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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기의 시절 리뷰] “인생은 쉬이 고장 나지 않는다” 라스트 리페어 샵

이슬기 칼럼 1화 - 영화 <라스트 리페어 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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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쉬이 고장 나지 않으며, 고장 난 줄 알았다고 한들 수리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장소가 ‘라스트 리페어 샵’이다. (2024.03.21)


세상의 행간을 읽는 이슬기 기자의 콘텐츠 리뷰.
격주 목요일 연재됩니다.



올 아카데미 시상식을 보는 내내 마음이 착잡했다. 여우주연상 수상자 엠마 스톤과 남우조연상 수상자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연출한 ‘동양인 패싱 씬’이 두고두고 기억에 남았기 때문이다. 각각 해당 부문 전년도 수상자이자 올해 시상자인 양쯔충과 키 호이 콴이 졸지에 ‘트로피 거치대’가 되었다는 얘기. 긴말 필요 없이 영상을 한 번씩들 봤으면 좋겠다. 그 장면을 보노라면 어떤 자리에서 ‘이너 서클’이 아니었던, 객식구였던 적이 있는 사람이면 아는 불쾌감의 편린이 훅 올라온다. 물론 엠마와 로다주가 의도한 행동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친소 관계에 따라 눈앞에 보이는 더욱 절친한 백인 동료에게 달려가고픈 마음이었다 하더라도. 아시아인들이면 다 아는 ‘소리 없는 배제’의 일면이었기 때문이다.

올해 오스카 단편 다큐멘터리상을 수상한 <라스트 리페어 샵 (The Last Repair Shop)>은 그날 아카데미가 내보인 불편한 장면과는 대척점에 있는 작품이다. ‘최후’를 뜻하는 ‘라스트’라는 말이 내뿜는 음울함, 비장함과 달리 이 ‘마지막 수리점’이 뜻하는 것은 ‘사회적 안전망’이다. 

세계 음반 산업의 중심지인 미국 LA는 수선한 악기를 아이들에게 무료로 제공하는, 미국에서도 몇 안 남은 학구다. 그 덕에 이곳의 아이들은 바이올린이나 첼로, 커다란 골뱅이 같은 수자폰 등의 악기들을 접하고 음악적 삶을 꿈꾸게 된다. LA의 ‘라스트 리페어 샵’은 “아이들 인생도 쉽지 않지만, 그래도 악기 연주와 관련해서라면 최대한 즐겁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곳”(현악기 수리공 다나 앳킨슨)이다.

인트로에서부터 기분 좋은 함박웃음을 선보이는 열두 살 소녀 포르셰 브링커도 그런 케이스 중 하나다. 이 천진한 소녀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식구들이 ‘백투백’(back to back·나는 ‘백투백’이란 야구에서 두 타자 연속 홈런을 뜻하는 ‘백투백 홈런’ 할 때나 쓰는 말인 줄 알았다)으로 돌아가며 아픈 것이다. 그래도 학교에서 바이올린을 주었기 때문에, 그 좋아하는 바이올린을 혼자라도 연주할 수 있다. 언젠가는 가족들 앞에서 선보일 날을 기대하며.

‘라스트 리페어 샵’은 고장 난 악기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일하는 장인들에게도 마지막 보루 같은 곳이다. 현재까지도 사회적 테러의 대상인 성소수자, 멕시코에서 온 싱글맘, 아르메니아에서 온 전쟁 난민이 이곳에서 자신의 삶처럼 고장난 악기를 쓸고 닦고 어루만졌다.

동성애자인 다나는 자신의 인생을 ‘잡음이 울리는 고장 난 첼로’라고 생각했다. 스스로를 외면하거나, 사회적 기피의 대상이 되거나, 아니면 자살밖에는 선택지가 없으리라던 시절에 그는 ‘음악은 수영과 같다’던 어머니의 말을 상기했다. 언제나 그 순간에 존재하는 리듬, 내가 멈추면 함께 사라져 버리는 음악. 그는 스스로의 성적 취향에 대해 ‘결정할 게 아니라 받아들여야 하는 문제’임을 깨달았다. “고장 난 게 아니었어요. 고칠 필요가 없었죠. 그래서 저를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다나처럼 인생은 쉬이 고장 나지 않으며, 고장 난 줄 알았다고 한들 수리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장소가 ‘라스트 리페어 샵’이다.

마지막 오케스트라 장면. 리페어 샵의 장인들과 아이들이 함께 하모니를 맞춘다. 인종, 성별이나 성적 취향, 노소에 관계없이 한데 어울려 만들어내는 선율 위로, 그들이 지나온 음악적 삶의 여정과 앞으로의 미래가 그려진다. 음악에서의 하모니는 다양한 소리들의 힘을 한데 모아, 크고 작은 실수가 있을지언정 저마다의 존재를 믿고 가는 것이다. 기꺼이 내가 너의 뒷배임을 자임하는 ‘라스트 리페어 샵’이 음악의 본질에 닿아 있음을 느끼게 하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열두 살 포르셰는 하늘색 원피스를 입고 오스카 시상대에 올랐다. 그 순간이 올 아카데미 시상식의 하이라이트였다. 포르셰 옆에 선 두 감독 중 한 명인 크리스 보워스도 LA 공립 학교 출신으로 ‘라스트 리페어 샵’이 조율한 피아노를 연주한 이력이 있다. 그리고 현재는 할리우드에서 가장 잘나가는 음악 감독이다. ‘라스트 리페어 샵’의 수혜자였던 그가 만든 다큐멘터리 덕에 수리점에는 전 세계적으로 온정의 손길이 이어지고 있다.

이렇듯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꿈을 지지하는 수상작 ‘라스트 리페어 샵’의 철학에 비해, 아카데미의 행보는 늘 아쉬움이 많다. 2016년 ‘오스카 쏘 화이트’(#OscarSoWhite) 해시태그 운동 이후 아카데미는 여성, 소수인종 등 다양성을 강화하려는 노력이 이어 왔다. 올해는 최고상인 작품상 후보 조건에도 ‘다양성 기준’을 추가했다. 그러나 엠마 스톤과 로다주가 빚어낸 시상식의 한 단면에서 보듯, ‘미세 차별’은 여전한 것이 현실이다. 미세 차별을 넘어 어떻게 ‘라스트 리페어 샵’의 비전을 구현할 것인지, 아카데미는 전 세계 영화 팬들에게 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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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슬기 기자

글 쓰고 말하며 사는 기자, 칼럼니스트. 1988년 대구 출생, 창원 출신. 한양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서울신문》에서 9년간 사회부, 문화부, 젠더연구소 기자로 일했다. 현재는 프리랜서 기자로 《오마이뉴스》에 〈이슬기의 뉴스 비틀기〉를 연재 중이다. 여성의 눈으로 세상의 행간을 읽는 일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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