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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훈의 잃어버린 편집을 찾아서] 재현의 윤리와 출판사의 책임
김영훈 칼럼 – 8화
홍세화 선생의 마지막 인터뷰 속 질문을 이렇게 변주해 보면 어떨까. 우리는 독자인가, 소비자인가. 또한 우리는 출판사인가, 콘텐츠 제작유통업체인가. (2024.07.01)
지금 출판계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나요? 김영훈 편집자가 말해주는 출판 이야기. |
"명예를 훼손하고 사생활을 침해해 소설의 공표에는 위법성이 있다." 1999년 6월, 일본 법원은 유미리(柳美里) 작가의 소설 『돌에서 헤엄치는 물고기』(한국문원, 1995)에 출판 금지를 명령하고, 피해자에게 130만 엔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작가가 소설에 자신의 신체 부위·출신 대학·가족 사항을 무단으로 서술함으로써, 사생활을 침해당했다는 피해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의 결과였다. 일찍부터 ‘사소설’이 쓰이고 읽힌 일본에서 명예훼손 문제는 꾸준히 제기되었으나, 법원이 사생활 침해를 이유로 출판 금지와 손해배상을 판결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유미리 작가는 항소했다. 이후 재판에는 한국 독자들에게도 익숙한 오에 겐자부로를 비롯해 일본 문인들이 증인으로 출석해 ‘표현의 자유’와 ‘인권의 보호’를 두고 격론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책을 출간한 출판사 신초샤(新潮社)가 작가와 함께 피고로서 재판에 참여한 점이 눈길을 끈다. 재판이 진행 중이었던 2001년 8월, 출판사는 「돌에서 헤엄치는 물고기 재판 결과 보고」(「石に泳ぐ魚」裁判?過報告)라는 글을 통해 ‘표현의 자유는 최대한 보장되어야 한다’며 입장을 거듭 밝혔다. 하지만 항소심과 상고심에서도 1심 판결은 바뀌지 않았고, 2003년이 되어서야 작가와 출판사는 문제가 된 표현을 수정 및 삭제한 개정판을 출간한다.
20년 전 일본 작가의 재판 소식을 새삼스럽게 꺼낸 이유는, 역시나 최근 또다시 도마 위에 오른 ‘재현의 윤리’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다. 6월 22일 정지돈 작가가 소설에 타인의 사생활을 무단으로 인용했다는 의혹이 처음 제기되었다. 6월 25일 정지돈 작가는 입장문을 게재했고, 같은 날 출판사 현대문학은 “작가의 요청에 따라” 『야간 경비원의 일기』(2019)를 판매 중지했다. 6월 27일에는 출판사 은행나무도 인스타그램에 입장문을 올렸다. 『브레이브 뉴 휴먼』(2024)을 편집하는 과정에서 문제 사실을 확인하지 못했음을 인정하고 피해자의 아픔에 사과한 후 작가와 사후 대책을 논의 중이라고 알렸다. 처음 문제가 제기된 날로부터 닷새 동안의 일이었다.
기시감이 든다. 2020년 김봉곤 작가가 단편 소설에서 사적 대화를 ‘무단 인용’했다는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트위터에서 문제가 제기된 건 7월 10일이었다. 하루 뒤인 11일 김봉곤 작가가 입장문을 공개했고, 16일 문학동네와 창비는 문제가 된 내용을 수정하겠다고 공지했다. 하지만 이튿날인 17일 작가의 다른 작품에서 또 다른 타인의 사생활이 침해되었다는 문제가 추가로 제기되었다. 같은 달 21일 작가는 사과문을 게재했고, 문학동네와 창비는 문제가 제기된 소설이 수록된 『여름, 스피드』(문학동네, 2018),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문학동네, 2020), 『시절과 기분』(창비, 2020)을 절판하고 구매한 독자에게는 환불하겠다고 공지했다.
2020년부터 2024년까지, 한국에서 ‘재현의 윤리’가 제기되었을 때마다 출판사가 보인 태도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과했고, 문제가 제기된 소설이 수록된 도서의 판매를 중지했다. 판매된 도서를 회수하고 심지어 환불하기도 했다. 그 모든 결정은 최초 문제 제기로부터 열흘 이내에 이루어졌다. 앞서 이야기한 유미리 작가의 사례 속 출판사와 비교하면, 그 태도와 속도의 차이는 현격하다. 물론 출판 내외부의 환경 변화를 무시할 수는 없다. 지금의 출판사는 문학 소비자이자 독자 주체가 조성한 온라인 공간에서의 여론에 즉각 답변해야 한다는 압박을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고, 그 결과가 바로 ‘발 빠른’ 사과와 절판이었으며, 그것으로 출판사는 사건을 종결했(다고 여겼)다. 하지만 비슷한 문제가 반복되고 있다는 점에서 사안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에 있다.
무엇보다 출판사의 바람과 달리, 출판사의 일련의 결정들은 어느 누구에게도 만족을 제공하지 못했다. 대중에게는 미온적 태도로 가해자를 옹호한다고 비난받았고, 작가에게는 아무런 보호를 제공하지 않았다. 독자들은 불매운동으로 출판사를 압박하고, 작가와 출판사의 관계는 무너졌다. 최근 작가들이 직접 출판사를 차리는 사례가 늘고 있는 것이 과연 인세율이나 인세 지급의 투명성 문제 때문만일까?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출판사들이 보이는 비슷한 태도들, 이를테면 문제 제기 이후의 논의 과정에서 기꺼이 배제되기를 선택하는 출판사의 태도에 대한 작가들의 응답이란 심증을 지우기 어렵다.
출판사는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무엇을 해야 할까? 사실 이 질문은 출판사는 무엇이고 또 무엇이어야 하는지 묻는 질문과 다르지 않다. 출판사가 단지 책이라는 상품을 생산하고 유통하는 업체만은 아니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출판사에게는 당면한 사안을 윤리적 탐구와 이해와 성찰로 나아가게 만들 역할과 책임이 있다. 홍세화 선생의 마지막 인터뷰 속 질문을 이렇게 변주해 보면 어떨까. 우리는 독자인가, 소비자인가. 또한 우리는 출판사인가, 콘텐츠 제작유통업체인가. ‘사과 후 절판’ 또는 ‘침묵과 비호’라는 양자택일의 굴레에서 벗어날 상상력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에서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추신
8화를 끝으로 ‘김영훈의 잃어버린 편집을 찾아서’ 연재를 마칩니다. 지금까지 읽어주시고 의견을 나눠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총총.
참고자료
“日법원, 재일동포 여류작가 소설 출판금지 명령”, 『연합뉴스』, 1999.06.22.
“재일동포 작가 柳美里씨 패소 확정”, 『연합뉴스』, 2002.09.14
“'무단 인용 논란' 소설가 김봉곤 "젊은작가상 반납하겠다…모든 일에 사죄"”, 『경향신문』, 2020.07.21
“소설가 정지돈 "제 잘못" 사과했지만…'사생활 동의 없는 재현' 언제까지”, 『한국일보』, 2024.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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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서너 곳의 출판사에서 책을 편집했다. 만들 수 있는 책을 만들고 싶다. 한결같이 타이완과 홍콩을 사랑한다. X(트위터였던 것) @bookeditor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