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티라노의, 모두의 크리스마스 이야기
『나와 티라노와 크리스마스』 경혜원 작가 인터뷰
이 책이 독자들, 특별히 어린이 독자들에게 일상의 탈출구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2022.12.13)
바람은 차겠지만 툇마루에 배를 깔고 엎드려서 놀 만은 한 11월의 오후 볕이다. 아이는 크레파스로 달력 뒷장 하얀 종이에 제가 좋아하는 것들을 몽땅 그린다. 수염이 까끌한 아빠 얼굴, 하나뿐인 단짝이지만 생각만큼 잘 그려지지는 않는 강아지 돌돌이, 그리고 티라노, 티라노사우루스! 크리스마스를 앞둔 주말에 상점에 들른 아빠는 점원의 추천으로 아이가 그린 공룡과 똑 닮은 장난감을 샀다. 이제 이 선물을 잘 숨겨서 일주일 동안 들키지 않으면 된다. 아빠는 마침 눈에 띈 삽을 집어 마당 한쪽에 상자를 묻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탁탁 손을 턴다. 무심코 꽂아 넣은 삽날이 무엇에 닿았는지는 까맣게 모른 채. 언제나 그만의 방식으로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지도 몰랐던 환한 빛의 감정들을 일깨우는 작가 경혜원의 새 그림책 『나와 티라노와 크리스마스』는 이렇게 시작한다.
'『나와 티라노와 크리스마스』는 역시 경혜원 작가의 그림책이군' 하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크리스마스라니!' 의외이기도 해요. 어떤 이야기인가요?
12월 24일 밤에 벌어지는 환상적인 만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한적한 동네에서 아빠, 그리고 강아지 돌돌이와 함께 사는 아이가 그토록 바라던 공룡 티라노사우루스를 만나요. 동시에 땅속에서 수천만 년 동안 서로를 그리워하던 아가와 엄마의 만남도 이루어집니다. 원제가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는데요. 크리스마스 선물로 가장 원하는 선물을 주인공들에게 주고, 그 마음을 독자들께도 드리고 싶어 만든 책입니다.
선생님은 그동안 수많은 공룡을 이야기 속에 등장시켜 왔는데, 이번에는 해골 공룡이에요. 이야기 속 캐릭터들을 어떻게 구상하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어느 하나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인물들이에요.
크리스마스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주인공들로 크리스마스 책을 만들고 싶었어요. 처음에는 기원전에 죽었기 때문에 크리스마스가 뭔지 전혀 모르는 아기 해골이 우연한 기회에 땅 위로 나와 크리스마스를 겪는 이야기를 생각했는데,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공룡 화석이 생각났어요. 화석이 묻혀 있는 곳이라면 개발이 된 도심지보다 한적한 시골이겠지요. 아빠 캐릭터도 크리스마스를 야무지게 준비하는 세련된 아빠보다 다소 투박하고 무뚝뚝하지만 아이에 대한 애정만은 가득한 아빠가 어울릴 것 같았어요.
아이는 겉으로 보기에는 엄마도 안 보이고 아무렇게나 자라는 듯하지만 넘치는 사랑을 받아서 마음이 충만하고 사랑을 나눌 줄 아는 아주 귀여운 아이로 만들고 싶었어요. 그래서 볼도 통통하게, 몸짓도 발랄하게 그렸습니다. 강아지 돌돌이는 처음엔 보조 캐릭터로 생각했다가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없어서는 안 될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됐어요. 결국, 돌돌이 덕분에 환상의 크리스마스 이브가 벌어지게 된 것이거든요.
한 권의 그림책을 만드는 과정에도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이 있기 마련인데요. 작업을 진행하시면서 가장 어려웠던 고비는 언제 찾아왔었나요? 어떤 방법으로 위기를 탈출하셨나요?
이 책은 저에게 선물 같은 책이기도 한 것이 이야기 구상부터 출간까지 모든 과정이 순풍을 탄 배처럼 막힘없이 술술 풀리고 재밌었어요. 보통은 캐릭터 이미지를 구상할 때 고민을 많이 하는 편인데 이 책의 주인공들은 거의 한 번에 슥 그렸습니다. 장면들도 마치 애니메이션처럼 머릿속에서 계속 흘러서 저는 그 장면들을 붙잡는 마음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래서 만화 형식의 책이 되었어요. 위기는 의외의 순간에 찾아왔는데, 워낙에 이미지가 애니메이션처럼 흐르다 보니 채색도 흔히 떠오르는 영상의 느낌처럼 꽉 채우는 방식으로 한동안 진행했는데, 오히려 굵은 선으로 슥슥 그린 스케치보다 그림에서 전해지는 감정이 잘 안 보이더라고요.
다시 스케치와 채색된 그림을 번갈아 비교한 끝에 선 안을 색으로 채우는 그림이 아니라, 스케치의 선을 살리는 방식으로 다시 방향을 잡았어요. 당시 여러 일이 겹쳐 있어서 판단력이 흐릴 때였는데, 편집자가 그림이 품어야 할 매력이 무엇인지 잘 상기시켜 줬어요. 지금이야 순풍이라고 이야기하지만, 당시에는 내년 크리스마스에 출간하게 되면 어쩌지 싶기도 했습니다. 보통은 일이 잘 안 풀리면 일단 내려놓고 다른 작업을 하거나 쉬거나 하는데요. 이 책은 이 시기에 꼭 나와야 할 책이다 보니 딴짓할 시간조차 없어서 머리를 쥐어 뜯으며 그냥 붙들고 있었어요.
서술이 없는, 만화 형식의 그림책이에요. 칸과 칸이 이어지는 흐름 속에서 이야기가 진행되고, 읽어 가다 보면 도저히 눈을 뗄 수 없는 장면들이 자꾸만 등장해서 책장을 넘기기가 어렵습니다. 아기 공룡이 근육도 없이 뼈다귀만으로 표현하는 감정들이라든가, 믿음직한 안내자 돌돌이의 절묘한 포즈, 적재적소에 숨겨진 웃음 버튼 등등 셀 수 없어요. 그중에 선생님이 가장 사랑하는 장면은 어디인가요? 또 이 장면만큼은 독자들이 놓치지 말았으면 좋겠다 싶은 컷이 있다면 살짝 귀띔해 주세요.
저는 어린 아이들의 몽글몽글하고 토실한 뒤태를 너무 사랑하는데요. 아빠가 뜯어져 버린 장난감 박스를 버리고 리본으로 다시 포장을 하는 장면에서 아이와 돌돌이가 TV를 보는 뒷모습이 있어요. 아빠가 아이 몰래 무엇을 하려면 이때밖에 없겠다 생각했습니다. 뒤에서 전쟁이 나도 돌아보지 않을 것 같은 굳건한 자세로 아이가 만화에 몰입하는 장면입니다. 더불어 곳곳에 등장하는 푸짐한 아빠의 뒤태도 챙겨서 봐 주세요.
그리고 책의 거의 마지막, 아이가 공룡과 헤어지고 집 안으로 들어올 때 '아빠!'하고 부르며 달려오는 장면이 있는데요. 저는 이상하게 제가 그렸는데도 이 그림을 보면 울컥하더라고요. 충만한 기쁨을 맛본 아이의 표정이 너무 선하고 편안해 보여서요. 자신에게 온 기쁨을 온전히 만끽하고, 충분히 만족하고, 또 나누는 모습은 제가 언제나 바라지만 뜻대로 못하는 모습이기도 하거든요.
첫머리의 헌사를 크리스마스 선물을 옷장 속에 숨겼다가 들킨 아빠와, 한 번의 크리스마스밖에 보내지 못했던 돌돌이에게 보내 주셨어요. 선생님의 어린 시절 기억에 남은 크리스마스는 어떤 순간이었는지 궁금해요.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녀서 크리스마스 전날 밤은 교회에서 어린이 공연을 했어요. 일 년 중 하루, 엄마가 제 얼굴에 화장을 해 주시는 날이었는데 무대에서 하는 공연보다 화장을 하고 무대 의상을 입는 것이 너무 설레고 기뻤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저는 제가 그날 밤의 주인공의 된 것 같았어요. 크리스마스 선물은 엄마에게 한 번, 아빠에게 한 번 받아 봤어요. 엄마에게 받은 것은 사실 유치원에서 산타 할아버지에게 받은 것인데, 집에 와서 열어 보니 제가 너무 갖고 싶었던 금색 은색이 포함된 48색 크레파스 세트였어요. 아빠에게 받은 것은 헌사에 쓴 『빨간머리 앤』 다섯 권 시리즈입니다. 당시 고학년답게 예리한 감으로 아빠가 어딘가에 선물을 숨기셨다는 것을 눈치챘어요. 아빠가 안 계신 낮에 삼남매가 옷장을 뒤져 각각 자기 선물을 찾고 좋아했던 기억이 나요.
긴 이야기를 완성하는 과정에서 작업 메이트가 되어 주었던 음악이라든가 영화라든가, 또 다른 이야기들이 있었을 것 같아요. 소개해 주세요.
팀 버튼의 <크리스마스 악몽>을 좋아합니다. 제가 가장 많이 본 영화인데 아마 크리스마스와 해골 조합의 영감을 이 영화에서 얻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뮤지컬 영화여서 음악도 너무 좋아요. 일 하는 동안 자주 들으며 따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타이틀곡이라고 할 수 있는 'This is Halloween'은 '마릴린 맨슨(Marilyn Manson)'이 커버한 버전도 있는데요, 록 스피릿이 있는 분들이라면 꼭 들어 보시길 강추드립니다.
가사가 없는 음악이 필요할 때 자주 들었던 음악은 아이슬란드 피아니스트 '비킹구르 올라프손 (Vikingur Olafsson)'의 <드뷔시-라모(Debussy-Rameau)> 앨범입니다. 수록곡 중 라모의 곡을 편곡한 'The Arts and the Hours'라는 곡을 특히 좋아해요. 그 음악을 듣고 있으면 '어떻게든 나도 그림책으로 예술의 언저리를 빙빙 돌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어서 뻐근한 감동이 오기도 하고 가벼운 한숨이 나오기도 합니다.
선생님은 "'그림책'이란 힘들 때마다 읽으며 나를 이루는 나의 본령, 나의 중심에 의미를 부여하는 이야기"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선생님 말처럼 그림책은 흔들리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마음속에 붙잡고 설 손잡이가 되어 준다는 점에서 아이와 아이였던 어른 모두에게 중요한 매체라고 생각해요. 이제 『나와 티라노와 크리스마스』를 읽게 될 독자들에게 한 마디를 보내 주신다면요?
얼마 전 박정선 선생님이 진행하는 어린이 라디오에 출연해서 청취자에게 일곱 글자로 하고 싶은 말을 해 달라는 질문을 받아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책 속으로 도망쳐!"
살면서 현실이 버겁다고 느끼는 순간들이 많잖아요. 어린이들도 예외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저는 어릴 때 힘든 순간들이 더 많았는데 현실을 제어할 힘이 아직 제겐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에요. 그럴 때마다 제가 도망쳤던 곳이 바로 책이었고, 수많은 작가들에 제게 그 탈출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이 책이 독자들, 특별히 어린이 독자들에게 일상의 탈출구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경혜원 (글·그림) 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그림책을 짓고 있다. 따뜻하면서도 사랑스러운 상상력으로 우리 곁의 존재들을 조금 다른 눈으로 보게 하는 그림책 작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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