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학X뮤지컬] 소리극 <체공녀 강주룡> 홍단비 극작가 인터뷰
채널예스X더뮤지컬 합동 기획 ‘한국 문학과 창작 뮤지컬’ 극작가 인터뷰 ①
2024년에도 어딘가의 위에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자꾸만 팔짱을 끼고 끈끈하게 한 발 한 발 나아갔으면 좋겠어요. (2024.04.17)
독자들이 사랑하는 한국문학이 뮤지컬 무대 위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됩니다. 문학성과 재미를 겸비한 뮤지컬의 세계에서 독자와 관객이 교감하며 한층 더 풍부해질 이야기. 채널예스와 더뮤지컬이 함께 들여다 보았습니다.
한반도 역사상 최초의 고공 농성을 벌인 강주룡 지사는 광목천을 타고 12m 높이 을밀대에 올라 “여성 해방, 노동 해방”을 외쳤다. 『체공녀 강주룡』은 항일 운동가이자 노동 운동가인 강주룡의 일대기를 소설로 담아 제23회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했다. 박서련 작가는 “이 소설이 다른 장르로 만들어진다면, 우리 소리였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 말에 응답이라도 하듯, 판소리로 평화와 인권, 시대의 아픔을 노래하는 전통공연예술단체 바닥소리는 강주룡의 일대기를 소리판으로 다시 불러냈다. 소리극 <체공녀 강주룡>은 소설을 원작으로 강주룡의 일대기를 현대적인 판소리와 음악을 더해 풀어낸다. 인생 흐름에 따라 4명의 배우가 강주룡을 연기하는 독특한 구조로 재해석해 2023년 초연 당시 큰 호응을 불러일으켰고, 올해 다시 재연 무대를 올렸다. 소설과는 다른 매력으로 강주룡의 이야기를 전한 홍단비 작가를 서면으로 만나 작업 전반의 과정을 들어보았다.
소설을 판소리로 각색하는 과정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무대화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은 무엇인가요?
원작의 모든 내용을 담기는 어려웠어요. 적지 않은 부분들을 걷어냈는데, ‘아이고 이 장면 너무 좋은데’ 하면서 끙끙 앓을 정도로 너무 아쉬웠어요. 각색을 하면서 가장 염두에 둔 부분은 소설을 안 읽으신 관객분들에게도 우리 공연이 한 편의 완성된 이야기로 다가가는 것이었습니다. 주변 서사를 걷어내더라도, 강주룡 지사가 어떤 소용돌이를 지나 을밀대 지붕 위에 기어이 올라앉았는지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흐르는 물처럼 거침없이 나아가는 것에 집중했습니다.
소설의 본질적인 이야기를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공연만이 할 수 있는 지점을 포함하는 것도 중요했습니다. 우리 극의 큰 틀인 ‘쏟아지는 기억’이라는 콘셉트 안에서 ‘기억들이 얽히는 부분’에 특히 신경을 많이 썼어요. 다른 시간대에서 떠오르는 기억의 파편들, 미래의 자기 모습을 목격하는 장면 같은 것인데요. 그중에서도 모든 시간대의 주룡이 만나 이야기하는 장면을 가장 많이 신경을 썼어요. 처음 만지는 총이 거북했던 주룡과 두 손으로 친구의 아이를 받았던 주룡, 노조에 들어가는 주룡, 그리고 이 모두를 대표하는 주룡이 마주해 서로의 눈을, 심연을 들여다보고 깨닫는 거죠. 그리고 선언하는 거예요. 나는, 우리는 떳떳하게 살았고 이제는 준비가 됐다고요.
주인공 강주룡을 크게는 네 명, 때로는 배우 전체가 나누어 연기합니다. 한 인물을 여러 역할로 나눈 이유가 궁금합니다.
저는 공연에서 희곡이 100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하나의 작품이 무대로 오르기까지는 정말 많은 영역의 협업이 필요하니까요. 희곡, 연출, 배우, 무대, 조명, 이 외에도 정말 많은 조각이 합쳐져서 100이 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형태인 것 같아요. 『체공녀 강주룡』은 그 자체로 100을 해내는 소설이라 극화가 쉽지 않겠다는 인상이 있었어요. 그래서 의도적으로 틈을 만들어봤어요. 2막 구성이었던 소설을 3막으로 나누고 막 별로 주룡을 다른 배우들이 수행하고요. 배우가 바뀌는 지점들을 그대로 노출해서 틈을 좀 더 벌려보고자 했습니다. 관객이 배우가 바뀐다는 생각이 들면 자연스럽게 ‘아, 이건 공연이지’ 하는 생각이 들도록요. 결국 이 공연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대 위가 아닌 각자의 현실에 있기 때문이죠.
시작 부분에는 도창* 역할을 하는 주룡이 나와서 막을 엽니다. 이 부분이 판소리의 특징을 확 드러내는 것 같았어요.
세 명의 주룡을 설정한 후에는 이 모두를 대표하는 주룡(도창)이 있으면 연극성이 극대화되면서 극의 형식이 정해질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를 0주룡으로 이름 붙였어요. 0주룡이 빈 무대에 나와 관객들에게 말도 걸고, 인사도 건네고 이야기를 시작하는 거죠. 내가 지금부터 이야기를 할 건데, 이건 내 기억이라고요. 혼자 하긴 뭣해서 친구들을 좀 불렀고, 쉽지는 않겠지만 열심히 할 테니 기특하고 어여쁘게 봐주시라고요. 이렇게 시작하면 우리 극의 형식을 당차게 말씀드리면서, 판소리에 썩 어울리는 도입이 될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주인공 강주룡은 소설 속 인물이기도 하지만 실존 인물이기도 합니다. 인물을 무대로 불러오면서 참고한 것이 있나요?
역사적 사실이나 인물 자체보다는 이미지를 많이 찾아봤어요. 강주룡 지사의 사진, 여러 각도에서 찍은 을밀대와 당시 시장 사진, 그 속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을 주로 찾아봤어요. 개인적으로 실존 인물을 다루는 작품에 참여할 때는 이미지를 찾아보는 것 같아요. 이 인물은 허구가 아니라 실제로 숨을 쉬고 거리를 걷던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않으려고요. 물론 마음이 퍽 무거워지지만 그 무게를 잊지 않으려고 해요. 이미지를 훑어본 후에는 원작 소설을 정말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많이 읽었어요.
맛깔나는 이북 사투리가 판소리와 어우러지는 부분도 인상적이었어요.
소설을 읽어보면 이북 사투리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도 직관적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대사가 쓰여 있지만, 저는 대본 작업을 해야 하니 이북 사투리 관련 채록이나 서적을 많이 찾아봤습니다. 채록에 담긴 사투리를 그대로 쓰면 이해가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공연은 글과 달라서 한 번 지나가면 다시 되짚어 보기 어렵잖아요. 무슨 말이지? 방금 뭐라고 한 거지? 이런 해소되지 않는 불필요한 궁금함은 피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최대한 원작의 톤을 유지하면서 대사를 들었을 때 직관적으로, 혹은 맥락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을 쓰려고 했어요. 오히려 배우분들께서 너무 잘 구현해 주셔서 놀랍고 감사했어요.
2막에서 주룡의 공장 동무인 삼이가 아이를 출산하는 장면은 공연에서 새로 추가된 장면이죠.
그쯤 환기가 되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었어요. 원작을 보면 삼이가 주룡보다 먼저 노조에 가입하는데 관객들은 현실에 순응하기도 하고 겁도 많고 다정한 삼이만 봤잖아요. 제가 출산을 경험한 적은 없지만 그것이 아주 고된 일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으니, 이렇게 고되고 아프게 아이를 낳는 장면을 보여드리면 관객분들도 삼이가 노조에 들어갈 만하다고 느끼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원작에는 없는 장면이라서 작업할 때에 또 다른 흥겨움이 있었어요. 이왕 만드는 거 가사에 판소리 느낌 담뿍 담아서 원 없이 해보자는 마음이었죠.
배우들이 모두 판소리를 하는 소리꾼이고, 직접 작창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소리꾼들의 판소리 작창을 각본의 호흡과 맞추는 과정도 필요했을 것 같은데, 작업 과정은 어땠나요?
소리극 작업이 처음이라 각 장면에 소리를 넣는 것이 굉장히 어려웠어요. 어디에 노래가 들어가야 할지 감이 안 잡히더라고요. 그러다 고선웅 연출님께서 조언을 해주셨어요. 사람은 그냥 말을 할 때도 말에 마음을 담고 또 마음이 바뀌면 말이 바뀐다, 뮤지컬에서는 그게 노래고 소리극에서는 소리니, 그저 말이라고 생각하라고 말씀해 주셨어요. 그 말을 듣고 나니 쑥 풀리더라고요. 마음이 붙고 인물이 바뀌는 대목을 찾으니 자연스럽게 가사가 써졌던 것 같아요. 그다음에는 기술적으로 말의 운율이나 대구에 신경을 썼고, 계속 입으로 중얼중얼해보면서 말맛을 살리려고 했습니다.
대목과 가사가 담긴 대본이 완성된 후에 소리꾼들이 나누어 작창을 해주셨어요. 김승진 감독님과 모든 배우들, 연출님께서 먼저 제안을 주시기도 했고 만들어진 음악이나 장단을 듣고 제가 의견을 내기도 하면서 수정 작업을 거쳤습니다. 좋은 사람들이 모여 작업을 하다 보니 배우는 것도 많고 참 즐거운 작업 과정이었어요. 무엇보다 작곡, 작창된 노래가 너무 좋았습니다. 제가 쓴 글이 노래가 되는 경험을 처음 했는데, 정말 짜릿했어요. 종이에 붙어 있던 글씨가 정말 마음이 되고 말이 되더라고요. 판소리라는 장르의 힘이기도 하겠지만 소리꾼과 작곡가의 힘과 노고가 컸다고 생각해요.
강주룡은 우리나라 최초로 고공 농성을 한 노동 운동가입니다. “저기 사람이 있다”처럼 지금의 우리 사회와 겹쳐 보이는 대사도 참 많았는데요. 작가님께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는 무엇인가요?
오프닝 곡의 ‘아주 작은 것에서 아주 큰 것이 난다’라는 가사를 가장 좋아합니다. 극의 시작이지만 대본 작업을 할 때는 가장 마지막에 완성했어요. 이 대사에는 사연이 있는데요. 리딩 진행 후에 이 극을 대표할 만한 노래가 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피드백을 받고 작업에 들어갔는데, 처음에는 다른 뮤지컬을 참고하면서 서곡 느낌을 흉내 내려고 했어요. 어느 작품에 붙여도 크게 이상하지 않은 가사가 나왔고, 어설프게 따라 하다 보니 작업 시간도 오래 걸렸어요. 그 가사로 노래가 나오고 배우들은 이미 연습에 들어갔는데 저는 마음이 충만하지 못하고 괴로웠어요.
그때 정지혜 대표님과 이기쁨 연출님께서 다시 시작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니 가사를 다시 써도 좋다고 해주셨어요. 정말 하고 싶은 말을 써달라고요. 속으로 ‘들켰다’ 싶었어요. 그날 집에 가는 버스에서 가사를 완성했어요. ‘아주 작은 것에서 아주 큰 것이 난다. 작고 작은 것들이 자꾸만 모여서 자꾸만 팔짱을 끼니 큰 것이 된다.’ 이 얘기를 하고 싶었나 봐요.
<체공녀 강주룡>이 관객에게 어떤 작품이 되기를 바라시나요?
저희 공연이 퍽 옛날이야기라고 생각하실 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2024년에도 어딘가의 위에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자꾸만 팔짱을 끼고 끈끈하게 한 발 한 발 나아갔으면 좋겠어요.
극작뿐만 아니라 연출도 함께하고 계십니다. 앞으로 어떤 작품을 만들고 싶으신가요?
만나면 즐거운 동료들과 함께 낭독극을 준비하고 있어요. 두 명의 연출이 각자의 작품을 묶어 하나의 프로젝트로 공연을 하는데요. 저는 참여 연출 중 한 명으로 신작을 쓰고 연출하려고 합니다. 아직 초고 작업 중이에요. 팀 디오티의 <스케치 프로젝트>를 5월 첫 주에 공연합니다! 공동 각색하고 연출한 음악극 <붉은머리 안>은 올해 투어를 앞두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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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집어진 인간을 마주하는 뒤집어진 마음소설은 1, 2부로 나뉘어 강주룡의 삶을 자상히 이야기한다. 스물이라는 늦은 나이에 다섯 살 연하의 최전빈과 혼례를 치르고, 남편을 따라 독립군 부대에 들어가며, 가족을 따라 강계에서 간도, 다시 사리원으로 이어지던 시절의 이야기가 나오는 1부와, 사리원을 떠나 도착한 평양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