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더 깊은 곳을 들여다보는 앤솔러지 고딕×호러×제주
호러는 약자가 주인공이 되는 전복의 장르라고 생각합니다. 현실에서는 강자가 이깁니다. 하지만 문학적 상상력의 공간에서는 약자가 강자를 이기기도 합니다.
‘장르 소설이 사회와 역사를 다룰 수 있을까?' 이 질문에서 시작한 프로젝트가 7명의 호러 작가가 모인 앤솔러지 『고딕×호러×제주』 가 되었다. 애월, 모슬포, 송악산, 숲 터널 등 익숙한 지명을 따라 여행하듯 읽을 수 있는 책 속 단편들은 설문대 할망과 그슨새, 애기업개 등 신비한 제주 설화와 이재수의 난, 결7호 작전, 4·3 사건 등 아픈 역사가 '호러'라는 장르적 재미와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아름다운 제주의 이면을 파고드는 이야기들을 읽다 보면 슬슬 궁금해진다. 한국 전역에 아픈 역사가 있고 신비한 전설들이 있다. 이들은 왜 제주를 선택했을까?
『고딕×호러×제주』 가 어디서 시작해서 무엇을 담고 있는지, 책의 기획자인 박소해 작가에게 물었다.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박소해 작가님은 작가이자 『고딕×호러×제주』 의 기획자인데요, 어떤 계기로 이 책을 기획하게 되었나요?
전 2016년에 제주도로 이주하고 곧장 이 섬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일만 팔천 신이 존재하는 민속 신앙, 정겨운 제주어, 육지와 사뭇 다른 문화, 곶자왈, 오름, 바다, 올레길 같은 아름다운 자연 등 제주도는 벗기고 벗겨도 새로운 껍질이 끊임없이 나오는 양파처럼 속을 알 수 없는 신비하고 매력적인 섬입니다. 저는 제주에서 살게 된 후 아름다운 자연과 대치되는 비극적인 역사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고려 시절 육지에 복속된 이후로 제주의 역사는 수탈의 역사였습니다. 목호의 난, 이재수의 난, 일본군 점령, 결7호 작전, 4·3 사건, 5·16 도로 건설 등 제주도는 수백 년 동안 육지의 압제에 시달려 왔습니다.
특히 4·3사건은 세계사에서도 전무후무한, 국가 권력이 자국의 국민을 의도적으로 죽인 제노사이드입니다. 4·3 사건으로 당시 제주 인구의 1/10이 죽었어요. 제주도로 이주한 첫 주에 제주4·3평화박물관에 갔다가 4·3사건을 처음으로 ‘제대로’ 알게 되었고, 그날 집으로 돌아와서 일주일 동안 악몽을 꿨습니다. 그 뒤 4·3 사건에 대한 꾸준히 조사했고 2023년에 한국추리문학상 제17회 황금펜상을 받은 <해녀의 아들>을 썼습니다. <해녀의 아들>은 4·3 사건을 소재로 한 사회파 미스터리입니다.
제주도를 관광 엽서 속 아름다운 풍경으로만 바라보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에요. 제주도의 많은 관광 명소가 목호의 난이나 제2차 세계대전의 결7호 작전, 4·3 사건 같은 역사적 비극의 배경이었다는 점을 아는 분들은 적어요.
제주도의 빛만 보고 어둠은 외면하는 이런 상황이 안타까워서 제주도의 슬픈 역사를 장르 소설로 써서 세상에 알리고 싶다는 소망을 품었습니다. 그러다 2년 전, 한국 공포 문학의 산실인 ‘괴이학회’에서 만난 여섯 작가님들과 의기투합하여 이렇게 앤솔러지를 내게 되었습니다. 시간은 좀 걸렸지만 제 소망이 결실을 거둔 것 같아서 기쁩니다.
‘고딕 호러’라는 장르가 낯선 독자도 있을 테니, 고딕 호러 장르란 무엇인지 설명 부탁드리겠습니다.
고딕 소설은 호러와 로맨스가 결합한, 전통이 오래된 장르입니다. 서구권에서 18세기부터 유행한 현대 호러 소설의 시조라고 보시면 됩니다. 최초의 고딕 소설은 호러스 월폴의 『오토란토 성』(1764)입니다. 여러분이 익히 잘 아는 ‘드라큘라 시리즈’나 『프랑켄슈타인』이 다 고딕 소설에 해당된다고 보시면 됩니다.
고딕 소설이라는 이름은 중세의 고딕 양식 건축물이 주는 음산함이 연상된다는 의미로 붙여졌습니다. 오늘날에는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으스스한 인간의 이상 심리를 다룬 소설을 광범위하게 지칭하는 말로 쓰이고 있어요.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죠. 특히 19세기 초중반 영국, 독일 등 유럽에서 그 인기가 절정이었을 무렵에는 바다 건너 미국에까지 영향을 주었고, 이는 남부 고딕이란 파생 장르의 탄생에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현대에도 고딕 소설이란 용어가 종종 쓰이지만 이제는 스릴러나 호러 장르가 분화되어 더 큰 인기를 끌고 있어서 오히려 고딕이 생소한 세부 장르로 치부되기도 합니다.
고딕 소설에서 다루는 공포 요소는 다른 세계에서 온, 인간과 다른 기이한 존재들이 주는 괴리감과 근원적인 두려움입니다. 이는 개연성을 중시하는 현대 호러 소설과는 완전히 궤를 달리한다고 볼 수 있죠. 『고딕×호러×제주』를 읽으면 왜 제목에 고딕 호러를 넣었는지 이해하실 겁니다. 제주 신화의 신이나 민담의 요괴 등 초자연적이고 괴이한 존재들이 주는 공포야말로 ‘고딕 호러’의 정수이니까요.
연결되는 질문인데, 제주도의 어떤 면이 호러 장르와 어울릴 것이라고 생각하셨나요?
여러분이 알고 있는 파란 하늘과 청명한 바다의 제주는 ‘빛의 제주’입니다. 혹시 ‘그늘의 제주’를 아시나요? 가로등이 거의 없어 밤만 되면 어두컴컴한 5·16도로나 중산간도로, 버려진 버섯 농장이나 폐쇄된 연수원, 미분양된 유령 타운하우스, 4·3 때 마을 주민이 모두 학살되어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잃어버린 마을….
이처럼 제주에는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 으슥하고 외진 장소들이 많습니다. 육지 사람들의 욕망이 한때 불타올랐다가 사그라진 곳, 도민의 한과 고통이 서린 곳들이지요. 이런 슬픈 역사를 지닌 섬에서 호러를 쓰지 않으면 대체 뭘 쓴단 말입니까?
저는 『고딕×호러×제주』로 독자에게 새로운 호러를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먼저, 제주색을 충분히 반영하기 위하여 단편마다 제주도 신화와 민담을 소환했습니다. 설문대 할망, 그슨새, 광양당신, 오방토신, 애기업개, 이어도 전설 등이 등장합니다.
두 번째, 장르 소설도 사회·역사적인 이슈를 다룰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목호의 난, 이재수의 난, 일본군 점령, 결7호 작전, 그리고 4·3 사건, 5·16 도로 건설…. 『고딕×호러×제주』는 제주도의 슬픈 역사를 공포 소설 안에 녹여냈기에 더 의미가 깊습니다.
마지막으로 서구권 고딕 호러를 제주도라는 배경에 이식하여 새로운 공포 문학을 선보였습니다. 애월읍의 빌레못 동굴, 차귀도, 곶자왈, 이어도, 모슬포, 송악산, 도레 오름 등 제주도 곳곳이 소설의 무대입니다.
호러는 약자가 주인공이 되는 전복의 장르라고 생각합니다. 현실에서는 강자가 이깁니다. 하지만 문학적 상상력의 공간에서는 약자가 강자를 이기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랜 세월 육지로부터 수탈당해 온 ‘약자’ 제주도가 호러의 배경에 잘 어울리는 것은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 같기도 합니다.
책에 드문드문 제주도 사투리가 나오는 부분이 또 다른 재미를 주는 것 같습니다. 제주도 사투리의 매력은 무엇이고 이 책에서는 어떤 역할을 했나요?
제주도는 바람의 섬이잖아요. 여담인데 바람이 너무 세다 보니까 말의 어미가 바람에 날아가서 어간만 남았다는 속설이 있어요. 예를 들어 “밥은 챙겨 먹었니?”를 제주어로 하면 “밥 먹언?”이고 “어디로 가시나요?”는 “어디 감수광?”으로 짧아집니다. 짧고 간결하다는 면에서 경상도 방언을 닮긴 했으나, 어조가 더 느리고 정겨워요. “그랬어?”를 “기이?” 하고 끝을 올리면서 부드럽게 장음으로 발음합니다. 그리고 섬이어서 그런지 세종대왕 시절의 ‘아래 아’ 발음이 아직도 살아 있어요. 그 아래 아 발음은 저도 못해요. 오직 제주도 네이티브만이 발음할 수 있어요. 제주어는 빠르게 말하면 거칠게 들리기도 하지만 대체로 푸근하고 순박한 맛이 있습니다.
저는 <계간 미스터리>에 연재한 ‘제주도 형사 좌승주 시리즈’에서 제주어를 선보였고 좋은 반응을 받았습니다. 주인공 좌승주와 주변 인물이 제주어를 쓰면 제주도만의 활력이 느껴진다고 해요. 제주어가 경상도 방언이나 전라도 방언에 비해 대중에게 덜 알려진 측면이 있어요. 많은 도민이 그 점에 불만이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곧 제주어가 사라질지도 몰라요. 이제 젊은 제주도민들은 제주어를 별로 사용하지 않거든요. 제주어를 제 소설에 계속 등장시켜서 제주어의 생명을 이어가고 싶다는 마음이 있습니다.
감사하게도 제 궨당(제주어로 친척, 친구, 지인) 김유경 선생님이 이 책의 제주어를 감수했어요. 김 선생님도 동화와 에세이 작가라 이 책의 대사를 문학적 허용을 감안하며 맛깔진 제주어로 고쳐주었어요. 이미 제주 소재 드라마를 통해 제주어를 접한 분들이 많겠지만 소설로 읽는 제주어는 새로운 맛을 줄 겁니다. 제주어만의 독특한 어감 덕분에 독자 여러분은 『고딕×호러×제주』를 읽는 동안 제주도에 있는 듯한 생생한 현장감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고딕×호러×제주』는 호러 장르 소설이면서 사회와 역사를 깊숙이 다루고 있는 점이 특이한데요, 이런 작업을 생각해 내신 이유가 궁금하고 앞으로도 계속 같은 작업을 하실 계획인지도 궁금합니다.
우선 한강 작가님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한강 작가님이 가장 최근에 발표한 『작별하지 않는다』가 바로 제주 4·3을 다룬 장편 소설인데요. 광주 5·18 사태를 다룬 『소년이 온다』와 더불어 많은 독자에게 큰 감동과 울림을 준 작품이지요. 순소설에서는 이렇듯 사회·역사적 이슈를 다룬 작품들이 인정받고 많은 인기를 끄는데 장르 소설은 유독 ‘장르가 재미가 있으면 그만이지, 의미까지 필요해?’란 고정 관념에 지배받고 있는 것 같아요. 장르 소설도 얼마든지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이슈를 다루고 거기에서 도출해 낸 깊이 있는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문학’이라는 점을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심지어 재미도 있답니다!
앞으로도 이런 작업을 계속하고 싶습니다. 『고딕×호러×제주』의 반응이 좋으면 다른 주제로 계속해서 제주 관련 앤솔러지를 내고 싶습니다.
총 일곱 분의 작가님이 함께 작업을 하셨는데, 가장 힘들었던 점(가령 섭외라든가, 자료 조사라든가)과 가장 보람 있었던 점을 말해 주신다면?
작가들은 대개 자신만의 생각이 굉장히 뚜렷해요. 그러다 보니 글의 개성이 확고하고 작품에 있어서 타협하지 못하는 자신만의 기준이 있지요. 개인 작품집에서는 그 개성을 마음껏 발휘해도 됩니다. 하지만 앤솔러지는 다릅니다.
운동 경기에 비유해 볼까요? 개인 작품집이나 장편 소설이 개인전이라면 앤솔러지는 단체전과 같습니다. 앤솔러지에 참여하고 싶은 작가는 기획과 수정 방향에 대해 협력하고 기꺼이 소통하려는 열린 마음을 가질 필요가 있어요. 나 혼자만 뛰는 경기가 아니기 때문에 출판사, 기획자, 참여 작가들과 계속 회의하고 조율하면서 인내심과 이타심을 발휘할 줄 알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기획자를 신뢰해야 기획자가 제대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기획안과 1차 시놉시스를 맨 처음에 투고했던 출판사로부터 상세한 수정 사항을 받았어요. 참여 작가들마다 이 수정 방향에 대한 생각이 달라서 설득하는 데 정말 애를 먹었습니다. 결과만 놓고 보면 그 출판사와는 계약하지 못했지만, 그때 수정한 기획안과 시놉시스로 다른 출판사와 무사히 계약하고 이렇게 책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참여 작가들을 설득해서 한 차례 수정했던 시놉시스로 계약을 따냈을 때 정말 큰 보람을 느꼈습니다.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 여러 작가님이 공동 작업을 하는 앤솔로지가 한국에서는 붐인 듯합니다. 앤솔로지의 장점은 무엇이고, 발전 방향은 어떻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앤솔러지의 장점은 여러 작가의 다양한 수작을 동시에 읽을 수 있다는 점이고, 바로 이 점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나올 겁니다. 하지만 작가마다 작품의 결이 다르기에 자칫 산만해 보일 수 있다는 단점도 있습니다. 그래서 앤솔러지는 기획 의도와 주제가 제일 중요합니다. 하나의 강력한 주제가 있어야 여러 단편이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습니다. 또한 기획 의도와 주제가 시대정신을 반영하지 못한다면 출판 시장에서 외면받을 수 있다는 점도 주의해야 합니다.
앤솔러지는 기획 단계에서부터 세상의 흐름을 읽으려는 많은 고민과 노력이 병행되지 않는다면 개인 작품집보다 좋은 성과를 거두기 어렵다고 봅니다. 앞으로 시대와 사회에 걸맞은 주제를 선보이고자 심혈을 기울이는 앤솔러지가 큰 성과를 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박소해
이야기 세계 여행자이자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몽상가. 선과 악을 넘어 인간 본성을 깊숙이 다루는 소설을 쓰고자 한다. 2023년 <해녀의 아들>로 한국추리문학상 제17회 황금펜상을 수상했다. 《한국추리문학상 황금펜상 수상작품집: 2023 제17회》, 앤솔러지 《고통과 환희의 서》, 《인덱스 판타지: 에고 웨폰》, 《네메시스》 등에 참여했다.
추천 기사
<빗물>,<WATERS>,<이작>,<박소해>,<홍정기>,<사마란>,<전건우> 저15,300원(10% + 5%)
#세상의 이면을 보는 호러 작가 7인 × 그들이 사랑하는 섬 제주도 #아름다운 섬과 섬에 깃든 그림자, 그 환상과 현실을 조율해 낸 7편의 이야기 ‘장르 소설이 사회와 역사를 다룰 수 있을까?’ 호러 작가 7명이 의기투합한 앤솔러지 《고딕×호러×제주》는 이 의문에 대한 답이다. ‘제주도’ 하면 이국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