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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미의 혼자 영화관에 갔어] 진실 대신 상처 - <추락의 해부>
김소미의 혼자 영화관에 갔어 29화
이미 녹아버린 진실을 해부하려 무수한 타인들이 개입하는 동안 산드라는 낯모르는 타인들 앞에서 자기 인생의 이야기를 술회해야 한다. (2024.02.16)
영화 기자 김소미가 혼자 간 극장에서 마주한 인생의 이야기, 격주 금요일 연재됩니다. |
글의 마력은 필자가 장악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인생의 몇 안되는 무대라는 점에도 있다. ‘읽히는’ 힘을 고려하지 않는다면야 백지는 우리의 지루한 증언을 어디까지고 받아준다. 쓰는 것에 익숙한 사람들이 카메라 앞에 서거나 타인이 펜자루를 쥔 인터뷰의 대상자로 참여하고 나서 깊은 당혹감에 빠지는 건 그래서 피하기 어려운 일이다. 복잡하거나 다면적일수록, 모호한 것을 파고들면 들수록 나의 말은 오독되거나 잘려 나간다. 언젠가부터 ‘소통’하자는 말은 서로 정당성과 이해관계를 나누자는 말이 됐다. 그리고 나는 언젠가부터 일기장에 오늘 나의 위치가 얼마나 설득적이지 못했는가에 대해 이따금 자괴하곤 한다. 입장을 취한다는 것은 반드시 일면을 취하는 일이어야만 할까?
확정적 진실을 부르짖는 시대의 고단함을 일련의 영화들도 말하고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괴물>이 보여주는 다중 시점의 진실 추구는 일찌감치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에서도 내러티브 형식의 성취로서 보여진 바 있지만, 오늘날 작가들은 미학적 포부보다는 그 테마 자체에 몰두하는 것처럼 보인다. 확신하는 세상에 대한 극에 달한 피로와 염려, 혹은 상처를 드러내는 것이다. <괴물>이 냉소의 시대에 들춰낸 사랑(고레에다 히로카즈의 ‘Love Wins All’)의 찬란함을 비추는 한편 <추락의 해부>는 자신의 서사를 끝내 승리의 자리에 올려놓고도 쓸쓸해 보이는 어느 여성 작가의 혼자된 새벽을 도착지로 삼는다. 소파에 웅크려 겨우 마음 놓고 잠드는 밤. 미리 말하자면 그것이 이 영화의 결말이다.
프랑스인 남자와 독일인 여자가 알프스 산맥 인근 설원에 펼쳐진 산장에서 서로의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싸우는 동안 몸짓과 소리는 점차 격렬해진다. 마침내 남자가 오열과 함께 여자에게 외친다. “당신은 괴물이야!” 남자는 다음날 산장에서 추락사한 시신으로 발견된다. 눈밭에 떨어진 시체는 햇볕 속에서 스스로 흔적을 지워갈 뿐이다. 산드라(산드라 휠러)와 사뮈엘(사뮈엘 테이스) 부부의 역사는 그로부터 순식간에 자살이냐 살인이냐를 가르는 재판장에 구겨넣어진다. 이미 녹아버린 진실을 해부하려 무수한 타인들이 개입하는 동안 산드라는 낯모르는 타인들 앞에서 자기 인생의 이야기를 술회해야 한다.
지난해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쥐스틴 트리에 감독은 부부 관계 내에서 발생하는 어떤 몰락을 직시하기 위해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는 <추락의 해부>를 혼인 신고하지 않은 파트너이자 공동 작가인 아서 하라리와 함께 썼다. 트리에는 영화에서 가장 자주 회자되는 결정적인 부부싸움 신에 대해 이런 입장을 내놓는다. “그 싸움은 관계에서의 민주주의가 때로 독재적 충동에 의해 어떻게 탈선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동시에 완벽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결코 섣불리 체념하지 않는 부부의 이상주의도 거기에 함께 있을 겁니다.”
쥐스틴 트리에의 이 두 문장에 관해 이야기해보자. 폭력까지 동반된 상황이 법정에서 녹음 파일의 사운드 형태로 울려퍼질 때 배심원들이 감각하는 것은 주로 첫번째 진술에 해당될 것이다. 두번째 진술은 부부 당사자가 애증과 자아의 유착 속에서 감지하는 둘만의 사적인 진실에 밀착해 있다. 통찰에 능한 작가인 산드라(산드라 휠러) 역시 자기 내부의 그런 뒤틀린 유대감을 자각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우리는 실로 쉽게 포기하지 않았었다고. 결혼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때로는 바람을 폈고, 남편을 때리긴 했지만 죽이지는 않았다고. 하지만 그런 말은 법정에서 결코 통용되는 논리가 아니다. 자기 변론에 취약한 인물이 끊임없이 오해와 수난을 사는 영화들에 지친 현대 관객의 심리를 간파한 쥐스틴 트리에는 자신의 인물에게 현명한 진술의 기회를 허락한다. “녹음된 그 대화는 현실이 아니에요. 일부일 수는 있죠. 극단적인 상황에서 감정이 고조되면 거기에 집중하느라 다 무너지잖아요. 반박 못할 증거 같지만 현실 왜곡일 뿐이에요. 우리 목소리지만 진짜는 아니에요.”
비슷한 힘겨움은 산드라가 심문 과정을 연습하는 장면에서도 이어진다. “우리는 의견 충돌도 있었지만 그래도 서로 할 말이 많았죠. 나중에는 그것도 사라졌지만…” 이때 오랜 친구이자 변호사인 빈센트가 산드라를 저지한다. “그것도 사라졌다”는 말은 빼도 좋다고. 진정한 회한의 고백일지언정 부정적인 뉘앙스를 남기는 단서는 삭제한다. 부부의 역사가 얼마나 많은 파고를 압축하는지 빈센트 역시 모를 리는 없다. 다만 일면을 취하자는 것이다. 이 순간 산드라 휠러에게 주어지는 불안정한 클로즈업 숏은 배우의 얼굴을 상하의 영역으로 쪼개어 한번은 눈을, 또 한번은 입을 보여준다. 세상에 통용되기 위해선 눈동자가 말하려는 바를 전부 입에 담아선 안된다는 또 하나의 이상한 진실을 받아들여야만 할까? 이 잔인한 통증은 부부의 아들 다니엘(밀로 마차도 그라네르)에게도 대물림된다. 증언을 앞둔 다니엘이 법원에서 파견나온 자신의 보호자에게 묻는 질문은 <추락의 해부>에서 가장 통렬한 대사이다. “믿음을 지어내라고요? 제 입장이 확실한 척을 해야 하나요?”
생존을 위해 자기 서사를 가공하는 일은 구태여 살인범으로 몰린 아내의 일까지 상상할 것 없이 자기소개서를 쓸 때나 잘 보이고 싶은 상대와의 첫만남에서도 주어지는 어려운 유혹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법정 신들에서 그러나 산드라는 결백을 주장하는 동시에 남편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멈추지 않는다. 때로는 사뮈엘을 원망했음을, 그의 관점에 동의하지 않았음을, 그의 실패가 자신을 괴롭혔음을 말한다. 덕분에 신명나는 건 곧바로 연극배우로 데뷔해도 손색이 없을 듯한 <추락의 해부>의 얄미운 빌런, 검사다. 그는 산드라의 소설을 읽는데서 그치지 않고 산드라의 다면성을 잘 버무린 치정극을 새로 쓴다. 어쩌면 검사 버전의 소설이 산드라의 본연에 더 가까울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의 소설이 지금 당장 텔레비전에서 하루종일 쏟아지는 이야기들과 소름 끼칠 정도로 비슷한 패턴을 보인다는 데 있다. 뉴스에서, 범죄 사건을 재구성하는 각종 예능이 제기하는 ‘충격적 진실’들과 괴물적 타자들은 그 현상들과는 별개로 대개 천편일률적으로 스토리텔링된다.
“이거 하나만 알아줬으면 해. 난 괴물이 아니야.” 오죽하면 산드라도 자신의 아들에게만큼은 이렇게 호소한다. 우리는 도대체 언제부터 살인마를 위시해 사회에 해를 입히는 타자들을 괴물이라 부르기 시작한 걸까.몬스터(monster)의 어원인 라틴어 몬스트럼(monstrum)은 신화 속 생물이나 비정상적인 현상을 포괄한다. 지금 내 방 책상 언저리에 얌전히 앉은 몬스테라는 비정형적으로 갈라진 그 잎이 평범한 잎사귀들같지 않아 붙여진 이름이다. 언어의 기원으로 볼때 몬스터는 이상하고 무섭지만, 동시에 비범한 것이다. <추락의 해부>는 그 이중성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낙인 찍기를 위한 괴물이 아니라, 규범과 가치를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로서의 괴물이라면 산드라는 정말 그것일지도 모른다. 동시에 사뮈엘이 산드라를 괴물로 호명할 수 밖에 없던 이유에 대해서 슬픈 유추가 가능해진다. 산드라와 사뮈엘, 그리고 다니엘 가족의 한 축이 붕괴되었다는 사실은 범죄의 유무를 떠나 명백하다. 이 영화의 추락은 자신의 산장 다락에서 떨어진 남자의 물리적 낙하에서, 결혼생활과 중년을 통과하며 자신의 이상으로부터 나날이 괴리되어 간 남자의 정신적 몰락으로 의미를 확장해 나간다. 중력 앞에 일찍 지쳐버린 인간인 사뮈엘을 폭발하게 한 결정적인 도화선은 (영화가 발설한 녹음의 기록으로 추측컨대) 산드라가 사뮈엘의 실패감에 동조하지 않은 것일 터다. 산드라는 법정에서도 매우 분명히 밝혀둔다. “저는 남편이 자신의 고통을 다니엘에게 투사하는 것이, 네, 가끔은 미웠습니다.” 산드라의 강인함을 인정하는 순간 사뮈엘이 목격해야 할 것은 자신의 나약함이다. 그러므로 산드라는 반드시 산장의 나쁜 괴물이 되어야 한다.
자기 삶을 탐정처럼 대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어떻게든 입장을 가지고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데, 그 입장은 때로 진실을 추구하기보다 극복하는 것에 가까울 수도 있다. 다니엘이 아버지가 개 스눕에 관해 남긴 의미심장한 말을 유언으로 받아들이기로 한 것처럼 말이다. 꼬박꼬박 재판장에 참석하며 모든 것을 듣기로 작정한 어린 다니엘은 애초의 자기 결심대로 행하고 말았다. “상처받았어요. 이미 받았다고요. 그래서 더 필요해요. 전부 다 듣고 극복하려고요.”
서늘한 것은 <추락의 해부>가 극복된 진실이 구원인지 저주인지조차 말해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아마 관객 각자의 경험과 가치관에 기대어서만 잠시 바로 설 수 있는 진실일 것이다. 혹은 그것을 찾으려는 시도조차 독해에 관한 강박이자 습관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 영화가 남기는 고독한 종언을 들으며 극장을 나올 때 나 역시 어떤 입장을 정리하고야 말았다. 늦은밤 다시 산장으로 돌아온 모자는 원점에 섰다. 그들 각자 불가피한 몰락을 경험했으며 정체모를 진실을 각자의 방식대로 성취했다. 이 반쪽짜리 승리 뒤에 남은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런 것들이 궁금하다. 돌아보건대 <추락의 해부>에는 슬픔의 자리가 적다. 세상과의 전투가 애도를 유예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물며 산드라는 마지막 재판이 끝난 날, 수고한 동료들과 뒷풀이(!)도 잊지 않는 놀랍도록 강한 인간이다. 그러나 그 다음은? 비탄이 시작될 것이다. 이 영화의 유일하게 덜 잔인한 선택은 바로 그 시간을 보여주지 않고 끝내다는 점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면서 문득 이런 장면이 떠올랐다. 검사의 공격이 극심해지자 변호사 빈센트가 “사뮈엘의 비참한 1년을 상상해보자”고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순간. 영화는 자신도 모르게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방청석에 앉은 다니엘을 쳐다보는 산드라의 얼굴을 비춘다. 누군가의 비참한 1년에 아주 깊숙이 연루된 자들이 법정에선 마치 외따로 분리된 존재들처럼 연극하고 있음을 단 한번의 시선 처리로 말하는 이 숏이 <추락의 해부>의 미래다. 진실을 궁금해하는 동안 사람들은 추락이 충격이 몹시 큰 고통이라는 사실을 잊어 버렸다. 산드라는 그에 맞서 다시 소설을 쓸 것이다. 우리가 끝내 모르게 된 추락의 해부는, 소설이 완성되는 순간에 이루어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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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사람. 영화를 쓰고 말하는 기자. <씨네21>에서 매주 한 권의 잡지를 엮는 일에 가담 중이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독립 영화잡지 <아노>의 창간 에디터, CGV 아트하우스 큐레이터 등으로 일했다. 영화의 내면과 형식이 만나는 자리를 오래 서성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