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부터 났다. 내가 믿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런 것이 있기나 한 것일까. 배신은 아프다. 아픔의 깊이는 믿음의 정도에 비례한다. 단종은 깊은 한으로 묻혔을 것이다. 풀이 나지 않을 것이라고, 최영 장군은 자신의 묘에 풀 대신 한을 심었다. 세상이 다 변해도 이것만은 아닐 거라고 여겼던 것들마저 변해가는 시대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아프다.
믿었던 것들이, 마땅히 지켜져야 할 것들이 수없이 어그러지고 있다. 보험금을 노리고 아내를 살해한 가장, 아동학대, 신도를 성폭행한 목사. 한동안 국내외를 떠들썩하게 했던 프랑스 부부의 영아유기 사건까지도 그렇다. “그래서 그게 뭐? 그럴 수도 있는 일 아니야?”라며 반문할 사람이 있을 정도다. 익숙해져서는 안 될 것들에 우리는 익숙해지고 있다. 옳지 않은 것을 바로 세우고, 옳은 것을 지키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디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은 인간 사회의 허위와 잔인함을 예리하게 짚어낸다. 어떻게든 사람들과 어울리려 했고, 사람들을 믿고자 노력했으며, 순수하고 진실된 것만을 추구했던 주인공은 모든 면에서 철저히 배신당한다. 그런 상황에서 누구인들 버텨낼 수 있을까. 신뢰를 잃은 인간은 방향타를 잃은 배와도 같다. 주인공이 택한 길은 결국 자살이었다. 그의 죽음에 대해 누군가는 인생 패배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이 패배의 기록은 아니다. 오사무의 삶이 투영되어 있기도 한 주인공 요조는 누구보다도 치열한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그의 자살은 패배로 기억되기보다 사회에 대한 고발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부모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 우정에도 배신당했으며, 사랑조차 그에게 안식을 주지 못했다. 책장을 넘겨가면서 나는 그에게서 깊은 우울을 느꼈다. 아버지는 아들이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는 관심도 없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만 커가길 원했다. 요조는 아버지 앞에서 한 번도 제 목소리를 내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만 그랬던 게 아니었다. 그를 둘러싼 세상 모두가 잔인했다. 아무도 그에게 진심 어린 눈길을 보여주지 않았다. 행복한 척 익살로 겉을 두르고 다니면 모두들 그런 줄로만 착각했다. 어째서 그런 그를 아무도 알아주지 못했던 것일까.
한 여자와의 사랑에서 나는 그가 안식을 찾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얼마간은 정말로 그런 것처럼 보였고, 불신과 불안으로만 가득 찼던 그의 세계에, 얼마간은 거기에 동의해가고 있던 나에게도 그것은 행운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였다. 그 사람에마저 배신당하는 주인공을 보면서 나는 오사무가 깊은 고통 속에서 살아간 작가였을 것이라 생각했다.
39세의 많지 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다섯 번에 걸쳐 자살을 기도한 그였다. 남의 반절도 되지 않는 생을 살아가면서 다섯 차례나 자살을 시도했다는 그의 인생이 얼마나 깊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을지.
최근 자살 사건이 급증하면서 관련 소식을 자주 듣는다. 인터넷에서 사람들의 댓글을 살펴보면 거의가 비난 일색이다. 그 용기로 살아보라느니 아직 어려서 정신을 못 차렸다느니, 그런 말들이 대부분이다. 나 역시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이 사실이다. 나약해 보였다고 할까.
예수는 너희 중 죄 없는 자가 저 여자를 향해 돌을 던지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책을 덮고서, 과연 나에게 그들의 선택을 비난할 자격이 있는지 물었다. 과연 내가 타인의 슬픔에 대해 감히 무어라 논할 수 있는지 물었다. 다섯 번째의 자살을 기도하기까지 그는 얼마나 많은 좌절과 고통 앞에서 몸부림쳤을까. 그의 선택에 나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진심과 배려가 필요한 세상이다. 믿음이 필요한 세상이다. 모든 것이 변해왔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아마도 그것이 아닐까.
책을 덮고서 의자에 가만히 앉아 나는 생각했다. 수없는 요조가, 수없는 디자이 오사무가 우리 주변에 있다. 무심코 내뱉은 말 한 마디가 내 곁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할 수 있다. 멀리 돌아볼 필요도 없을 것 같다. 가족에게부터라도 따스한 눈길을 돌려보자. 어머니, 아버지, 동생, 누나, 형. 진정을 담아 건네는 말 한 마디가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될 것이라고, 비록 그것이 미약할지라도 진전일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채널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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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스맘
2007.1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