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독서 프로젝트] 한국문학과 더 친해지는 법 - 윤혜은 작가
한국문학 어드바이저 - 윤혜은 작가/책방지기
한국 문학과 더 가까워지는 방법은? 글을 쓰고 책방을 운영하는 윤혜은 작가가 추천하는 독서 리스트. (2024.01.26)
작가이자 ‘작업책방 씀’ 공동 책방지기. 오래 하는 일을 결국 가장 좋아하게 되어버리는 사람. 에세이 『일기 쓰고 앉아 있네, 혜은』, 『아무튼, 아이돌』, 『엉망으로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공저)가 그렇게 탄생했다.
박서련 저 | 한겨레출판
박서련 작가님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생각해요. 어떻게 이 캐릭터로 살아본 것처럼 글을 쓸까? 소설을 읽을 때마다 이 세상 어딘가에 만난 적 없이 친밀함을 느끼게 되는 인물들이 하나씩 늘어나는 경험을 하지만, 박서련 작가님의 글을 읽다 보면 마치 여러 명의 박서련 작가님을 만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어져요. 작가님이 이다음으로 살아본 자는 누구일까, 하는 얼토당토 않는 상상을 하면서요. 그 시작은 『체공녀 강주룡』이었습니다. 최초로 ‘고공 농성’을 한 여성 노동자 강주룡의 일대를 그린 이 소설은 독립운동에서 노동운동으로 이어지는 한국의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삼고 있는데요. 시대의 비극 속에 거듭 무너질지언정, 연민 없이 씩씩하고 뜨겁게 살아간 강주룡이라는 인물을, 무엇보다 그러한 삶을 사랑하게 만드는 소설이에요. 인생이 고난과 역경에 휘말릴 때에도 자기 자신으로서 살아가기를 포기하지 않는 인물은 얼마나 생에 당당할 수 있는지요. 『체공녀 강주룡』을 읽다 보면 주룡의 삶이 외부로부터 한 톨도 빼앗긴 적 없이, 오롯이 주룡의 것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짜릿함이 커져갑니다. 어떤 시대를 먼저 살아본 여성을, 그 여성의 긍지를 박서련 작가님의 언어로 만나는 기쁨이 큰 독서였어요.
조온윤 저 | 창비
재작년 봄에 읽은 시집이에요. 이 시집을 처음 읽었을 때의 계절도, 제목도, 제목을 닮은 노란 표지도, 그리고 시인의 첫 시집이라는 점들이 되게 조화로웠던 기억이 있어요. 펼친 시집에는 한 편 한 편이 세상에 다정하게 말을 걸고 있었고요. 시인의 목소리를 들어본 적은 없지만 꼭 ‘우리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 같은 유순한 말투처럼 읽힙니다. 그러면 제안 같기도, 기도 같기도 한 문장들이 햇볕처럼 마음에 스며들어요.
예컨대 나대신 살아주었으면 하는 그림자를 섭외하고, 그림자 역시 가짜임을 들키지도 않고 성공적으로 “나를 대신해서 친구들을 만나 하하호호 / 농담을 주고 받았”지만, 결국 이 삶을 누구보다 생생하게 느끼며 살아보고픈 화자는 그림자에게 말합니다. “따라오지 말고 나란히 걷자”고요.(「그림자 무사」) 이 시를 빠져나올 즈음엔 ‘나’와 ‘그림자’가 서로를 호위하며 좀 더 진한 발자국을 남기는 거리가 상상되더라고요. 그 걸음은 조금 더 본격적이고, 긴 산책으로 이어집니다. “시간은 / 부서지기 위해 지어지고 / 지어지기 위해 부서지는 모래성 같았다 / 그런 마음으로 / 종점까지 걸었다 / 종점이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끝까지 걷게 했다 / 잠시 무너지고 나면 끝까지 걸어갈 수 있었다.”(「콘크리트 산책법」)
새해의 반짝이는 기운은 잠깐이고 남아 있는 겨우내 이어질 회색빛 한낮 속에서 무심코 이 책을 다시 꺼내 읽었을 때, 어떤 길목에서든 끝까지 걸어볼 수 있겠다는 씩씩함이 차올랐어요. 시인의 말을 햇볕인 양 계속 쬐다 뵈면 어깨를 감싸는 적당한 따스함으로부터 이 겨울을 다른 방식으로 마주하게 될 거예요.
김화진 저 | 문학동네
인간에 대한 새로운 애정은커녕, 이미 적립해 둔 애정을 유지하는 것마저 어려워지는 오늘날. 『나주에 대하여』는 내 안에 이만큼의 사랑이 있음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주인공이 다수 등장하는 소설집입니다. 읽다 보니 어쩐지 저도 그들과 같은 인간인 것처럼 느껴져서 묘하게 통쾌했고, 종래에는 뭉클하게 반가웠어요. 건조하고 뾰족하게 굴러가는 일상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에 대한 끝없는 이해를 시도하는 서사가 필요했던 것 같아요. ‘이것 없이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마저 들었으니까요. 서로의 마음이 어떻게 닿았다 멀어지고 또 이어지는지 서로 다른 위치와 입장의 궤적을 따라가며 읽는 재미가 큰 소설집이었어요. 어디에선가 “‘사랑’은 자기애를 극복하고 타자와 함께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는 에너지를 가진다는 점에서 포기할 수 없는 가치”라는 문장을 읽은 적 있는데요, 『나주에 대하여』 속 인물들이야말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런 사랑을 실행해 버리는 존재들 같았어요. 혼자서는 어려운 이 세계를 향한 이해의 가능성을 조금 더 키워준 소설을, 새해에도 다시 읽고 싶습니다.
조해진 저 | 민음사
나는 영원히 나로밖에 살아갈 수 없는, 그 자명한 사실이 아직도 문득문득 낯설거나 가끔은 아쉽게도 느껴질 때, 지금 나는 ‘여름을 지나가는 중이구나’ 생각합니다. 여름은 나를 옴짝달짝 못 하게 붙들어 놓지만, 그 끈끈함이 사라지고 나면 여름 안에서 내가 가장 많이 변화했음을 알게 해주니까요. 내가 마주하지 못한 나, 터득하지 못한 삶, 이 모든 것을 싣고 흘러가는 시간 속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민, 수호, 연주가 있습니다. 혼자서는 찾기 힘든 이번 생을 향한 어려운 진심이 그들 서로가 우연한 끌림으로, 엮임으로 부딪칠 때마다 조금씩 선명해집니다. 빛이 닿아 우리가 세상을 볼 수 있듯, 이들은 서로에게 눈부신 빛 그 자체보다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작을 나눠 갖는 존재가 되어요. 나아가 ‘대신하려는 마음’도 이 소설에는 담겨 있는데요. 섣부른 침범이 아니라, 기꺼이 누군가와 연결됨으로써 터트리거나 해소되는 감정이 있는 것 같아요. 그렇게 나도 모르게 타인을 지켜버린 생의 한 시절을 읽었을 때, 저는 제가 가장 견디기 힘들어 하는 여름을 조금 달리 보내볼 수 있게 되었어요. 그래서 여름이 돌아올 때마다, 이 소설에 고마운 마음이 듭니다.
안윤 저 | 문학동네
『남겨진 이름들』은 혈연으로 엮이지 않은, 그러나 어떤 공동체보다 결속력 있게 이어지는 가족의 돌봄과 사랑을 그린 소설이에요. 이야기에 등장하는 긴긴 아픔과 간병의 시간이 “이 집의 특별할 것 없는 하루 풍경”인 것, 고통은 고통일 뿐이라고, 사소하게 취급해서도 안 되지만 너무 떠받들어서도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하지만 돌봄과 사랑, 믿음과 희망에 관해서라면 제각기 열띤 자세가 되어버리는 인물들에 단단히 매료되었던 겨울이 떠오릅니다. 긴 아픔과 간병의 시간을 눈부신 성실과 끈질긴 돌봄으로 채우는 이야기가 감히 아름답다고 느껴질 정도였어요. 무언가가 끝이 나고 우리를 떠나가게 되더라도, ‘돌본다’는 건 결국 ‘곁에 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이 슬프고도 따뜻했습니다. 출간 후 <책읽아웃> 출연 당시, 안윤 작가님이 “믿음, 사랑, 희망 같은 것은 우리 삶에 항상 절대적인 모양이나 완전한 형태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믿음으로 향하는 마음, 사랑으로 살고자 하는 마음, 희망이 없을 수도 있지만 끝까지 가보는 행위에 각각의 근원이 존재하는 것 같다”고 말씀하신 기억이 납니다. 소설의 주인공들은 꼭 이런 태도로 삶을 살아가고 있고, 저 또한 독서를 하며 그 여정의 끄트머리 일부를 동행할 수 있어 기쁜 독서였어요.
이주란 저 | 문학동네
소설의 책날개, 작가 소개 하단에는 본문의 일부가 인용돼 있습니다. “(...) 저는 시시한 것들을 사랑하고 시시한 것은 대체로 슬프니까요.” 소설의 시작보다 이 문장을 먼저 읽으면서 저는 언제 이 문장이 다시 등장할까 궁금했는데요. 딸의 지치고 힘든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던 엄마가, 문득 딸의 집 방바닥에 떨어진 깨를 보면서 그래도 “깨를 뿌릴 마음이 남아 있구나.” 생각하는 대목과 붙어 있더라고요. 자식에 대한 불안한 마음이 들 때마다 그 깨를 떠올리며 너무 걱정하지도, 혹은 너무 미안해하지도 말아야겠다는 엄마의 이야기를 오래 생각했어요. 『수면 아래』는 이처럼 미지근한 시시함이 녹이는 언 마음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안을 들여다볼 수 없던 어두운 심연이 한순간 묽어지고, 얼어 있던 수면 아래가 서서히 풀어지는 모습을 조바심 없이도 따라가게 된달까요. 사실 우리의 삶은 극적인 변화나 영화 같은 사건과 무관하게 흘러가지 않나요. 그러면서 아무도 모르게 슬픔에 잠기고, 내일이면 하루를 살아낼 만큼의 회복을 하고 아침을 맞이하지요. 이 소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편안하고 순한 마음이 되는 경험은, 먼저 읽어본 자의 작은 특권이겠죠. 다 읽고 난 뒤에는 아무래도 찰랑니는 수면(水面)보다 따뜻한 수면(睡眠)이 더 생각날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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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생. 열여덟 새해, 우연히 ‘10년 일기장’을 산 이후로 매일 일기를 쓰고 있다. 오래 하는 일을 결국 가장 좋아하게 되어버리는 사람. 에세이 《일기 쓰고 앉아 있네, 혜은》《아무튼, 아이돌》이 그렇게 탄생했다. 이다음에는 소설이 올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팟캐스트가 끼어들었다. 생각해보니 일기를 쓰고 수다를 나누는 일은 오래전부터 좋아한 일이었다. 망원동에서 ‘작업책방 씀’을 운영하고 있으며, 〈일기떨기〉 녹음을 하는 날이면 우리는 늘 이곳에서 만나 함께 이동한다. 이야기는 항상 거기서부터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