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바시’ ‘어쩌다 어른’ 권수영 교수가 전하는 감정 화해법
『나쁜 감정에 흔들릴 때 읽는 책』 권수영 작가 서면 인터뷰
우리의 감정이 일시적인 불쾌감을 준다고 해서 너무 빠르게 나쁘다고 결론 내면 안 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2024.02.21)
정신건강에 관한 한국 사회의 관심은 날로 높아지고 있다. TV에서 유명인의 심리상담을 진행하는 프로그램이 널리 인기를 얻고, 심리적 고통 때문에 정신건강의학과에 방문하는 일을 이전처럼 터부시하지 않을뿐더러, 국가 차원에서 ‘온 국민 마음건강 종합 대책’을 논의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쁜 감정에 흔들릴 때 읽는 책』의 권수영 작가는 내면의 감정에 주목하는 흐름 한편으로, 최근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강력범죄를 ‘분노 범죄’나 ‘혐오 범죄’로 몰아가는 분위기가 우려스럽기도 했다. 불안이나 분노 등 소위 부정적 감정을 병리적이라고 규정하고 제거해야 할 공공의 적으로 여기는 시선이 갈수록 만연한 탓이다. 과연 불안과 분노, 미움 같은 이른바 ‘나쁜 감정’이 진짜 범죄의 원인이자 해만 끼치는 절대 악일까? 우리가 느끼는 감정 중 없어도 되는 감정이 있을까?
안녕하세요, 권수영 교수님! 『나쁜 감정에 흔들릴 때 읽는 책』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이 책으로 처음 선생님을 알게 된 분들을 위해 간단하게 자기 소개를 해주실 수 있나요?
저는 20년 넘게 대학에서 상담과 코칭을 가르쳐온 교수입니다. 상담과 코칭 서비스의 고객은 나쁜 감정에 흔들려서 삶의 위기를 겪는 이들이 대부분이죠. 이런 전문 서비스를 찾아온 분들이라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가 판단하기에, 이런 분들은 자신의 감정이 자신에게 주는 메시지를 잘 알아차리지 못해서 힘들어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바로 이런 분들을 위해서 이번 책을 출간하게 되었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나쁜 감정에 흔들릴 때 읽는 책』이 나온 소감이 어떠신가요?
우리는 보통 감정보다는 이성을 중요하게 생각해요. 공부할 때도, 그리고 일할 때도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중요하지 감정은 쉽게 무시하기 일쑤죠. 상담 분야도 마찬가지였어요. ‘인지행동치료’라는 전통적인 심리상담 방법은 비합리적인 생각을 바꿀 때 우리의 감정도 바뀔 수 있다고 주장하죠. 그래서 그런지 그동안 우리의 감정은 마음속에서 늘 조연이었어요. 저는 이 책을 통해서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는 감정들이 조연이 아니라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알리고 싶었어요. 그런 점에서 저는 이 책이 그런 선입견을 조금이나마 바꾸는 데 나름 공헌을 하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보통 우리는 우울, 불안과 같은 감정을 나쁜 감정으로 생각하고 없애고 싶어하는데요. 교수님께서는 이 책에서 나쁜 감정을 위한 변론을 펼치셨어요. 나쁜 감정은 사실 나쁘지 않다는 얘기가 놀라웠는데요. 우리를 힘들게 하는 나쁜 감정, 왜 나쁜 감정이 아닌 건가요?
놀랍게도 우리는 감정을 좋은 감정과 나쁜 감정으로 쉽게 나눕니다. 그런데 좋다, 나쁘다는 원래 윤리적 판단을 할 때 쓰는 말이잖아요? 감정은 윤리적 판단의 대상이 아니에요. 원래 감정은 쾌감을 주는 감정과 불쾌감을 주는 감정, 두 가지로 나뉩니다. 동일한 감정이라도 우리에게 쾌감을 주면 ‘좋은’ 감정, 그러다가 불쾌감을 주면 다시 ‘나쁜’ 감정이라고 불리게 됩니다. 예컨대, 무더운 여름에 우리에게 뜨거운 느낌이 있다면 이건 불쾌감을 주니까, 나쁜 감정이 되지요. 그런데 추운 겨울에 뜨거운 느낌은 어떤가요? 오히려 쾌감과 안전감을 주니까 좋은 감정이 되잖아요. 그렇다면 후덥지근한 느낌은 좋은 감정인가요? 나쁜 감정인가요? 그때그때 다르죠.
우리의 감정이 일시적인 불쾌감을 준다고 해서 너무 빠르게 나쁘다고 결론 내면 안 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단일 감정 자체에 대한 판단에 마음을 빼앗겨서 우리 마음속 전체 감정 세계를 못 보게 되니까요. 쾌감을 주든, 불쾌감을 주든 마음속 감정들은 분명히 우리에게 특별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는 점에서 순기능이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나쁜 감정에 흔들릴 때 읽는 책』에서도 나쁜 감정과 좋은 감정으로 나눠보는 대신 강경파 감정과 온건파 감정으로 나눠서 보자고 얘기하셨어요. 강경파 감정과 온건파 감정은 무엇인가요? 서로 어떻게 다른가요?
어느 조직이나 강하게 자기주장을 하는 사람들과 자기 목소리를 숨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조직의 리더가 되었을 때 겉으로 강하게 드러나는 강경파의 주장만 귀담아듣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조직을 원활하게 이끄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되겠지요. 저는 주로 부부나 가족을 상담하는 전문가인데, 가족 구성원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담 중 엄청나게 이야기를 많이 하는 분들이 있어요. 주로 부모들이지요. 아이들은 아무 소리 안 하고 앉아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여러분이 상담 전문가라면 누구의 이야기를 더 듣고자 하시겠어요? 너무 당연한 이야기지 않나요?
우리들의 감정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 아주 강하게 표출되는 감정, 즉 분노나 불안 이 우리 감정의 전부라고 생각하면 안 되지요. 우리는 분노가 생기면, 그 순간 마음속은 온통 분노로 꽉 차 있다고 느끼잖아요? 그런데 강경파 감정 뒤에 숨어서 조용히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온건파 감정을 알아차리고 인정해 주는 것이 참 중요해요. 그래서 저는 우리의 온건파 감정들의 존재와 기능을 충분히 드러내는 것이 우리 마음속 행복을 이루는 데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일상 속 갑질 사건이 논란이 되면서 점점 더 사회적으로 나를 부당하게 대하는 사람에게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대해야 한다는 생각이 퍼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식의 대처를 하고 나면 속이 시원할 것 같지만 한편으론 같은 ‘진상’이 되지는 않을지 고민이 되기도 하는데요.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그래서 강경파 감정이 치솟을 때 어떻게 하면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을까요?
강경파 감정의 대표주자 격인 분노를 못 느끼는 것도 정상인 상태는 아닙니다. 갑질을 경험했을 때 당연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는 그런 강경파 감정을 꾹꾹 억누르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아요. 사실 가장 중요한 점은 자신의 욕구가 좌절된 느낌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콜센터 직원분들이 감정노동에 시달리다가 퇴사하고 제일 먼저 찾는 곳은 정신건강의학 병원일 때가 많습니다. 이때 느끼는 감정은 바로 자신이 바보 같다고 느껴지는 자괴감, 자신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 듯한 수치심이지요. 이런 자괴감이나 수치심을 겪지 않으려면 자신의 욕구를 알아차릴 뿐 아니라, 자신의 욕구를 상대방에게 전달해야만 내면의 온건파 감정으로 인해 극단적인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컨대, 갑질을 하는 고객에게 같이 욕을 해줄 수는 없잖아요? 그렇다고 무조건 참는 게 능사는 아니에요. 고객에게 자신의 욕구를 전달하는 게 최우선입니다. “고객님, 조금 목소리를 낮추고 말씀해 주시기를 원해요. 그리고 고객님 가족을 대하는 듯이 해주시기를 원합니다. 이런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저는 마치 고객님에게 물건 취급받는 느낌이 들어서요. 부탁드립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상대방이 더 화낼 것 같다고 하시는 분이 있어요. 하지만 여러분 자신에게는 아주 큰 이득이 생깁니다. 물건 취급 당하는 듯한 수치심을 여러분 마음속에 꼭꼭 숨기면서 괴로워할 필요가 없어지는 거죠, 퇴사하고 정신과 전문의를 찾을 필요도 자연스럽게 없어질 수 있습니다.
책의 서문에서 챗GPT 등 세간의 이목을 끌었던 인공지능과 인간의 사고체계를 비교하여, 인간의 시스템 사고를 따라오기엔 아직 인공지능 기술이 부족하다고 설명해 주셨는데요. 인공지능이 미술, 문학 같은 예술 분야와 심리상담 분야에도 본격 도입될 거라는 전망도 있습니다. 이런 전망에 관해 교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가끔 저는 재미 삼아 퀴즈를 냅니다. 챗GPT 같은 대화형 AI와 부모의 공통점이 뭐냐고요. “잘 못 알아듣는다.” “잔소리가 많다.” “정답만 말한다.” 등등 다양한 대답이 나옵니다. 제 답변은 “공감을 잘 못한다.”입니다. 인간의 뇌를 그대로 모방하려면, 정보를 빠르게 처리하고 계산하는 좌뇌 기능과, 보이지 않는 인간의 마음을 헤아리고 상상하는 우뇌 기능을 같이 개발해야 합니다. 그런데 현재 개발된 AI는 주로 좌뇌 기능에 편중되어 있습니다. 학습된 정보로 빠르게 답을 찾고 해결방안을 제시하죠. 만일 한 학생이 AI에게 오늘 시험을 망쳤다고 하면, 자꾸 다음 시험 준비를 어떻게 해야 할지 해결방안을 제시하겠지요. 부모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들의 속상한 마음을 헤아리고 공감하지 못하고, 제발 벼락치기 하지 말고 지금부터 기말 준비를 철저히 하라고 해결방안부터 제시하는 모습과 비슷합니다.
만약 저처럼 공감대화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감정을 헤아리는 대화법 알고리즘을 AI에게 학습시키면, 지금보다 훨씬 감정을 잘 다루는 우뇌를 모방한 AI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는 생각합니다. 저 역시 그런 인공감성지능에 대한 연구를 현재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보만 많이 학습하면 점점 정교해지는 좌뇌에 비해서, 인간의 우뇌 기능을 인공감성지능이 능가하기 위해서는 훨씬 긴 시간이 필요할 거로 생각합니다. 게다가 최고의 성과를 내기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예컨대, 저와 아주 비슷하게 감정을 다루는 AI를 만든다면, 제가 물리적 한계나 경제적 한계 때문에 직접 만나 상담할 수 없는 이들을 도울 수 있다는 이점이 생기겠지요. 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 대화의 양이 아니라 질입니다. 한 인간이 한 인간에게 느끼는 공감의 클라이맥스, 그 최고 단계를 기계를 통해서 완성하기란 무척 어렵습니다. 영화 <그녀(Her)>의 마지막 부분에서 주인공은 개인적으로 사랑의 감정을 느꼈던 인공지능 OS에게 묻습니다. 혹시 현재 사랑을 나누는 다른 사람이 있느냐고요. AI는 아무렇지 않게 “지금 8316여 명과 대화 중이고, 641명과 사랑한다”라고 대답합니다. 주인공은 결국 좌절하지요. 이것이 기계와 인간은 사랑의 최고 단계까지 도달하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머지않아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기가 막히게 알아차려서 공감해 주고, 심지어는 인간의 심장 소리와 한숨 소리까지 탑재한 인공지능을 만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로 인해 심장이 뛰고 우리의 아픔으로 인해 가슴이 무너지는 진짜 사람 같은 인공지능은 결코 없다는 점을 결국 알게 될 거예요. 그래서 저는 인간을 능가하는 좌뇌는 충분히 만들 수 있어도 인간을 능가하는 우뇌는 결코 만들 수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책을 읽은 독자님들이 이것만큼은 꼭 기억했으면 하는 이야기는 무엇인가요?
『나쁜 감정에 흔들릴 때 읽는 책』. 책 제목처럼 나쁜 감정에 흔들릴 때 삶 전체가 흔들리곤 합니다. 하지만, 그때가 바로 나의 감정세계 전체에 다가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연극이나 영화를 보면, 주인공만 지나치게 쳐다보다가 극 전체의 줄거리나 맥락을 놓치곤 하지 않나요? 우리 마음속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속엔 주연 감정뿐 아니라 실로 많은 감정이 모여 살고 있어요. 우리가 나쁘다고 평가하는 감정에만 너무 집중하지 마세요.
겉으로 자주 등장하고 강경해 보인다고 해서 그 감정만 우리 마음속에 꽉 차 있다고 믿으시면 안 됩니다. 여러분이 알아주기를 기다리고, 공감해 주기를 기다리면서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 사는 감정들이 어쩌면 더 중요한 감정일지 모릅니다. 이렇게 외쳐 보세요. “내 안에 나도 모르게 숨어 살았던 귀중한 감정들아, 이제 만나러 갈게.” 그래서 마음속 모든 감정들과 오순도순 행복하게 사시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나쁜 감정에 흔들리고 계신다면, 지금이 골든타임입니다. 놓치지 마세요. 감사합니다!
*권수영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상담코칭학과 교수이자 연세대학교 가습기살균제 보건센터장으로 전국 6천여 명의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과 가족에게 심리상담을 제공하고 있다.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고, 미국 보스톤대학교와 하버드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미국 버클리연합신학대학원에서 ‘종교와 심리학’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부부·가족상담학회, 한국가족문화상담협회, 한국상담진흥협회 등 여러 상담 관련 협·단체의 회장을 역임하였고, 고용노동부 상담 인적자원개발위원회 심리상담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전국 부모들의 양육지침서 EBS1 「여러 육아 고민 상담소-EBS 부모」에 고정 출연하며 아이와의 관계를 고민하는 부모에게 솔루션을 제공하고 있다. 방송 프로그램과 기업 리더십 강연을 통해 대중과도 활발하게 소통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아이 마음이 이런 줄 알았더라면』, 『치유하는 인간』, 『나도 나를 모르겠다』, 『나쁜 감정은 나쁘지 않다』, 『한국인의 관계심리학』, 『프로이트와 종교』 등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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