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돌아와야 할 명분 - 청하 ‘I’m Ready’

청하 ‘I’m Ready’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불길한 신스음와 함께 이제 막 깨어난 듯 꿈틀대는 댄서들과의 한 몸처럼 움직이는 청하의 움직임에서 비로소 그가 우리 곁으로 돌아왔음을 실감한다. (2024.03.06)

청하 싱글 'EENIE MEENIE' 티저 사진 


모든 것에는 명분이 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일도 명분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저 덩그러니 자리만 차지하지 않나 싶은 존재에도 저마다의 구실과 도리가 깃든다. 세상의 모든 이치가 거의 그대로, 나아가 때로는 아플 정도로 차갑게 적용되는 케이팝 세상이라고 크게 다를 리 없다. 성실한 연습과 뛰어난 재능은 데뷔를 낳고, 꾸준히 쌓인 미니 앨범은 정규작의 발판이 된다. 든든한 지지자들의 관심과 사랑이 쌓인 자리에서 가수는 자연스레 더 멀고 더 높은 곳을 꿈꾼다. 변수를 막지 못해 등장하는 갑작스러운 시련마저 다음 명분을 찾기 위한 좋은 구실이 된다. 명분이 명분을 품고, 명분이 명분을 낳는다.

청하의 지난 몇 년은 순탄치 않았다. 예상치 못한 변수였다. 솔로 데뷔 후의 여정이 ‘성장의 정석’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멋진 계단식이었기에 더욱 대비되었다. 청하는 2016년 출연한 서바이벌 프로그램 ‘프로듀스 101’에서 초반의 부진을 딛고 그룹 아이오아이로 최종 데뷔했고, 그룹 활동 마무리 후 곧바로 솔로로 데뷔했다. ‘Why Don't You Know’(2017), ‘Roller Coaster’(2018)가 차례로 좋은 반응을 얻었고, ‘벌써 12시’로 음악방송과 전국을 휩쓸었다. 노래와 함께 2019년을 청하의 해로 만든 그는 해외시장과 음악적 완성도를 새로운 목표로 삼았다. 슬기(레드벨벳), 신비(여자친구), 소연((여자)아이들)과 호흡을 맞춘 싱글 ‘Wow Thing’과 네 번째 미니 앨범 [Flourishing]으로 숨을 고른 뒤 글로벌 레이블 88라이징(88rising)과 손을 잡았다. 88라이징의 간판 래퍼 리치 브라이언(Rich Brian)과 싱글 ‘These Nights’를 발표했고, 레이블 컴필레이션 앨범에도 참여하며 자신에게 쏟아지는 주목의 폭을 넓혔다.

이어진 길에는 야망이 더욱 흘러넘쳤다. 첫 정규 앨범에 앞서 발표한 싱글 ‘Stay Tonight’과 ‘PLAY’는 지금까지 청하가 발표한 곡 가운데 가장 높은 완성도를 자랑했다. 집중한 건 음악만이 아니었다. ‘프로듀스 101’ 시절부터 극찬받은 춤은 레벨업 된 그의 음악과 꼭 어울리는 감도 높은 퍼포먼스로 옷을 갈아입었다. 하우스, 투스텝, 레게톤 등 다양한 음악 장르를 청하라는 필터를 통해 풀어낸 첫 정규 앨범 [Querencia](2021)는 말 그대로 ‘청하 유니버스’였다.


청하 싱글 'EENIE MEENIE' 티저 영상의 한 장면


총 4개 장으로 나누어진 앨범은 음악과 서사 모든 면에 있어 각자의 재능을 가진 창작자들이 합심해 오직 청하라는 한 사람을 변주하는 데 온 힘을 쏟은 작품이었다. 밀도가 상당했다. 청하는 이 앨범으로 한국대중음악상 ‘케이팝 앨범 부문’을 최초로 수상한 인물이 되었다. 아쉽게도, 질주는 거기까지였다. <Querencia>에 이어 다시 한번 공력을 모은 두 번째 앨범의 전반전 <Bare&Rare Pt.1> 활동은 지지부진했고, 그와 맞물려 소속사와의 갈등은 점점 깊어져만 갔다. 결국 2집의 나머지 반쪽 <Bare&Rare Pt.2>는 영영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채 청하는 지난 10월 박재범이 수장으로 있는 ‘모어비전’으로 소속사를 이적했다.

소속사 이적 5개월, 마지막 앨범으로부터 1년 8개월여 만인 2월 28일 공개된 청하의 ‘I’m Ready’는 그래서 여러모로 남달라 보일 수밖에 없는, 남달라야만 하는 곡이었다. 주어진 시간은 고작 1분 10초. 타이틀 곡 ‘EENIE MEENIE’의 수록곡으로 함께 공개될 예정인 노래의 일부는 온통 비장하고 처절하다. 희미한 불빛이 스며드는 어둠 속에서 청하가 천천히 가면을 벗는다. 불길한 신스음와 함께 이제 막 깨어난 듯 꿈틀대는 댄서들과의 한 몸처럼 움직이는 청하의 움직임에서 비로소 그가 우리 곁으로 돌아왔음을 실감한다. 움츠렸던 시간만큼 날개를 펼치겠다고, 난 준비가 됐다고 흔들림 없이 뻗어 나가는 굳은 목소리에 맞춰 잔잔히 흐르던 음악은 42초경 강렬한 비트와 함께 표정을 바꾼다. 리듬에 맞춰 시작된 런웨이에 이어 바닥을 구르고 벼락을 마다치 않는 청하의 격앙된 몸짓은 긴 터널을 거친 그가 다시 무대로 돌아와야 하는 명분 그 자체다. 더할 것도 덜 것도 없다. 내가 나의 자리로 돌아가야만 하는 명분을 이토록 설득력 있게 담아낸 1분 10초가 또 있었나 싶다.



추천 기사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0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글 | 김윤하(대중음악평론가)

대중음악평론가.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케이팝부터 인디까지 다양한 음악에 대해 쓰고 이야기한다. <시사IN>, <씨네21>, 등 각종 온·오프라인 매체에 기고하고 있으며 KBS, TBS, EBS, 네이버 NOW 등의 미디어에서 음악과 문화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네이버 온스테이지와 EBS 스페이스공감 기획위원으로 활동했으며, 현재 TBS FM 포크음악 전문방송 <함춘호의 포크송> 메인작가로도 활동 중이다. 한마디로 음악 좋아하고요, 시키는 일 다 합니다.

오늘의 책

이토록 찬란한 청춘의 순간들

김화진 소설가의 첫 장편. 사람에 대한 애정이 듬뿍 담긴 이번 소설엔 아름, 민아, 해든 세 명의 친구가 등장한다. 삼각형의 꼭짓점에 놓인 것처럼 다르지만, 서로에게 끌리는 감정과 질투 등을 눈부신 계절의 변화와 함께 그려냈다. 숨겨놓았던 감정을 털어놓게 만들 문장들이 가득한 작품.

우리 가족 마음 보살피기

사랑하는 두 사람이 만나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는다. 아이는 사랑스럽다. 그런데도 시간이 지나면 왜 다투고 미워하고 극단적으로는 가족의 연을 끊을까? 가족 심리 전문가 최광현 교수가 갈등의 유형, 해결책을 제시한다. 우리 가족을, 나를 지키는 심리 처방을 전달한다.

이해인 수녀가 간직해 온 이야기

수녀원 입회 60주년 기념 이해인 수녀의 단상집. 반짝이는 일상의 사진과 함께, 인생의 여정에서 품어온 단문, 칼럼, 신작 시 10편을 책에 담았다. 편지와 사물, 사람과 식물, 시와 일기. 우리가 잊고 살아온 소중한 것들을 말하는 수녀님의 이야기는 삶에 희망을 따스하게 비추어 준다.

2023 뉴베리 명예상 수상작

과거는 곧 미래다 정말 그럴까? 벗어나고 싶은 과거와 이어진 고리를 끊고 새로운 미래를 찾아 바다로 나선 열두 살 소녀의 놀라운 모험 이야기. 신비로운 여정과 진정한 희망의 메시지를 담았다. 『어둠을 걷는 아이들』에 이은 크리스티나 순톤밧의 세 번째 뉴베리 명예상 수상작.


문화지원프로젝트
PYCHYESWEB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