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 절정의 삼국지 - 고우영 『삼국지』
글ㆍ사진 채널예스
2003.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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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자랑할 일은 아니지만, 나에게 『삼국지』는 곧 고우영의『삼국지』다. 중학교 때 처음 만난『삼국지』는 심심할 때마다 읽는 필독서가 되었다. 한 50번 이상씩은 보았을 것이다. 고우영의 다른 만화들도 마찬가지다. 『임꺽정』『일지매』『수호지』『열국지』등 고우영이 그린 만화들을 보면서 나는, 만화의 즐거움을 느끼는 한편 중국의 역사까지 자세히 알게 되었다. 그 덕에『삼국지』의 내용은 모두 고우영의 그림으로 기억난다. 동탁의 죽음을 떠올리면, 동탁의 부른 배에 꽂아놓은 촛불이 몇 달 동안 꺼지지 않았다고 설명하는 그림이 생각난다. 조자룡의 이미지는 여전히 말 없고 성실한 미남자로 남아 있다. 가끔, 그래도 『삼국지』를 완역본으로 한번 읽어봐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늘 그냥 넘어간다. 엄두가 나지 않아서…….

고전을 대하는 가장 좋은 일은 물론 원서로 보는 것이다. 그게 힘들면 완역본으로 읽거나. 하지만 그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그냥 고우영의『삼국지』, 이학인의『창천항로』등으로 만족한다. 아예 안 보는 것보다는 그게 나으니까. 오래 전 모 대학 앞에서 밥을 먹다가, 학생들의 대화를 들었다. 삼국지 봤냐? 아니, 그게 누가 주인공이지? 글쎄? 혹시 유방인가? 아 맞다. 그래 유방이다. 이공대 학생들이긴 했지만, 그런 소리를 태연하게 나누는 모습을 보면서 좀 착잡했다. 고우영의『삼국지』라도 열심히 봤다면 그런 소리는 안 할 텐데.

그리스 로마 신화를 한 번도 읽지 않는 것보다는, 만화로 보는 것이 훨씬 좋다고 생각한다. 요즘처럼 ‘학습 만화’로 급조한 싸구려들은 제외하고, 기왕이면 잘 만든 만화로. 『삼국지』도 마찬가지다. 완역본에 가깝게 옮긴 요코야마 미츠테루의 『삼국지』도 좋고, 충실하면서도 작가의 개성이 물씬 드러난 고우영『삼국지』도 좋다. 아예 나관중의 『삼국지』를 뒤집어 조조를 희대의 영웅으로 그리고, 신과 인간의 어우러짐으로 만들어낸 『창천항로』도 좋고. 조조를 영웅으로 그린 것이 작가의 독창적인 해석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나관중의 『삼국지』 역시 역사를 기초로 한 허구의 산물이기는 마찬가지다. 다양한 관점과 시각으로 다듬어진 소설과 만화 등을 통해서 역사의 다면성을 바라보는 것도 좋은 일이다.

1978년에 처음 연재되기 시작한 고우영의『삼국지』는 외국의 어떤 작품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 고전의 독창적인 해석은 물론 당대의 사회상을 역사에 빗대어 드러내는 방식도 탁월하다.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는 고우영의『삼국지』를 제대로 만나지 못했다. 내가 1980년대에 본 『삼국지』는 우석출판사에서 나온 10권짜리 단행본이었다. 그 단행본 곳곳에는 지워진 부분이 있었고, 아예 다른 그림이 들어가기도 했다. 작가의 말로는 “폭력과 선정성 등을 이유로 심의과정에서 100여 페이지가 삭제, 수정”되었다고 한다. 이번에 나온 『삼국지』는 초판본 10권을 기본으로 하되 삭제, 수정된 부분을 직접 복원한 '무삭제 완전판‘이다.

삭제되기는 했지만, 당시의 판본으로도 고우영의 천재성은 쉽게 드러났다. 인물 해석부터가 재미있다. 유비를 ‘쪼다’로 그리면서도, 자신을 슬쩍 빗댄다. 제갈공명과 관우를 라이벌로 대립시키고, 권력다툼에서 일체 관심이 없는 장비와 조자룡의 개성도 매끈하게 잡아낸다. 제갈공명이 관우를 사지로 몰아넣기 위해 벌이는 행적을 교묘하게 연결시키는가 하면, 장비의 ‘서민적인 순수함’을 부각시켜 더욱 빛나게 한다. 이학인의『창천항로』처럼 우리의 통념을 180도 뒤집는 경우는 없지만, 역사 속의 인물들에게 자신의 시선을 명확하게 부여하여 생생함을 더해준다. 그 결과 『삼국지』는 단순한 만화 각색이 아니라, 고우영의 ‘만화삼국지’로 완벽하게 재편되었다.

고우영의 장기 중 말재간은 특히 즐거움을 더한다. 고우영의 말재간은 단순한 말장난을 뛰어넘어 당대의 사회상을 적극적으로 끌어낸다. 초선의 미인계에 걸린 여포는 의부 동탁을 죽이면서 “크레오 훼드라”라고 외친다. 당시 유명했던 영화 <페드라>를 패러디한 것이다. 작가의 기본이기는 하지만,『삼국지』의 등장인물들은 캐릭터에 따라 말투와 어휘가 달라진다. 장비의 대사와 관우의 대사는 거의 상극이고, 제갈량과 관우의 대화는 정중하면서도 총성 없는 전쟁을 방불케 한다. 성인만화에만 나오는 ‘야한’ 장면들도 고우영 특유의 해학으로 전혀 부담 없이 책장을 넘기게 해준다.

고우영의『삼국지』는 만화의 즐거움을 느끼게 해준 작품의 하나다. 중학교 때 보았던『캔디 캔디』『루팡 3세』『코브라』 같은 일본만화와는 달리, 고우영의『삼국지』는 우리 민족 특유의 해학과 풍자를 만끽할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삼국지』『일지매』와도 다르다. 고우영의 작품 중에서 개인적 취향으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을 꼽는다면 단연『일지매』다. 상상력을 발휘하여 스토리를 만들어낼 때도 고우영은 여느 작가에 뒤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미 존재하는 고전이나 역사를 각색하여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내는 능력은, 국내만화가 중 단연 최고라 할 수 있다. 원작의 향취를 느끼면서도, 전혀 새로운 작품인 것처럼 다가오는 것이 고우영의 만화다. 그리고 그 재능이 최고도로 발현된 작품이 바로 고우영의『삼국지』다. 비록 고우영의 최근작들이 지나치게 역사만화로 축소되기는 했지만,『삼국지』는 고우영의 재능이 절정으로 만개했을 때 어떤 작품이 나오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밖에도『고우영 삼국지』는 당시 금기시되었던 만화에서의 성적 에로티시즘이 유쾌하게 표현됨으로써 성인이 볼 수 있는 만화를 탄생시키는 데 일조했을 뿐 아니라, 서슬 퍼렇던 군사정권의 시대상을 과거의 역사적 사실에 빗대어 시사하는 등 어떻게 1970년대에 이런 작품이 나올 수 있었을까 의아스러울 정도로 수많은 파격과 천재성이 발견된다. 그의 모든 작품이 하루빨리 ‘완전판’으로 나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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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천항로 1

<이학인> 글/<왕흔태> 그림

열국지 1

<고우영> 글, 그림

수호지 1

<고우영> 글, 그림

일지매 1

<고우영> 글, 그림

캔디캔디 전9권 세트 (완결)

이가라시 유미코 저/백종미 역

루팡3세Y 11

Monkey Punch,Masatsuki Yamaka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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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석

글 쓰는 일이 좋아 기자가 되었다. [씨네21] [브뤼트] [에이코믹스] 등의 매체를 만들었고,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프로그래머를 거쳤다. 어린 시절부터 영화, 소설, 만화를 좋아했고 어른이 되어서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자연스레 대중문화평론가, 작가로 활동하며 『나의 대중문화 표류기』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 『내 안의 음란마귀』 『좀비사전』 『탐정사전』 『나도 글 좀 잘 쓰면 소원이 없겠네』 등을 썼다. 15년 이상의 직장 생활, 7, 8년의 프리랜서를 경험하며 각양각색의 인간과 상황을 겪었다. 순탄했다고 생각하지만 다시 통과하고픈 생각은 별로 없는 그 시기를 거치며 깨달았다. 직장인과 프리랜서 모두 쉽지 않고, 어른으로서 살아가는 일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는 것. 월급도 자유도 결국은 선택이고, 어느 쪽도 승리나 패배는 아니라는 것. 모든 이유 있는 선택 뒤엔 내가 감당해야 할 후폭풍이 남는다는 것. 다 좋다. 결국은, 지금의 내가 있으니까. 2007년부터 13년간 상상마당 아카데미 ‘전방위 글쓰기’ 수업을 진행하며 쌍은 경험과 노하우를 이 책에 그대로 풀어냈다. 글쓰기 초보자에게 글을 잘 쓸 수 있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방법을 알려 준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글을 잘 쓰고 싶어 하는 모든 이에게 ‘나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선물할 것이라 확신한다. 주요 저서에는 『전방위 글쓰기』(2008), 『영화 리뷰 쓰기』(2008),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2012), 『나의 대중문화표류기』(2015), 『웹소설 작가를 위한 장르 가이드: 미스터리』(2015), 『웹소설 작가를 위한 장르 가이드: 호러』(2016), 『고우영』(2017) 등이 있다. 공저로도 『클릭! 일본문화』(1999), 『시네마 수학』(2013), 『탐정사전』(2014), 『웹소설 작가를 위한 장르 가이드: 웹소설 작가 입문』(2017)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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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우영

한국 만화의 지평을 넓힌 거장으로 평가 받는 고우영은 1939년 만주 본계호에서 독립운동가의 아들로 출생하여 해방 후 부모의 고향이었던 평양으로 왔다. 한국전쟁 중에 피난지인 부산에서 「쥐돌이」를 출간하면서 만화계에 데뷔했다. “만화를 읽을 나이에 만화를 그렸다” 고 생전에 그가 회상했던 대로 당시 중학생이었던 어린 나이였다. 후에 고등학교 3학년부터 둘째 형 고일영이 '추동식'이라는 예명으로 연재하던 '짱구박사'를 '추동성'이라는 예명으로 이어갔다. 1972년 일간스포츠에 『임꺽정』을 연재하면서 일본만화와는 전혀 다른 한국적인 극화의 새로운 장을 열어갔다. 익살스러운 대사와 빠르고 파격적인 극의 전개로 '만화는 아이들이나 보는 것'이라는 상식을 깨고 수많은 성인 독자를 사로잡았다. 1978년 연재하기 시작한 그의 대표작이자 한국만화의 걸작인 『고우영 삼국지』는 하나의 문화적 현상이 될 만큼 인기를 끌었다. 이 만화 때문에 신문을 구독하는 독자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기도 했다고 한다. 이 외에도 『초한지』, 『서유기』, 『열국지』, 『일지매』, 『십팔사략』 등 고전을 각색해 그린 그의 만화들에는 단순한 고전의 해석을 넘어 당대의 독자들과 공감할 수 있는 유머와 해학이 담겨 있다. 민초들에 대한 깊은 애정이 담긴 시선과 재담, 고우영 특유의 비틀기로 독자들의 상상력에 숨통을 틔워주었다. 명랑만화와 극화를 넘나드는 다양한 그림체와 동양적인 그림기법으로 탄탄하고 재치 넘치는 대사를 이어갔던 그의 만화는 여러 시대와 세대를 넘나들며 하나의 큰 흐름이 되어 한국만화의 입지를 한층 끌어올렸다. 1980년대 후반에는 『가루지기전』, 『21세기 아리랑 놀부뎐』등을 통해 우리 고전을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한 만화를 선보이기도 했으며 미국이나 중국을 여행한 뒤 여행기를 만화로 엮은 『미국만유기』, 『중국만유기』, 『유럽만유기』를 출간하기도 했다. 초창기의 명랑만화와 성인취향의 연재만화에서는 물론, 그의 만화는 이러한 다양한 영역에서도 그 자취를 남기고 있다. 언제나 현역이었던 그의 만화는 동시대적인 호흡을 놓치지 않고 걸죽한 입담으로 주인공과 독자의 호흡을 이끌어갔다. 동양적이고 개성 뚜렷한 캐릭터로 진지함과 익살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었던 그는 실로 한국만화에서 가장 큰 족적을 남긴 거장이었다. 2000년 이후에는 굿데이 신문에 조선의 역사를 다룬 만화, 『수레바퀴』를 연재하였다. 건강상의 이유로 잠시 창작활동을 쉬는 듯 하였으나, 과거 검열된 작품들을 무삭제 완전판으로 복원하는 작업을 게속 해나갔으며 1970년대 중도 하차된 『수호지』를 새롭게 그려내어 20권의 단행본으로 발간했다. 언제나 넘치는 창작열을 불태웠던 그였으나 2002년 수술받았던 대장암이 재발하여 2005년 4월 25일 66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현재 故 고우영의 납골은 자유로 청아공원에 안치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