돼지고기를 반반씩 섞는 것이 가장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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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잘 반죽해서 구운 햄버거 스테이크는, 살리스버리 스테이크라는 이름을 붙여 준 내과의사 살리스버리 박사가 허약한 사람들에게 더 쇠고기를 많이 먹는 방법으로 추천한 레시피라는 설이 이해가 갈 정도로 포크만으로도 잘라질 만큼 부드럽고, 잘 넘어간다. 햄버거 스테이크를 비롯 미트로프, 파테와 같은 다진 고기로 만든 음식들은, 일반 스테이크나 튀긴 커틀릿 같지 않게 식어도 괜찮다. 영화화된 연극 <프랭키와 쟈니>에서 미쉘 파이퍼와 알 파치노는 처음으로 둘이 함께 밤을 보내는 날, 섹스가 끝난 뒤 침대 위에서 사이 좋게 둘이 일하는 레스토랑에서 가져온 미트로프를 손으로 뜯어 나눠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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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진 쇠고기와 돼지고기, 빵가루, 볶은 양파,
소금 후춧가루를 넣어 골고루 반죽이 되도록 손으로 치댄다.
얼마나 신나는 명상인가.
잠자리에서 상대방의 그곳을 만지는 일만큼
우리의 촉각을 행복하게 사용할 수 있는 순간은,
곧 이 순간,
음식물을 손가락으로 버무리는 때가 아니던가
- 장정일, 「햄버거에 대한 명상」 중
냉장고에는 다짐육이 있다. 어느 때라도 이런 일이 닥치면 불편하지 않게 우선 다짐육만은 확보해 놓는다. 다짐육은 엄마가 가장인 가정만이 아니고 나처럼 혼자 사는 여자의 구세주이기도 하다. 마침 완탕의 껍질도 있으니까 완탕 수프로 하자. 파를 잘게 썰어 마늘과 생강을 갈고 주발에 넣어 다짐육과 섞는다. 쓱쓱. 쓱쓱 부엌의 작은 창문으로 차에서 비치는 테일램프가 고요히 통과해 간다. 쓱쓱. 쓱쓱 덩어리였던 다짐육은 매끈매끈하게 되어 드디어 내 손가락에 달라붙는다. 어스름한 부엌의 개수대에 기댄 채 나는 손가락에 붙은 다짐육을 바라보면서 중얼거린다.
“나는 꼭 다짐육 같아.”
왜냐하면 대부분의 재료(남자)를 받아들일 수 있고 조리방법(교제방법)도 간단하고 값이 싸니까(나는 반드시 더치페이로 지불한다). 정말 다짐육 같은 여자구나.
- 츠쯔이 토모미, 『먹는 여자』 중 「민스걸」

누군가를 위한 나의 첫 햄버거 스테이크가 계속해서 이어질 사랑을 위해서가 아닌, 그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함께한 식사를 위해 만들었다는 것이 지금 생각하면 조금은 서글프다. 하지만 정성껏 다진 고기를 치대는 그 시간의 내 마음만큼은 진짜였고, 행복했고 그 순수한 에너지는 그에게 따듯하게 전달되었을 거라고 믿는다. 그냥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되어버릴 수도 있었던, 오랜 시간 동안 묵히고 묵혀왔던 마음을 요리로 표현할 수 있었던 그 짧고 행복했던 시간. 그런 마음 느껴볼 수 있었던 것에 그저 감사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아쉬워하지 말고, 준 것으로 그냥 감사하게.
10년이 지난 지금도 오라큐 전차를 타고 그녀의 맨션 근처를 지날 때마다, 그녀와 그 파삭파삭한 햄버거 스테이크가 생각난다. 나는 선로 양 옆으로 줄지어 서 있는 맨션 건물들을 바라보면서, 그것이 어느 창문이었을까, 하고 생각한다. 그녀의 집 창문으로 보이던 풍경을 상기하고 그것이 어느 언저리였더라, 하고 생각해 본다.
- 무라카미 하루키, 「창」
10년,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이 지나 모든 것이 희미해지고 삶을 살아가는 데 바빠 정신이 없게 되더라도, 레코드샵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한 토막이 귀에 걸리거나, 그리고 다른 소중한 사람을 위해 다진 고기를 치대는 순간이 오면, 나의 첫 햄버거 스테이크가 또렷이 기억이 나게 될까? 그때는 희미한 기억을 또렷하게 만들어보려 이맛살을 찌푸릴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나는 기억을 희석시키기 위해, 어느 12월 1일날 만들었던 그 햄버거 스테이크에 얽매여 있지 않기 위해 고기를 다지고 양파를 볶고 있지만 말이다. 조그만 욕심이라면,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가 두껍지만 파삭파삭했던 스테이크의 감촉과 정성 들여 만든 소스, 갈아서 뿌린 신선한 넛맥의 향기를 기억했으면 좋겠다. 세월이 지나 다른 것은 다 잊는다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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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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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채널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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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든
2010.03.31
jodie14
2009.03.11
종종 먹고 있습니다. 새로운 맛의 세계를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권지세
2009.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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