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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누리의 소녀 등장] 졸업 : 쪽지에 적어 전하는 말 - 마지막 회
그늘, "3. 밖으로 드러나지 아니한 처지나 환경", 표준국어대사전
나는 이따금 특정 지을 수 없는 어떤 청소년들에게 발견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시를 쓴다. 무엇이 되지 않아도 되고, 무엇도 이루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은 마음으로. (2022.12.13)
『한여름 손잡기』의 권누리 시인이 좋아하는 '소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세계를 지키기 위해 힘껏 달리는 '소녀'들을 만나보세요. |
올해는 청소년과 만나고 대화할 기회가 자주 있었다. 종종 청소년들에게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살아가며 어떤 것을 이루고 싶은지에 대해 질문하기도 했다. 좋아하는 이유를 포함한 구체적인 문장을 만들어내거나 흔흔히 선호와 취향에 대해 사랑을 표현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좋아하는 게 없다거나 하고 싶은 게 없다는 식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럴 때면 나는 질문을 바꿔 다시 묻곤 했다.
"그러면, 하고 싶지 않은 건 뭐예요?"
"싫어하는 것에는 어떤 것이 있어요?"
좋아하는 것을 바로 떠올리지 못해 망설이거나, 뚝뚝하게 곧장 없다고 대답하던 청소년도 싫어하는 것을 물어보면 한두 가지 이야기를 나눠주었다. 버섯, 공부, 가지, 수행 평가, 공포 영화, 발라드, 졸업과 입학, 입시, 책임감 없는 사람... 최근 몇 년 사이 소수의 싫어하는 것을 빼면 모조리 좋아한다고 선뜻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지만, 청소년기에는 유난히 좋아하던 것 몇 가지를 빼면 모두 싫어하거나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 시기에 나는 재활용 작가의 웹툰 <연민의 굴레> 속 주인공 '차련'처럼 무기력하게 가만히 (절대 '얌전히'가 아니다) 있다가, 난데없이 분풀이를 하다가, 멍하니 시간을 흘려보내고 또 바라는 것 없이 천천히 희미해지는 (혹은 그러기를 택하는) 만화와 소설 속 청소년 인물에게 마음 한 칸을 내주었다. 남 일 같지 않아서 그랬고, 새로운 사람과 사건을 만나게 되며 한 뼘, 적어도 손가락 한 마디만큼이라도 성장하고 마는 '주인공'이 되고 싶어서 그랬다. 그래서 조금 어른이 된 나는 마땅히 좋아하는 것이 없고, 싫어하는 것만은 명확한 청소년들에게 월권처럼, 꼭 무엇이라도 된 것처럼 말해버리곤 한다.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괜찮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이든 좋아할 수 있고, 그래도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먼저 고백해 보자면, 아주 옛날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나의 '좋아하는 것 목록'에서 빠지지 않는 한 가지는 학원물이다.1) 학교를 싫어하는 만큼 교복을 좋아해서 아껴 입었고, 또 학교를 도망치고 싶었던 만큼, '학생'이 나오는 작품을 좋아했다. 드라마 <학교 2013>, <응답하라 1997>도 열심히 보았고, 오바나 미호의 만화 『아이들의 장난감』이나 타카야 나츠키의 『후르츠 바스켓』도 여태 사랑하고 있다.
최근, 즐겁게 보고 있는 타카마츠 미사키의 만화 『스킵과 로퍼』는 '이시카와현 변두리 마을'에서 자란 이와쿠라 미츠미가 도쿄의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사랑과 용기를 포기하지 않는 태도에서 태어나는 빛을 사랑하는 나는 또 속절없이 미츠미에게 반해버리고 말았다. 『스킵과 로퍼』 속 미츠미는 다정하고, 씩씩하고, 꿋꿋하게 동경하는 마음을 잃지 않는다. 근사한 것("베프가 소꿉친구라니 근사한 일이에요."2))을 잘 발견하고 태연하게 노력하며, 무엇보다 '다소 거창하게 넘어질 때가 많은 인간이지만 그만큼 엄청나게 잘'3) 일어난다. 그런 미츠미는 1학년 1학기 기말고사 대비 공부 모임을 하자고 이야기하던 중 같은 반인 무라시게 유즈키, 쿠루메 마코토, 에가시라 미카 등을 떠올리며, '같은 반이 아니었으면 친구가 되지 않았을 타입'이라는 생각을 한다. 나는 그 말에 섞인 안도와 경탄, 선의가 좋았다.
제도권 교육, 학교 안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사람이라면, 누군가와 '같은 반'이 된다는 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얼마간 이해할 것이다. 나와 친한 사람, 잘 맞는 사람, 좋지만 친해지지 못할 것 같거나 어려울 것 같은 사람, 싫은 사람, 잘 맞지 않는 사람, 절대 가까워지고 싶지 않은 사람, 그리고 아무래도 관심이나 흥미가 가지 않는 사람까지. 타인을 자신의 방식대로 구분하고 분류할 수 있게 된다고 해도, 어떤 '유형'의 사람이든 좁은 집단 내에서 타인을 만나고 경험하는 일은 꼭 구분과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누군가와 같은 반이 되고, 또 그 사이에서 '친구'가 되는 일은 늘 그랬던 것 같다.
청소년기의 내가 그랬듯 타인에게, 그리고 그 누구보다 스스로에 관대하게 굴지 못하는 청소년들이 여전히 존재할 것이라는 막연한 확신이 있다. 도망치고 싶은 마음, 포기하고 싶은 마음과 슬픔, 절망, 좌절, 막막함을 견디고 있는 청소년들을 자주 생각한다. 내가 청소년이던 시기에 (느리더라도 조금씩) 변화하고, 서로를 이해하며 '구원에 가까운' 사랑을 기꺼이 시도하던 '대중 매체 속 청소년 인물'을 지켜보고 응원하며 시간을 보냈던 것처럼, 나는 이따금 특정 지을 수 없는 어떤 청소년들에게 발견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시를 쓴다. 무엇이 되지 않아도 되고, 무엇도 이루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은 마음으로.
김윤주 편집자님으로부터 처음 '대중문화 속 내가 사랑한 소녀들'이라는 주제로 칼럼 연재를 제안받고 기획하던 시기부터, 내가 한때 사랑했고 여전히 사랑하고 있는 나의 '소녀'에 대해 쓸 수 있어 기뻤다. 연재를 이어가며 내가 사랑한 '소녀'들을 떠올릴 때마다, 매번 청소년기에 대한 기억이 따라붙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다. 여러 일과 마음을 함께 축적해온 멀고도 가까운 친구와 동료들, 사랑하고 존경하는 아이돌들, 사려 깊은 작가들와 그 작품 속 인물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크다.
내 인생의 전반에서 나를 살게 해준 것은 다정하고 현명한 여자들이었지만, 나를 강하게 만든 건 용기있고 씩씩한 소녀들이었다. 이 자리를 빌려 세상의 모든 소녀들과 소녀였던 사람들, 소녀로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감사와 사랑을 전한다.
1) 학원물, "학교에서 학생들의 생활과 그들 간의 관계를 묘사한 대중문화의 한 장르", 고려대한국어대사전. 2) 『스킵과 로퍼』(타카마츠 미사키) 1권 중 3) 위의 책 4권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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