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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우 칼럼] 도움받을 용기

김지우의 굴러서 세계 속으로 – 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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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경우, 지민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는 몸이 불편한 게 아니라 도움받기 아티스트예요.’ 정도쯤으로 활용할 수 있겠다. 그 능청스러움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2024.07.12)


휠체어를 타고 세상을 누비는 구르님 김지우의 여행기.
격주 금요일 연재됩니다.

pexels.

“우리는 도움 요청 아티스트야.” 휠체어를 타는 동생 지민이가 멜버른으로 여행 왔을 때 한 말이다. 나는 도움을 청할 때면 지민의 이 능청스러움을 기억해 낸다. 그리고 아티스트처럼, 전문가다운 모습으로 이렇게 묻는다. “I’m sorry, could you give me a hand, please? (죄송한데요, 좀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OO이 아니라 OO 아티스트예요’는 요즘 자주 쓰이는 밈인데, 자신의 (보통 조금 부정적인) 현재 상황을 긍정적으로 표현할 때 쓴다. 예를 들어 ‘저는 백수가 아니라 집 지키기 아티스트예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의 경우, 지민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는 몸이 불편한 게 아니라 도움받기 아티스트예요.’ 정도쯤으로 활용할 수 있겠다. 그 능청스러움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여행을 하며 홀로 도전할 수 있었던 많은 것들에 대해 소개했지만, 도움받을 일 역시 참으로 많았다. 하지만 나와 지민이 그럼에도 호주에서 자유롭다고 느꼈던 이유는, 이 ‘도움받기 예술’이 잘 작동했기 때문이다.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에서 김원영 작가는 ‘존엄을 구성하는 퍼포먼스’에 대해 얘기한다. 이 장에는 친구들과 함께 계곡으로 놀러 나가지 못하는 어린 작가를 보며 ‘나 피부관리 해야 한다’며 옆에 드러눕던 초등학생 시절의 친구나, 카페에서 옆자리의 자폐가 있는 아이가 내는 소리를 부러 못 들은 체하는 대학생 등이 그려진다. 작가는 이것을 일종의 상호작용이자 연극과 같은 퍼포먼스로 비유한 바 있다. 나는 이 ‘도움받기 예술’ 역시 하나의 유려한 연극이라고 느낀다.


도움이 필요하세요?

브리즈번에 머물 때, ‘도움 요청 아티스트’라는 말을 종종 떠올렸다. 멜버른보다 브리즈번의 도시 주변은 가파르거나 지형이 휠체어에는 험난한 곳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난 아티스트로서 최선을 다하며 도움을 청했다. 내 아티스틱한 면모가 발휘된 날이 있는데, 그날은 야경이 아름답다는 캥거루 포인트의 클리프스 공원에 가보기로 한 날이었다. 마침 근처에 평점이 좋은 피시앤칩스 레스토랑이 있어서, 저녁을 해결하고 야경을 본 뒤 돌아오면 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클리프(절벽)라는 이름에서 알아봤어야 했는데…

낮에는 도서관에서 한국 소설을 읽고, 오후에는 보타닉 공원에 들러 한참 시간을 보내다가 휠체어로 강을 건너 캥거루 포인트까지 걸어... 아니 굴러 가기로 했다. (난 걷지 않으니 구른다는 표현이 맞지만, 관용적인 표현으로 ‘걷다’를 쓰도록 하겠다.) 나무에서 끝없이 꽃가루가 떨어지는 숲길을 지나 강가에 도착했을 때는, 좋아하는 아티스트가 공원에서 콘서트를 열고 있었다. 참여할 수 있었다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무계획형에게 이런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의 노래를 들으며 캥거루 포인트로 향했다.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넜다. 10분 정도만 더 걸으면 레스토랑에 도착한다. 문제가 생겼다. 분명 구글맵에 ‘거의 모든 곳이 평지’인 경로라고 표시되어 있었는데,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은 고가도로로 연결되는 곡선 도로였다. 그 경사와 곡률이 상당해서인지, 한 행인은 자전거를 손으로 끌고 내려오고 있었다. 나는 애써 부정하며 지도를 잘못 본 것이라 생각했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지도 보기에 소질이 있었다.

망연히 도로를 올려다보고 있는데, 아까 자전거를 끌고 내려오던 행인이 나를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뒷통수로 느낄 수 있었다. 여기서 ‘도움받기 예술’은 진가를 발휘한다. 우리 둘은 서로를 인지하고 있지만, 섣불리 상대를 판단하진 않는다. 어떠한 공기가 형성된다. 누군가 말을 시작하면, 적극적으로 다음 행동을 선보이겠다는 약간의 텐션도 함께한다.

내가 먼저 대사를 시작한다. “죄송한데요, 이곳으로 가려면 이 길 하나밖에 없나요?” 그는 한달음에 내게 가까이 와서 다음 대사를 잇는다. “네, 맞아요.” 그리고 잠시 정적, 이제 다음 대사를 칠 차례다. “혹시 죄송하지만… 이 도로 위에까지 휠체어 좀 밀어주실 수 있을까요?” 그는 화답한다. “물론이죠.”

그는 인도 변에 자전거를 내버려두고 내 휠체어 손잡이를 잡는다. 약 3분 정도, 우리는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면서 가파른 도로를 오른다. 마침내 평평한 곳에 도착했을 때, 나는 말한다. “고맙습니다. 혼자였으면 못 왔을 거예요.” 그는 웃으며 퇴장한다. 이 예술은 언제든 시작하고 언제든 끝날 수 있다. 나의 경우, 바로 3분 뒤 즉흥 연극이 다시 시작되었다는 게 약간 문제이긴 했다. 평평한 곳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거의 체감 70도는 되는 경사가 다시 나타난 것이다. 호기롭게 혼자 오르기 시작했다가, 중간쯤 왔을 때 어중간한 상태로 경직되고 말았다. 내 휠체어는 보조 모터가 달렸지만 수동 휠체어에 가까워서, 힘이 모자라면 경사 아래로 추락하는 것이었고 힘이 넘쳐도 뒤로 홀랑 넘어가 뒤통수를 깰 수 있었다. 10시간 같은 1분이 흐르고… 나타난 사람에게 또다시 대사를 건넨다. “도와주세요!” 그녀는 달려와 화답한다. “이렇게 밀면 될까요?”

두 명의 걷는 사람의 손길, 힘을 내준 휠체어 모터와 경사에서 흘린 식은땀 덕분에 절벽 위의 피시앤칩스는 정말 맛있었다. 공원에 도착했을 때 마땅히 올라갈 경사가 없어서, 인도 위 벤치에 앉아 있던 남성 두 명이 휠체어째로 나를 들어올려주는 행위예술을 선보여주기도 했다. 이 모든 퍼포먼스 이후에 마주했던 석양은 정말 아름다웠다. 강가는 검은색으로 부서지고 있었고, 그 검은 물결 너머에 오늘 하루 중 가장 붉을 태양이 지고 있었다. 그 해를 숨겨주듯 강가 주변 빌딩들은 우뚝 솟아 있어, 나는 언제 저 빨간 해가 모두 몸을 숨길 수 있을지를 한참도록 궁금해했다. 비록 다시 그 경사를 내려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마음 깊이 감상하지는 못했지만, 다행히 한 시간에 한 번 오는 버스를 잡아서 그 경사를 다시 마주하는 일은 없었다.

 

도움받을 용기

장애를 가지고 살면 얼마간 모두가 ‘도움받기 아티스트’가 된다. 이전에는 내가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수치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모든 것을 내가 해내야 한다고 생각했고, 당연히 그러지 못했으므로 그때마다 실패자가 되었다. 대뜸 도움을 준다고 다가오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느끼기도 했다.

이제는 안다. ‘도움받기 예술’이 매끄럽고 우아하게 공연될 때 그것이 얼마나 매력적인지를. 그 공연의 매력을 연기자를 알아보고 첫 대사를 던졌을 때, 그에 화답하는 대사를 받을 때 얼마나 기쁜지를. 우리 둘 다 무대에 올랐음을 알고 있지만 옳은 타이밍을 살피며 끝끝내 홀로 해낼 때의 성취를. 여전히 대사의 호흡이 맞지 않아 민망할 때도 있고, 내가 준비되지 않았는데 즉흥연기를 시작하는 사람을 만나면 당황스럽기도 하겠지만, 손발이 착착 맞는 무대를 끝낸 뒤에는 성공적인 배우가 된 기분이 든다. 나도 그도 이 극을 오래 기억할 것이다. 그 기쁜 순간을 위해서라도, 공기를 읽고, 여유 있게 대사를 건네는 ‘아티스트’의 자질을 갈고 닦아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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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지우(구르님)

휠체어가 굴러서 ‘구르님’. 김지우보다 익숙해진 이름으로 유튜브, 인스타그램에서 활동한다. ‘구르는’ 삶에 대해 할 말이 많아서 영상을 만들고 글을 쓴다. 쓴 책으로 『하고 싶은 말이 많고요, 구릅니다』, 『오늘도 구르는 중』, 『우리의 목소리를 공부하라』(공저)가 있다. 장애의 과거와 미래보다, 살아가고 있는 '현재'를 이야기하고 싶다. 최근에는 홀로 여행하는 즐거움을 깨달았다. 계획을 세우는 데 소질이 없는 탓에 다음에는 어디로 구를지 알 수 없지만, 멀리 굴러갈 의지와 바퀴만은 탄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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