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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 빼기의 기술 : 르세라핌 'Perfect Night'
르세라핌 'Perfect Night'
르세라핌의 ‘Perfect Night’이 발매 한 달 만에 주간 음원 차트 1위에 올랐다. 흥미로운 건 이 노래가 데뷔 후 지금까지 르세라핌이 집중해 보여준 결과물과는 전혀 다른 접근 방식을 취한 곡이라는 점이다.
르세라핌의 ‘Perfect Night’이 발매 한 달 만에 주간 음원 차트 1위에 올랐다. 1위를 차지한 곳은 음악 사이트 멜론. 10월 27일 공개된 노래는 같은 차트에 74위로 처음 진입한 뒤 22위와 4위로 매주 순위를 높여 갔다. 주간 차트 1위는 지난 11월 19일 실시간 순위인 ‘톱 100’에서 첫 1위에 오른 뒤 거둔 성과다. 벅스나 지니뮤직 같은 타 음악 사이트에서도 5위권 내의 높은 순위를 유지하고 있다. 전곡을 영어로 가창하는 노래에 여전히 박한 국내 차트 반응을 생각하면 꽤 드문 인기다. 해외 반응도 좋다. ‘Perfect Night’은 미국 빌보드가 발표한 12월 2일 자 최신 글로벌 차트에서 9위를 기록하며 팀의 커리어 하이를 기록했고, 세계 최대의 음악 플랫폼 스포티파이에서는 누적 재생 수 5,000만회를 넘겼다. 지금까지 르세라핌이 발매한 곡들 가운데 가장 빠른 성장세다.
흥미로운 건 이 노래가 데뷔 후 지금까지 르세라핌이 집중해 보여준 결과물과는 전혀 다른 접근 방식을 취한 곡이라는 점이다. 사실 르세라핌은 그 언제보다 주체성이 강조된 일명 4세대 여성 그룹 가운데에서도 가장 강렬한 메시지를 전하는 팀으로 잘 알려져 있다. ‘나는 두렵지 않다(I'M FEARLESS)’는 영어 문장을 애너그램(문자를 재배열해 다른 뜻을 가진 단어로 바꾸는 행위)으로 바꾼 팀 이름 유래와 나의 세상을 흔들고 꺾으려는 모든 것에 도전하겠다는, 지금까지 발표한 모든 타이틀곡에 담긴 굳은 의지가 대표적이다. 음악과 메시지가 워낙 강하다 보니 퍼포먼스도 자연스레 그를 따랐다. 지난해 각종 연말 시상식에서 보여준 르세라핌의 묵직한 퍼포먼스는 그대로 팀을 대표하는 캐릭터가 되었고, 올해 발표한 정규 앨범 수록곡 ‘이브, 프시케 그리고 푸른 수염의 아내’의 인기까지 견인했다. 여성 그룹은 물론 케이팝 전체로 시선을 넓혀봐도 쉽게 소화하기 어려운 어둡고 숨 가쁜 저지 클럽 리듬에 맞춰 이 정도는 일도 아니라는 듯 춤추는 멤버들의 눈에는 언제나 형형한 빛이 맴돌았다.
그 빛은 ‘Perfect Night’에 이르러 거리를 가득 채운 연말 일루미네이션으로 모습을 바꿨다. ‘우리가 함께라면 이보다 완벽한 밤은 없다’며 노래하는 ‘Perfect Night’은 모난 데 하나 없이 꿈처럼 흘러가는 달콤한 팝 트랙이다. 낭만적인 기타 연주와 뭉근하게 울리는 투 스텝 비트는 포근하게 울리는 멤버들의 목소리와 함께 지금 이 밤이 달빛을 따라 어디까지고 흘러갈 것 같은 착각마저 들게 한다. 손끝까지 온통 힘을 뺀 하나같이 느긋한 이 무드는 성큼 찾아온 연말 분위기에 맞춰 더 많은 귀를 불러들이는 중이다. 얼마 전 캐럴 ‘징글벨’과 매시업 한 한층 신나는 ‘홀리데이 리믹스’ 버전까지 따로 발매한 걸 보면, 모르긴 몰라도 노래를 만든 사람들도 이 노래의 연말 무드에 꽤 진심이구나 싶다.
힘주기에 특화된 그룹이 힘 빼기까지 능숙한 건 좀 반칙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사실 이건 르세라핌에 갑작스러운 선택은 아니다. 이들은 데뷔작부터 지금까지 발표한 모든 앨범에 자신들만의 힘 빼기 기술을 응용한 다양한 팝을 노래해 왔다. 첫 앨범 [FEARLESS]에는 훵키한 베이스와 몽환적인 신시사이저 연주가 매력적인 ‘Blue Flame’이, [ANTIFRAGILE]에는 90년대 여성 R&B 보컬 그룹 풍 느낌 물씬한 ‘Impurities’와 용기 내 드러낸 맨얼굴 같은 솔직하고 풋풋한 목소리가 인상적인 ‘Good Parts’가 있었다. ‘Perfect Night’는 어쩌면 앞서 언급한 노래를 통해 견고한 틈새로 조금씩 그러나 꾸준히 팝적 보드라움을 드러내던 멤버들이 모여 이제야 여는 기분 좋은 연말 자축 파티 같은 곡일지도 모르겠다. 아, 연말까지 이곳저곳에서 꾸준히 울려 퍼질 이 노래가 유명 슈팅 게임 ‘오버워치 2’와의 협업이라는 사실은 비밀로 해두자. 특별한 이유는 없다. 어쩐지 비밀로 해야만 할 것 같다는 기분이 드는 게 나뿐만은 아닐 거라 믿는다.
*제목은 김하나 작가의 에세이 ‘힘 빼기의 기술’ 제목을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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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음악평론가.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케이팝부터 인디까지 다양한 음악에 대해 쓰고 이야기한다. <시사IN>, <씨네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