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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미들마치』, 범사의 비범함 - 유상훈 민음사 편집자

조지 엘리엇 『미들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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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지만 도통 읽은 사람을 찾아볼 수 없는, 그야말로 전설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2024.02.08)


“위대한 예술은 공감을 확대하고, 개인적 운명의 경계를 넘어 경험을 증폭하며 동료 인간들과의 접촉을 확대한다.” _조지 엘리엇

내 앞에 책이 놓여 있다. 그 분량은 무려 1400쪽에 이른다. 마치 독자의 접근을 단호히 거부하는 듯한, 일종의 두려움마저 자아내는 이 엄청난 두께의 책은, 바로 조지 엘리엇의 『미들마치』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지만 도통 읽은 사람을 찾아볼 수 없는, 그야말로 전설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토록 장대한 책에 이르는 길은 그 자체로 도전이고 모험이다. 나 역시 『미들마치』를 손에 쥐었다가 내려놓기를 수없이 반복했고, 그럴 때마다 이같이 기나긴 소설은 쓴 작가와 그것을 우리말로 옮긴 번역가와 마침내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낸 편집자, 이들 모두에게 적잖은 경외심을 느꼈다. 요컨대 『미들마치』 앞에서 주저하게 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조지 엘리엇,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이것은 작가의 본명이 아니다. 그의 진짜 이름은 메리 앤 에번스이고, 굳이 남성 이름을 필명으로 내세운 경위 속에 작가의 모든 고난과 빅토리아 시대의 풍조와 그 밖의 여러 복잡다단한 사정이 다 담겨 있다. 일단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듯이, 조지 엘리엇이 (태어났으니) 어쩔 수 없이 살아가야 했던 당시에는 ‘여성’으로서 작가 생활을 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는 그 수난의 역사를, 엘리엇과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브론테 자매를 통해 익히 알고 있다. (그 전의 제인 오스틴도, 그 후의 버지니아 울프도 녹록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설령 운 좋게 작가가 되었다 하더라도, 여성 ‘작가’라면 더 잔인하고 모욕적인 시련, 즉 ‘여성’ 작가라는 편견에 맞서 싸워야 했다. 엘리엇이 쓴, 어쩌면 가장 자조적인 글이라 할 수 있는 「여성 작가들의 어리석은 소설들(Silly Novels By Lady Novelists)」이라는 비평만 보더라도, 그 스스로 무엇을 가장 경계했는지 대략 짐작해 볼 수 있다.

이 야심 찬 작가는, 결국 자신이 도모한 것 이상으로 해냈다. 요즘은 물론이거니와, 엘리엇이 살던 시대에도 소설은 이미 넘쳐 나고 있었다. 수천 가지의 이야기들이 세월 속에 잊히고 마모돼 가는 와중에도, 그의 작품은 남았다. 심지어 문학사에 한 획(“영문학에서 가장 위대한 작가 중 하나”)을 긋는, 결코 아무에게나 허락되지 않은 위업을 이뤄낸 것이다.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도 읽히고 있으니, 더는 설명할 필요조차 없을 터다. 나는 이처럼 소름 끼칠 만큼 대단한 작품을 펼쳐 들면서, 몸을 떨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고는 놀랐다. ‘이게 이 소설의 전부인가?’ 한가득 넘쳐흐르는 찬사들, 압도적인 규모, 걸출한 작가의 대표작! 소설 제목에 붙은 ‘지방 생활의 고찰’이라는 부제부터 다소 의심스러웠지만, (솔직히 토로하건대) 이토록 기대를 배반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를테면, 악명 높은 빅토리아 시대, 이미 예고돼 있듯이, 영국의 한 지방 도시(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미들마치)를 배경으로 각기 다른 가치관을 지닌 여성과 남성들—도러시아, 터시어스, 에드워드, 메리, 프레드 등 숱한 개성적인 인물들이 역사의 도도한 흐름 속에서 한데 얽히고 설키며 자신들의 삶을 조형해 나가는 이야기이다. 일찍이 케이트 밀렛이 평했듯, “조지 엘리엇은 혁명적이지만, 『미들마치』의 인물들은 전혀 혁명적이지 않다.”라는 말이 얼마큼 납득될 정도로 이 장엄한 소설은 지극히 통속적인 피날레, 즉 결혼을 향해 내달린다. 

이게 이 소설의 전부인가? 겉보기에는 그렇게 느껴지거나 더러 경악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연처럼, 문학 역시 함부로 비약하지 않는다. 독자에게 이 작품의 ‘가치’를 제발 알아 달라고 거창하게 호소하고 싶진 않다.(나에겐 그럴 능력이 없다.) 그럼에도 이 작품 속으로 뛰어들기에 적당한 자리를 한 군데 알고 있다. 독서에 왕도는 없지만, 우리는 가끔 힘들여 읽어야 한다. 예컨대 『미들마치』의 경이로움은, 새로운 시대의 맹아를 한없이 평범하고 안온하고 별스럽지 않은 인물과 사건 속에 심어 놓았다는 데 있으니 말이다. 

우리는 과거를 돌아보며, 시대에 붙들린 채 살아가는 지난날의 사람들을 쉽게 비웃곤 한다.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지극히 보수적인 결말(결혼)로 치닫는 『미들마치』 역시 고루하게 여겨질 수 있다. 거듭 말하건대, 자연은 비약하지 않는다. 우리들도 지금 시대에 사로잡혀 있으며, 그것을 초월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다만 그 벽을 넘어서려는 무모한 시도 끝에, 작디작은 물꼬가 비로소 생겨나는 것이다. 『미들마치』는 19세기 영국의 지방 도시를 병풍처럼 그려 내면서, 다채로운 인물들의 삶을 결혼으로 엮어 낸다. 이것은 이 작품의 표피이다. 하지만 그 심연에 자리한 온갖 결심과 선택과 고뇌와 회한 등은, 마치 현대를 선취한 듯 독자에게 놀라움을 선사한다. 

1400쪽에 이르는 기나긴 이야기는 결말을 위해 마련된 것이 아닌, 장차 도래할 혁신적 인간상을 제시하는 매혹적인 선언에 가깝다. 미지의 영역으로 한 걸음 차분히 나아가는 층계참에 서 있는 조지 엘리엇과 『미들마치』는, 오늘날 독자에게 쉼 없이 더 나은 가능성을 찾아 나서라고 속삭이는 듯하다. 위대한 소설은 으레 읽는 이(더불어 작가 자신과 번역자와 편집자)를 고달프게 하는 법이다. 이 긴긴 여정을 완주하고 나면, 무거운 바벨을 들어 올렸을 때처럼 극적이지는 않아도, 그사이 우리 사유에 든든한 근육이 새로 붙었음을 깨닫게 되리라.




*필자 | 유상훈 편집자

민음사 편집자로 일하고 있다. 아니 에르노, 욘 포세 등의 작품을 편집했다.                              


미들마치 1
미들마치 1
조지 엘리엇 저 | 이미애 역
민음사
미들마치 2
미들마치 2
조지 엘리엇 저 | 이미애 역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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