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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미의 혼자 영화관에 갔어] 만신창이 연인 - <사랑은 낙엽을 타고>

김소미의 혼자 영화관에 갔어 2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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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아마도 내게 한 해를 상징하는 멜로드라마로 남을 것 같은 영화 속에서 연애는 커피값이나 빵 한 조각을 경유해 점쳐지고 있었다. (2023.12.22)


영화 평론가 김소미가 극장에서 만난 일상의 기술을 소개합니다.
서울을 살아가는 30대로서 체감한 영화 속 삶의 지혜, 격주 금요일 연재됩니다.


영화 <사랑은 낙엽을 타고> 포스터


- 커피 한 잔 하시죠. 근처에서.

- 시간은 있는데 돈이 없어요. 오늘 급여일인데 사장이 잡혀가서요.

(…)

- 그동안 돈 없어서 식사도 못하셨죠? 빵 좀 드세요.

이것은 어느 무표정한 남녀가 대낮의 술집 앞에서 경찰에 끌려가는 남자를 보면서 나누는 대사다. 올해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아마도 내게 한 해를 상징하는 멜로드라마로 남을 것 같은 영화 속에서 연애는 커피값이나 빵 한 조각을 경유해 점쳐지고 있었다. 21세기 영화 중에서는 아마도 켄 로치의 영화에서 흡사한 설정을 본 것도 같은데, 심정적 기시감은 정확한 예시를 찾지 못한 채 흩어진다. 대신 나는 감각 기관이 뱉어내는 확연한 차이를 절감한다. 극장의 분위기로 체감할 때 나의 것일 뿐 아니라 우리의 것이기도 했던 그 반응은 대체로 약간은 어이없다는 듯 실은 감격에 찬 실소이다. 누군가는 웃음을 대신해 이마를 짚는다.

여자의 이름은 안사(알마 포외스티)고 남자의 이름은 홀라파(주시 바타넨)다. 둘은 곧 자리를 옮겨 정말로 커피 한 잔을 한다. 내내 굶었던 사람은 안사이고, 그래서 안사는 홀라파의 제안 앞에 체면을 차리지 않는다. 안사가 가게 카운터로 걸어가 점원이 집어주는 시나몬롤 하나를 접시에 받는다. 인물들이 동작이 대체로 0.9배속 정도로 느려진 이 세계에서는 드물게도, 순간 카메라가 황급한 동작 하나를 비춘다. 안사가 자리를 비운 찰나를 노려 자켓 안주머니에서 꺼낸 보드카를 커피에 들이붓는 홀라파의 손길이다. 숏이 전환되면 카운터 맞은편 벽면에 걸린 거울을 통해 그 모습을 발견한 안사가 보인다. 20세기의 극장 안이라면 관객들이 다함께 탄식할 만한 장면이다. 두 숏의 지속 시간으로 볼 때 부수적인 놀라움도 따른다. 술을 저렇게 많이 넣는다고? 흡사, 콸콸이다.

다시 앞선 술집 앞 장면으로 돌아가본다. 둘은 거기에 왜 서 있었던가. 남자쪽의 사정은 한결 심플하다. 그가 중독자여서다. 안전 장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공사장에서 일하는 건설 노동자 홀라파는 끊임없이 술과 담배를 장기에 공급함으로써 삶을 연명한다. 일거리가 없는 날 그는 한낮의 맥주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한편 이날은 여자쪽의 사정이 애석하다. 마트에서 일했던 안사는 유통기한이 지난 샌드위치를 챙겼다는 이유로 해고되어 술집 설거지 보조로 취직했다. 그곳엔 전과 달리 옷을 갈아입을 탈의실도 없고 사장은 안사의 보건증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물론 근로 계약서도 없다. 이런 저런 악덕에 절여져 있으나 아키 카우리스마키 영화의 일원답게 적당히 우습고 무미건조함으로써 오히려 관객을 안심시키는 사장과 안사가 비극인지 데드팬 코미디인지 모를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그들 뒷편에 걸린 달력 위의 숫자가 눈에 들어온다. 때는 2024년을 가리키고 있다. 한 사람의 노동이 점점 더 내몰리고 있으며 그것이 우리의 미래라는 것이 이 무표정한 온기로 가득한 사랑 영화가 차마 걸러내지 않는 진실이다.

그럼에도 술 탄 커피와 시나몬롤의 시너지가 제법 괜찮았는지 내친김에 안사와 홀라파는 극장 데이트까지 감행한다. 영화 선택권을 쥐고 결연해진 홀라파의 표정에 뒤따르는 숏으로 짐 자무시의 좀비 코미디 <데드 돈 다이>의 클라이맥스에서 한 무리의 좀비떼가 너덜거리며 우리를 향해 걸어오는 장면을 재봉한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악취미는, 관람을 마친 후 극장을 걸어나오는 관객들의 대사에 비하면 약과다. 자본과 물질에 절여진 인간의 내적 파산에 대한 반응인 좀비물을 데드팬 코미디로 승화함으로써 실존적 뉘앙스를 드리운 자무시의 괴작 <데드 돈 다이>를 두고 한 남자는 로베르 브레송의 <시골 사제의 일기>에, 또다른 남자는 장 뤽 고다르의 <국외자들>에 비견한 뒤 헤어진다. 더 무서운 것은 안사의 반응이다. “처음으로 실컷 웃었어요!” 장담컨대 그저 홀라파를 안심시키려는 말은 아니었을 테다.


영화 <사랑은 낙엽을 타고> 스틸컷


집과 술집, 노동하는 공간과 더불어 <사랑은 낙엽을 타고>에서 의미심장하게 다뤄지는 장소는 극장 앞이다. <데드 돈 다이>를 함께본 뒤 안사는 홀라파에게 전화번호를 적은 쪽지를 건네주지만, 그녀가 작은 키스를 남기고 프레임 바깥으로 사라진 직후에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던 홀라파가 그 쪽지를 잃어버리고 만다. ‘폴른 리브스’에서 낙엽보다도 먼저 떨어져 길거리를 외롭게 나뒹구는 것이 두 연인을 이어줄 유일한 서약서인 안사의 전화번호 쪽지라는 것 역시 카우리스마키 식의 유머라고 해도 좋겠다. 다행스럽게도 둘은 오래 지나지 않아 극장 앞에서 재회한다.

종이에 번호를 적어 건네고 극장 앞에서 다시 만난다는 것. 표면적으로는 디지털 중심주의에 대한 선명한 반동이면서 ― 이것이 끼니를 걱정하는 사람들의 영화임을 감안할 때 ― 우리가 갖지 못하기에 잃지 않을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쌉쌀한 직시처럼 보인다. 그들 사이에는 엇갈림이 있다. 문자 메시지조차 할 수 없는 시간의 기다림이 있다. 전화 할게요, 라든가 극장 앞에서 만나, 약속하고 그 시점까지는 반드시 기다려야만 하는 두 연인을 현실의 우리는 거의 상상하지 못한다. 은퇴를 번복하고서 6년만에 신작을 낸 아키 카우리스마키가 <사랑은 낙엽을 타고>에서 이 냉소적인 시대에 우리가 일용할 수 있는 유일한 양식은 곧 사랑이라는 것 다음으로 말하려는 바가 있다면 물리적인 연결의 세계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일찌감치 감독의 이력을 보증한 1980년대 프롤레탈리아 3부작(<천국의 그림자>, <아리엘>, <성냥공장 소녀>)과 거의 비슷한 룩으로 찍혔고 여전히 80년대의 한 풍경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이 영화의 시제는 다시 말하지만 2024년이다. 상술한대로 그것은 피할 수 없이 악화될 미래일 수도 있지만, 달리 보면 연결이 있을 때 우리에게 미래가 생길 것이라는 희망의 전언도 된다.

빈곤은 대단희 희박한 빈도로 현대 영화의 주제로 채택된다. 가난한 인물이 나올 수는 있어도 빈곤이 그 자체로 영화의 정신이 되는 경우는 더더욱 보기 힘들다. 멜로드라마의 존재 이유 중 하나는 만연한 가난과 계급의 문제를 대중이 사랑할 만한 이야기로 가공해 사회의 폐부를 찌른다는 데 있다. 그렇지 않은 빈곤의 적나라한 재현은 관객으로 하여금 얕게는 우울을, 깊게는 수치를 불러내 고통을 부른다.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는 러브 스토리의 원형과 현실의 냉엄한 조건을 천연덕스럽게 뒤섞어 그 틈새를 파고든다.


영화 <사랑은 낙엽을 타고> 스틸컷


<사랑은 낙엽을 타고>에서 자주 회자되는 한 장면은 안사와 홀라파의 소박한 첫 저녁식사다. 안사는 자신의 끼니 대신 작은 스파클링 와인과 한 쌍의 식기를 집에 들이고 홀라파는 술과 담배를 포기하고 꽃을 사는 행위로 성사된 이 만남은 위태롭게 지속되다가 끝내 결렬된다. 마주앉았던 식탁에서 자리를 옮겨 안사의 소파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의 대화가 서로를 붙잡지 못하고 미끄러지는 가슴 아픈 순간도 있다. 연애 상대를 집에 초대한 안사가 괜스레 ‘식전주’나 ‘대모에게 물려받은 집’ 같은 것을 말하게 될 때, 그런 안사에게 화답하지 못하는 홀라파가 작은 침대를 지적하거나 더 많은 술을 찾게 될 때 라디오에선 로맨틱한 음악 대신 우크라이나 전쟁 소식이 흘러 나온다. 단순하지만 분명한 효과를 염두에 두고 설계된 프로덕션 디자인은, 종전까지만 해도 예비 연인의 긴장과 흥분으로 노랗게 빛났던 식탁 위의 아름다움을 저 멀리에 둔 채로 어두컴컴한 방 한 구석에 홀라파를 세운다. 회색 벽 앞에서 강한 빛과 그림자로 양분된 홀라파와 안사는 술에 대한 서로 다른 입장으로 대치하지만, 알콜에 의존하는 사람과 그 곁에서 고통받았던 이들의 고난이 가난과 주로 한통속이라는 사실만큼은 끈끈히 공유한다.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은 이들의 유대가 하룻 저녁의 앞과 뒤에서, 한 집의 이방과 저방에서 쉬이 나뉠만큼 연약하다는 사실을 적시한다. 뛰쳐나온 홀라파가 같은 길을 되돌아 사라지는 순간에 이르러서야 나는 꽃을 든 홀라파가 혼자 뚫고 걸어왔던 거리 저편의 어둠이 얼마나 새카맣고 적막한지를 바라본다. 카메라는 홀라파의 실루엣이 어둠에 묻혀 아예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혹자는 <사랑은 낙엽을 타고>에 ‘필 굿 무비’라는 수식을 붙이지만,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이 영화에 허락된 다정함, 온기, 연대, 귀중하고 아름다운 눈빛을 기분좋게 닫혀버린 영화 안쪽에 안전하게 보존하려는 이야기꾼은 못 된다. 두 사람이 잠시 소원해진 사이에, 기어코 홀라파의 육체적 파열을 목격하게 된 순간에 더더욱 그런 확신을 하게 됐다. 따뜻하다고 해서 잠재된 비참함이 상쇄되지는 않으며 인물들이 덜 상처받으리란 보장도 없다. 지나치게 급작스럽고 불운한 사고 이후, 두 연인의 데이트 무비 <데드 돈 다이>는 불쑥 고약한 농담으로 진화한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가 ‘데드 캔 러브’를 말하는 영화라면? 그럼에도 방점을 찍자면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는 절망의 나락에 낙착하지 않는다. 상처받은 ‘이후’를 말하려는 것이다. 착취 당한 이들이 착취 없는 서로의 관계로부터 되살아나는 가능성이 기어코 병실 밖으로 걸어나온 두 남녀에게 허락됨에 안도한다. 그리고 이 가능성을 염원하기 위해 아키 카우리스마키가 불러온 마지막 영화의 친구가 찰리 채플린이라는 사실에 감탄한다. 공장의 톱니바퀴 사이를 빠져나온 연인이 눈앞에 펼쳐진 드넓은 대지를 향해 전진했던 <모던 타임즈>(1936)의 엔딩이 <사랑은 낙엽을 타고>의 안사, 홀라파, 그리고 (올해 <추락의 해부>에 밀려 아쉽게 칸영화제 팜 도그를 놓친) 견공 ‘채플린’의 모습과 겹쳐진다. 엔딩에서 태양처럼 떠오른 것은 희망이라는 오래된 단어의 진위가 아니다. 이 순간 문득 믿고 싶어지는 것은 따로 있었다. 동시대의 일원들을 다독이는 무뚝뚝한 얼굴의 예술가가 영화 안에 기입한 안간힘이다. 영화가 끝난 뒤 나와 내 동료들이 그랬듯,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영화 <모던 타임즈>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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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소미 <씨네21> 기자

보는 사람. 영화를 쓰고 말하는 기자. <씨네21>에서 매주 한 권의 잡지를 엮는 일에 가담 중이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독립 영화잡지 <아노>의 창간 에디터, CGV 아트하우스 큐레이터 등으로 일했다. 영화의 내면과 형식이 만나는 자리를 오래 서성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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