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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와야 할 명분 - 청하 ‘I’m Ready’
청하 ‘I’m Ready’
불길한 신스음와 함께 이제 막 깨어난 듯 꿈틀대는 댄서들과의 한 몸처럼 움직이는 청하의 움직임에서 비로소 그가 우리 곁으로 돌아왔음을 실감한다. (2024.03.06)
모든 것에는 명분이 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일도 명분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저 덩그러니 자리만 차지하지 않나 싶은 존재에도 저마다의 구실과 도리가 깃든다. 세상의 모든 이치가 거의 그대로, 나아가 때로는 아플 정도로 차갑게 적용되는 케이팝 세상이라고 크게 다를 리 없다. 성실한 연습과 뛰어난 재능은 데뷔를 낳고, 꾸준히 쌓인 미니 앨범은 정규작의 발판이 된다. 든든한 지지자들의 관심과 사랑이 쌓인 자리에서 가수는 자연스레 더 멀고 더 높은 곳을 꿈꾼다. 변수를 막지 못해 등장하는 갑작스러운 시련마저 다음 명분을 찾기 위한 좋은 구실이 된다. 명분이 명분을 품고, 명분이 명분을 낳는다.
청하의 지난 몇 년은 순탄치 않았다. 예상치 못한 변수였다. 솔로 데뷔 후의 여정이 ‘성장의 정석’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멋진 계단식이었기에 더욱 대비되었다. 청하는 2016년 출연한 서바이벌 프로그램 ‘프로듀스 101’에서 초반의 부진을 딛고 그룹 아이오아이로 최종 데뷔했고, 그룹 활동 마무리 후 곧바로 솔로로 데뷔했다. ‘Why Don't You Know’(2017), ‘Roller Coaster’(2018)가 차례로 좋은 반응을 얻었고, ‘벌써 12시’로 음악방송과 전국을 휩쓸었다. 노래와 함께 2019년을 청하의 해로 만든 그는 해외시장과 음악적 완성도를 새로운 목표로 삼았다. 슬기(레드벨벳), 신비(여자친구), 소연((여자)아이들)과 호흡을 맞춘 싱글 ‘Wow Thing’과 네 번째 미니 앨범 [Flourishing]으로 숨을 고른 뒤 글로벌 레이블 88라이징(88rising)과 손을 잡았다. 88라이징의 간판 래퍼 리치 브라이언(Rich Brian)과 싱글 ‘These Nights’를 발표했고, 레이블 컴필레이션 앨범에도 참여하며 자신에게 쏟아지는 주목의 폭을 넓혔다.
이어진 길에는 야망이 더욱 흘러넘쳤다. 첫 정규 앨범에 앞서 발표한 싱글 ‘Stay Tonight’과 ‘PLAY’는 지금까지 청하가 발표한 곡 가운데 가장 높은 완성도를 자랑했다. 집중한 건 음악만이 아니었다. ‘프로듀스 101’ 시절부터 극찬받은 춤은 레벨업 된 그의 음악과 꼭 어울리는 감도 높은 퍼포먼스로 옷을 갈아입었다. 하우스, 투스텝, 레게톤 등 다양한 음악 장르를 청하라는 필터를 통해 풀어낸 첫 정규 앨범 [Querencia](2021)는 말 그대로 ‘청하 유니버스’였다.
총 4개 장으로 나누어진 앨범은 음악과 서사 모든 면에 있어 각자의 재능을 가진 창작자들이 합심해 오직 청하라는 한 사람을 변주하는 데 온 힘을 쏟은 작품이었다. 밀도가 상당했다. 청하는 이 앨범으로 한국대중음악상 ‘케이팝 앨범 부문’을 최초로 수상한 인물이 되었다. 아쉽게도, 질주는 거기까지였다. <Querencia>에 이어 다시 한번 공력을 모은 두 번째 앨범의 전반전 <Bare&Rare Pt.1> 활동은 지지부진했고, 그와 맞물려 소속사와의 갈등은 점점 깊어져만 갔다. 결국 2집의 나머지 반쪽 <Bare&Rare Pt.2>는 영영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채 청하는 지난 10월 박재범이 수장으로 있는 ‘모어비전’으로 소속사를 이적했다.
소속사 이적 5개월, 마지막 앨범으로부터 1년 8개월여 만인 2월 28일 공개된 청하의 ‘I’m Ready’는 그래서 여러모로 남달라 보일 수밖에 없는, 남달라야만 하는 곡이었다. 주어진 시간은 고작 1분 10초. 타이틀 곡 ‘EENIE MEENIE’의 수록곡으로 함께 공개될 예정인 노래의 일부는 온통 비장하고 처절하다. 희미한 불빛이 스며드는 어둠 속에서 청하가 천천히 가면을 벗는다. 불길한 신스음와 함께 이제 막 깨어난 듯 꿈틀대는 댄서들과의 한 몸처럼 움직이는 청하의 움직임에서 비로소 그가 우리 곁으로 돌아왔음을 실감한다. 움츠렸던 시간만큼 날개를 펼치겠다고, 난 준비가 됐다고 흔들림 없이 뻗어 나가는 굳은 목소리에 맞춰 잔잔히 흐르던 음악은 42초경 강렬한 비트와 함께 표정을 바꾼다. 리듬에 맞춰 시작된 런웨이에 이어 바닥을 구르고 벼락을 마다치 않는 청하의 격앙된 몸짓은 긴 터널을 거친 그가 다시 무대로 돌아와야 하는 명분 그 자체다. 더할 것도 덜 것도 없다. 내가 나의 자리로 돌아가야만 하는 명분을 이토록 설득력 있게 담아낸 1분 10초가 또 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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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음악평론가.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케이팝부터 인디까지 다양한 음악에 대해 쓰고 이야기한다. <시사IN>, <씨네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