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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명재의 사랑하는 시] 겨울에 쓰는 글
고명재의 사랑하는 시 8편
겨울은 사랑하기 참 좋은 계절이다. 외부의 환경이 매섭고 혹독할수록 우리 안의 모닥불은 생생해진다. (2024.01.16)
시인의 사려 깊은 시선을 통해, 환한 사랑의 세계를 만나 보세요. |
“이제 완전히 겨울이 온 것 같아요.”
(사진을 보낸 뒤) “오대산에 왔는데 눈꽃이 너무 예뻐서…“
“창문 좀 열어봐, 빨리! 깜짝 놀랄 거야!”
“눈 오네. 너무너무 보고 싶어.”
어떤 말들은 순백처럼 진솔하여서 사람에게 직선으로 닫고는 하는데 눈(雪) 소식이 대부분 이런 식이다. 눈 소식은 우리를 단거리 주자로 만든다. 눈 소식엔 목적이 없고 현재만 있다. 눈은 눈앞만을 보게 하는데 학교 다닐 때도 우리는 흔히 그랬다. 지루한 수업을 듣다가 창밖을 보고 누군가가 “눈 온다!!” 하고 외치면 그때부터 수업에는 구멍이 났다. 잠시간의 일탈로 시간이 멈췄다.
우르르 창 쪽으로 몰려드는 아이들, 커진 눈, 벌린 입, 몸을 기울인 얼굴들. 그렇게 ‘사회적인 제도로서의 시간(수업)’은 정지되고 ‘감탄과 탄성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생각해 보면 그때가 ‘진정한 시간’이었다. 시험이나 평가로부터 자유롭던 때. 우리는 아름다운 걸 아름답다고 말하며 입을 한껏 벌리고 밝게 웃었다. 겨울은 그렇게 시작되는 것. 우리 안에 자유가 일어서는 때. 선생님이 “앉아, 앉아, 이 녀석들아!” 하고 지시봉으로 교탁을 내리쳐도, 우리는 사실 다 알고 있었다. 선생님도 창 쪽으로 몸이 기울었다는걸.
첫눈이 온 것을 하례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태조 6년 정축(1397) 10월 30일(무신)
주상이 궁으로 돌아왔다.
예조가 첫눈이 내린 것을 하례(賀禮)하려고 하니, 주상이 말하기를,
“아, 이 무슨 말인가. 이 눈을 상서(祥瑞-복되고 좋을 일이 가득할 징조)라고 여긴다는 것인가” 하였다.
- 『신역 조선왕조실록』, 태종 17년 정유(1417) 10월 10일(임진)
군신(群臣)이 첫눈을 축하드리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겨울에 천둥과 지진이 있었으니, 첫눈을 어찌 족히 축하하리오.” 하였다. 박은과 이원?·?변계량들이 나아가 아뢰기를, “신들이 첫눈을 축하드리려 하옵되, 상감께서 겨울에 천둥과 지진이 있었다 하여 받지 않으시니, 신들은 상감께옵서 재앙을 만나 두려워 하심을 깊이 기뻐하나이다. 생각하옵건대 상감께서 재앙을 만나 이미 두려워하시기로 하늘에서 상서로운 눈을 내리신 것이옵니다.”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세종 즉위년 무술(1418) 10월 27일(계묘)
첫눈이 왔다
- 『조선왕조실록』, 영조 9년 계축(1733) 11월 16일(계사)
겨울에 오 · 권 두 벗이 역사를 찾아왔는데 이때 첫눈이 많이 내려 숲과 언덕이 온통 하얗게 덮였다.
-『다산시문집』 중에서
그러니까 눈이 오면 왕도 신하도 대책 없이 그대로 기뻤던 거구나. 조선 때도 첫눈은 ‘기록할 만한 기쁨’이어서 사람들은 이렇게 기록을 해둔 거였다. ‘눈 소식’이라는 말을 골똘히 들여다보다가 첫눈에 관한 옛 문헌까지 찾아보게 되었다. ‘눈 소식’, 기다림이 있어야 가능한 말. 아무런 목적 없이 보고 싶은 것. 다 함께 나눌 수 있는 작고 예쁜 것. 평등한 것. 순백인 것. 맑고 밝은 것. 그러니까 눈과 시는 서로 닮았다. 이것들은 위태롭게 존재해 왔고 이것들은 인간의 마음을 흔들어 왔으며 이것들은 오래도록 눈(目)을 채우며, 목적 없이 아름다움을 일으킨 것이다.
*
“왜 눈인가?” 시인이 물었다.
“눈은 시이고 서예이고 회화이며 춤이고 음악이기 때문이죠.”
노인이 유코에게 다가와 열기 띤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다인가?”
“아닙니다. 눈은 그 이상입니다.”
- 막상스 페르민, 『눈』 (난다) 중에서
목적 없이 아름다운 어떤 실체들.
존재한다는 것. 있다는 것. 함께 존재했다는 것.
*
눈은 물질계의 한 정점이다. 눈은 궁극적이라고 할 만큼 아름다우며, 동시에 너무나도 덧없다. ‘눈은 존재하며 사라지고, 사라지면서도, 그 무엇보다도 선명하게 존재한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유한성을 그대로 본다. 위의 문장에서 ‘눈’을 ‘사람’으로 바꾸어 읽어도 문장은 겨울밤처럼 단정하다.
*
영화 <안개 속의 풍경>(테오 앙겔로풀로스, 1996)에는 본 적 없는 아빠를 찾기 위해 집을 나서는 두 아이가 나온다. 이 영화는 아이들에게 잔혹하리만큼 끔찍한 현실을 보여주는데 그 와중에도 참으로 아름다운 장면이 하나 있다. 바로 첫눈이 내리는 장면이다. 아이들이 경찰서에 붙잡혀 있을 때 한 경찰관이 창밖을 보며 말한다. “눈이 내려요!” 바로 그 순간 세상은 정지한다. 비유가 아니라 아이들이 경찰서 밖으로 나가자, 정말이지 세상은 정물처럼 정지해 있다. 어른들은 마네킹처럼 멈춰 서 있고 움직이는 것은 오직 아이들과 눈발뿐이다. 무구한 두 아이는 활짝 웃으며 경찰서를 탈출해서 도로를 달린다. (경찰서 같은) 제도적 시간은 멈춰버리고 펑펑 눈이 쏟아지는 세계 속에서 순백의 존재(아이들)들은 살아서 달린다. 아이들은 웃으며 길을 찾는다.
수업 시간, 출근 시간, 환승 시간, 공판일, 납부일, 면접일, 마감일까지. 우리는 실상 (사회적) 시간의 노예다. 이런 시간은 모든 게 다 짜여있고 우리는 여기에 붙들려서 움직일 수 없다. 그러나 눈이 내릴 때 우리는 정지한다. 수업도 멈추고 출근도 멈추고 경이(驚異)가 빛난다. 그것은 비록 “아-”하는 짧은 순간이지만, 이때 사회적 시간은 기능을 멈추고 눈앞의 아름다움(현재)이 의미를 되찾는다.
눈은 ‘사회적 구멍’이며 목적 없이 존재의 아름다움을 비춘다.
눈은 ‘진정한 시간의 되찾음’이며 그래서 눈을 보면 사랑하는 이가 떠오르는 것이다.
*
최근에는 사랑하는 이들에게서 가슴 아픈 연락을 받았다. 위로나 안부를 전할 일들이 많이 생겼고 나는 눈 내리듯 혼자서 펑펑 울었다.
겨울은 사랑하기 참 좋은 계절이다. 외부의 환경이 매섭고 혹독할수록 우리 안의 모닥불은 생생해진다. 어쩌면 추운 지방에서 아주 긴 이야기가 탄생했던 건, 외부의 냉혹한 환경 때문인지도 모른다.
눈은 모순을 통합하고 이율배반을 끌어안는다. 눈은 차가운데 더없이 포근해 보인다. 눈은 시린데 따듯함을 연상시킨다. 당신이 아플 때, 당신이 시릴 때, 힘에 부칠 때, 내 사랑은 감히 더 뜨거워질 것이다.
나는 지금 아픈 내 친구에게 말한다. 나의 사랑은 당신을 향해 더 짙을 것입니다. 지금도 누워 있을 당신을 위해, 하루하루 회복을 기다릴 당신을 위해, 엄청난 슬픔과 염려 속에서도 나는 사랑을 쥔다. 사랑을 믿는다. 사랑은 뚫는다. 나의 사랑이 기어코 당신을 살릴 것이다. 단호한 문장을 못 쓰는 내가, 요즘은 이렇게 강하게 쓴다. 힘겨울수록 사랑할 테다. 눈발이 되리라. “그러니까 이 글의 목표는 하나. 너를 일으키려고 쓰는 글.” (안희연, 『당신이 좋아지면, 밤이 깊어지면』 중에서)
*
이번 원고는 사랑하는 친구를 위해 단 한 편의 시를 함께 읽으려 한다. 이 시를 읽는 이유는 나에게 찾아온, 기적 같은 유의미가 당신이란 걸 병실에 있을 당신에게 들려주려고.
우리가 함께 읽을 시는 사이토 마리코의 「눈보라」라는 시다. 처음 이 시를 본 날 나는 마음이 너무 따듯해져서 이 시를 두고두고 읽겠다고 다짐했다. 이 시는 겨울에 읽어야 제맛인데, 우선 이 시를 즐기는 나만의 의식(?)을 소개하고자 한다.
나는 매년 겨울 첫눈이 내리는 날, 이 시를 소리 내어 읽는다. “내일은 첫눈이 내릴 예정입니다.” “전국에 폭설이 내릴 예정입니다.” 이런 기상 예보를 접하면 나는 미리부터 이 순백색의 시집(『단 하나의 눈송이』, 봄날의 책)을 꺼내 준비해 둔다. 그리고 시를 읽기 전에 동네 떡집에 간다. 거기서 갓 나온 백설기를 한 덩이 산다. 손을 아주 깨끗이 씻은 뒤, 맑은 녹차를 정성을 다해 끓인다.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다. 새하얀 백설기를 한입 물고 녹차를 호로록 마신다. 눈과 차와 백설기를 번갈아 보다가 몸이 좀 데워지면 시를 읽어나간다.
1
눈보라 속 저쪽에서 사람이 걸어온다. 저 사람 역시 지금 ‘눈보라 속 저쪽에서 사람이 걸어온다.’ 하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무릎보다 높이 쌓인 눈. 사람이 가까스로 빠져나갈 만한 좁다란 길 양쪽에서 나와 그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걸어가는 거다. 사람들은 언제 맞스치기 시작하는 것일까? 그것은 이미 시작됐는가? 하여튼 둘은 서로 다가간다. 지상에 단 둘이만 남겨져버린 것처럼 마침내 마주친 그 순간, 한 사람이 빠져나가는 동안 또 한 사람은 한편으로 몸을 비키며 멈추어 서서 길을 양보한다. 그때 둘이는 인사를 주고받는다. 그것이 내 고향 설국의 오래된 습관이다.
“눈보라 속 저 멀리서 사람이 걸어온다.” 그것을 인정했을 때부터 이미 맞스치기는 시작된 것이다. 누가 먼저 길을 양보하느냐는 그때가 와야 알 수가 있다.
나는 한때 그런 식으로 눈보라 속 멀리서 걸어오는 조선의 모습을 만났다.
아직도 같은 눈보라 속을 다니고 있다.
이 시는 <단락 1>과 <단락 2>로 이루어져 있다. 우선 <단락 1>을 보면 시의 배경은 일본의 북쪽 지방을 보여주는 듯하다. 마치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처럼 정말이지 눈이 가득한 세계. “무릎보다 높이 쌓인 눈”을 헤치며 눈보라 속 두 사람은 가까워진다. 그리고 이 둘은 소로(小路)에서 마주하는데 길을 양보하며 다정하게 인사를 주고받는다. 이 따듯한 정경은 “내 고향 설국의 오래된 습관이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은 화자가 의문을 제기하는 지점이다. 화자는 이 흔한 정경을 그려내면서 아주 깊고도 어려운 질문을 던진다. “사람들은 언제 맞스치기 시작하는 것일까?” 그러니까 사람이 사람과 진정으로 마주하게 되는 때는 정확하게 언제부터라고 할 수 있을까.
소로에서 마주쳐서 인사를 해야만 할 때? 5m쯤 가까워서 실루엣이 정확해질 때? 안면이 확실하게 보일 때? 여기에는 아주 다양한 대답이 가능하지만, 시인은 아주 아름다운 대답을 제시한다. 화자의 대답은 이러하다. 먼 곳에서부터 이미 “눈보라 속 저쪽에서 사람이 걸어오”네라고 생각하고 있는 바로 그 순간, (즉 이 시가 시작되는 바로 그 순간), 사람과 사람의 ‘맞스치기’는 시작된 것이다. 화자는 그렇게 “눈보라 속 멀리서 걸어오는 조선의 모습을 만났다.” 실제로 사이토 마리코 시인은 이렇게 가깝고도 먼 나라로 건너와서, 교환학생으로 지내면서 한국어로 이 시를 썼다. 이어서 이 시에서 정말 아름다운 부분인, <단락 2>를 이어서 읽어보자.
2
수업이 심심하게 느껴지는 겨울날 오후에는 옆자리 애랑 내기하며 놀았다. 그것은 이런 식으로 하는 내기이다. 먼저 창문 밖에서 풀풀 나는 눈송이 속에서 각자가 눈송이를 하나씩 뽑는다. 건너편 교실 저 창문 언저리에서 운명적으로 뽑힌 그 눈송이 하나만을 눈으로 줄곧 따라간다. 먼저 눈송이가 땅에 착지해버린 쪽이 지는 것이다. “정했어.” 내가 낮은 소리로 말하자 “나도”하고 그 애도 말한다. 그 애가 뽑은 눈송이가 어느 것인지 나는 도대체 모르지만 하여튼 제 것을 따라간다. 잠시 후 어느 쪽인가 말한다. “떨어졌어.” “내가 이겼네.” 또 하나가 말한다. 거짓말해도 절대로 들킬 수 없는데 서로 속일 생각 하나 없이 선생님 야단 맞을 때까지 열중했다. 놓치지 않도록. 딴 눈송이들과 헷갈리지 않도록 온 신경을 다 집중시키고 따라가야 한다.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나는 한때 그런 식으로 사람을 만났다. 아직도 눈보라 속 여전히 그 눈송이는 지상에 안 닿아 있다.
참으로 아름다운 순간을 그리고 있다. 지루한 수업 시간에 짝꿍과 앉아서 눈송이를 보며 했던 무의미한 내기. 그런데 이 시의 끝에 다다를 때, 우리는 이상한 감동을 느낀다. 이 시의 <단락 2>는 왜 이토록 아름다울까. 도대체 어떤 지점이 우리를 흔드는 것일까.
우선 이렇게 수업 시간에 다른 짓을 하는 행위 자체가 언제나 매혹적이란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 ‘무의미한 놀이’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승패’가 아니라 ‘집요한 눈길’에 있다. 특히 이런 대목이 참 인상적이다. “열중했다. 놓치지 않도록. 딴 눈송이들과 헷갈리지 않도록 온 신경을 다 집중시키고 따라가야 한다.” 화자는 왜 이렇게까지 열중하는가.
답부터 말하자면 바로 이 눈길이 “사람을 만”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실은 나도 똑같은 놀이를 했던 기억이 있다. (내기를 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수학 시간에 창밖을 바라보다가 내리는 눈송이 속에서 단 하나를 골라서 끝까지 보고는 했다. 감동적인 것은, 바로 이 놀라운 능력. 집요한 사랑의 눈길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에게는 무수하게 내리는 눈송이 속에서 “단 하나의 눈송이”를 선택하고, 그것과 연을 맺고, 그것의 죽음까지를 “따라”갈 능력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단락 1>에서 사람을 “맞스치”는 순간(우연적 만남)에 대해 이야기하고 <단락 2>에서는 어떻게 필연을 일구어내는지를 말하고 있다.
그리고 다시 시의 제목으로 되돌아가 보자. 이 시의 제목은 ?눈보라?. 그러니까 무한에 가까운 ‘눈송이 개체들(눈보라)’ 속에서 우리는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를 찾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연(緣)이고, 만남이다. 화자는 바로 “그런 식으로 사람을 만났다.” 수백, 수천, 수만의 사람 속에서 ‘다른 모든 인간과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한 사람’을 구해내는 일. 우리는 그렇게 사람을 만나고 연을 맺는다. 우리는 그렇게 죽음까지 곁을 지킨다. 그러니 이 시는 엄청난 우연성 속에서 “단 하나의” 유의미를 구원해 내는 시. 그래서 시의 제목은 ‘눈보라’이지만, 시의 관심은 ‘눈송이’에 있는 것이다. 덧붙여 실제로, 사이토 마리코 시인은 이 시를 쓰게 된 배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본어에는 ‘눈송이’에 해당하는 낱말(고유어)이 없다. 한자로 ‘설편(雪片)’이라는 낱말이 있긴 하지만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단어는 아니다. 이 시를 쓴 것은 다만 눈송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싶어서였다. (중략) 나도 눈송이라는 낱말을 발음할 때, 특히 ‘송이’라는 부분을 발음할 때 ㅇ에서 ㅇ으로 공기가 마찰하는 듯한 느낌, 소리의 가벼움과 무게, 거기에 감도는 눈의 향기와도 같은 무언가가 ‘눈송이’를 발음한 순간에 나타나는 집합체로서 눈이 아닌 눈송이 하나하나의 존재감, 그 하나하나 모든 것을 좋아했다.”
- 사이토 마리코, 시집 후기 「오로지 무언가를 보는 일」 중에서
내게도 그런 ‘눈송이-존재’가 있다. 압도적으로 많은 인파의 눈보라 속에서 기적처럼 만난 몇몇의 빛나는 사람들. 지금 그중 몇 사람에게 기도가 필요하다. 그 사람이 ‘눈송이’ 다루듯 나를 봐줬던 소중한 순간들을 기억한다. 그러니 나도 “그 하나하나 모든 것을 좋아”할 수밖에. 간신히 이룬 만남을 귀히 여길 수밖에. 그래서 오늘은 원고를 이렇게 마친 뒤, 당신을 향해 온 힘을 다해 기도할 거다. “놓치지 않도록. 딴 눈송이들과 헷갈리지 않도록”. 우리는 그렇게 겨울에 서로를 지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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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다. 첫 시집 『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과 첫 산문집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를 출간했다.
<막상스 페르민> 저/<임선기> 역9,800원(0%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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