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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미의 혼자 영화관에 갔어] 그들 각자의 팬티와 고통 -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김소미의 혼자 영화관에 갔어 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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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입고 있던 자기 팬티를 벗어던지면 다른 한 사람이 그것을 손빨래하고 이미 빨아둔 팬티를 상대에게 건네는 축축한 교환에 익숙하다. (2022.11.18)


영화 평론가 김소미가 극장에서 만난 일상의 기술을 소개합니다.
서울을 살아가는 30대로서 체감한 영화 속 삶의 지혜, 격주 금요일 연재됩니다.



살면서 몇 번 그런 일이 있었다. 존재를 다 걸고 간절하게 부탁한 적이. 제발 그러지 말아 달라고 혹은 사과해 달라고 빌었다. 간절함을 간절함으로 돌려받는 경우는 드물었다. 서로를 버텨내기 위해 무감한 얼굴로 일관하다가 우리들 중 한쪽이 가끔 무너질 때, 그러니까 내가 절규할 때, 나의 어른들은 갑자기 관객처럼 굴었다. 남처럼 황당한 표정을 짓거나 웃곤 했다. "갑자기 왜 저래, 혼자?"라든가 "별 일도 아닌데 청승맞게"같은 간단한 말로 고통은 맥없이 축소되었다. "너만 힘드니? 내가 더 힘들어"의 논쟁은 그나마 생산성이 있는 축이었다. 그러다 인생의 어느 시점에, 가족이 인정해주지 않는 내 고통을 연인과 친구들이 대신 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누군가는 뒷걸음질 치며 떠나갔다. 건드리면 매번 자기 슬픔만 우수수 쏟아지는 사람처럼 두려운 타인은 없는데, 그게 나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한동안 망연자실했다.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에서 엄마 수경과 딸 이정은 팬티를 공유하지만 그 문제로는 결코 싸우지 않는다. "내 팬티 입지 마, 네가 사 입어" 같은 대사가 나올 법도 한데 팬티로 다투기는커녕 한 사람이 입고 있던 자기 팬티를 벗어던지면 다른 한 사람이 그것을 손빨래하고 이미 빨아둔 팬티를 상대에게 건네는 축축한 교환에 익숙하다. 그들은 한 아파트에 살고, 같은 서랍과 냉장고를 열고, '흉기차'를 나누어 쓴다. 갑작스런 정전으로 냉장고가 멈추면 아이스크림이 녹기 전에 위장에 넣어 해치우는 일에도 순순히 공동의 사명을 나눈다. 밀폐 용기에 아무렇게나 담겨 절여지고 들러붙은 반찬들같다. 이들은 서로를 참을 수 없어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보다 더 잘 참을 수는 없을 정도다.



그런 이 모녀에게도 절대로 공유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서로의 고통이다. 영화 초반부, 마트에서 엄마를 찾아 헤매던 딸 이정은, 한 소년이 들고 있던 풍선을 거칠게 터뜨린 뒤, 사람들 사이를 헤쳐 나가는 엄마 수경을 발견하고 황급히 뒤따른다. 마트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우리는 이해할 수 없다. 의도적으로 정보가 단절된 이 장면에서 관객이 목격을 요청받은 것은 사건이 아니라 이미 고장 나 버린 사람의 상태일 뿐이다. 단 둘이 남겨진 차 안에서 수경은 이정의 씩씩대는 숨소리를 견디지 못해 발작적으로 폭력을 가한다. 기괴한 몸짓과 단말마의 신음이 뭉쳐진 광경을 영화는 참 냉정하게도 바라본다. 직후 수경이 차로 이정을 치면서 모녀는 차량 급발진 여부를 놓고 법정도 오가지만, 그들이 일상에서 겪는 감정의 격랑과 대조하면 시시비비의 문제는 차라리 가벼워 보일 지경이다. 이정의 법정 진술은 수경의 처벌을 원해서라기보다 그 무렵 엄마의 서랍에서 발견한 자신의 편지 — 정신적·육체적 학대를 멈추어 달라는 유년 시절의 호소 — 를 스스로 상기하기 위한 행동이기도 하다. 이정은 수경이 단 한번만 제대로 사과하길 바란다. 오래 묵살되어 심지까지 젖어버린 고통의 초를 끄집어내 다시 불붙이는 이유는 그것이다. 딸은 엄마가 자기 고통의 장막을 걷어내고 한번만 먼저 자신을 들여다봐주길 기다린다.

영화의 화면은 총 세 번 암전된다. 수경이 이정을 차로 쳤을 때, 이정이 탄 차가 급발진으로 골목 어귀에 처박힐 때, 이윽고 폐차장에서 모녀의 붉은색 자동차가 영영 부서져버릴 때다. 같은 자리에 수경과 이정을 태우고 공평히 두 번의 충격을 경험한 차가 볼품없이 찌그러져 형체를 잃어갈 때 영화는 앞서 발생시킨 암전보다 훨씬 긴 어둠을 스크린에 입힌다. 죽음 직전의 차가 생의 중요한 기억을 간신히 떠올리는 것 같다. 암전을 거쳐 떠오르는 순간은 이정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의 일이다. 딸의 고등학교 졸업식에도 불참한 엄마는 늦은 밤 술 취한 채 귀가해 잠든 딸을 흔들어 깨우고 사진을 찍는다. 아직 서로 사랑한다고 믿을 수 있었던 시절의 희망이 어둠 속 플래시처럼 낯설고 덧없이 번쩍거린다. 하지만 모녀의 차는 이미 부서졌다. 현재로 돌아오면, 한밤중 정전된 집안에서 샤워 중이던 엄마가 딸을 부른다. 핸드폰 플래시를 켜서 욕실 샤워기 앞에 선 이정이 엄마의 알몸을 비출 때 수경은 그답지 않게 부끄럽고 슬퍼 보인다. 어둠 속에서 작고 덧없는 광원에 의지해 살아온 두 사람의 관계는 이제 더는 돌이킬 수 없어졌다. 다음날 이정은 캐리어를 들고 조용히 집을 나선다.

열정을 되찾기 위한 싸움은 얼마나 격렬하고 처절하든 모종의 매혹을 품고 있다. 슬픈 것은 냉정으로 돌아서기 직전의 싸움이다. 수경과 이정의 생존은 냉정을 필요로 한다. 소리 없는 비명으로 점철된 이 영화는 그래서 거대한 재출산의 의례 같기도 하다. 내 몸을 잠식한 아이를 밀어내는 고통, 질식하기 직전의 상태로 나를 짓누르는 산도를 빠져나오는 고통이 각기 재현되고, 순리에 따라 종결된다. 두 번째 분리의 결과는 회복도 화해도 아니다. 급발진 하는 차, 정전되는 집, 바닥에 흘러나온 녹고 상한 음식의 잔해를 통해 영화는 사람과 관계의 변질을 물리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애쓴다. 고치거나 치우거나 그마저 안되면 잠시 버려두라는 설득을 모녀의 공유물들로 대신한다. 이정은 그렇게 차를 부수고 집을 나와 자기 속옷을 사면서 때늦은 독립의 의식을 치른다.



몸으로 이어진 엄마와 자녀의 관계에서 이별은 종종 비극이나 파탄이 아니라 그 자체로 구원일 때가 있다. 비극적인 것은 모녀 내부의 갈등이 아니라 두 여자가 외부에서 겪는 관계의 실패다. 수경의 애인 종열(양흥주)은 수경과 전처의 딸에게 같은 코트를 사주는 남자이고, 이정이 섣불리 애착한 직장동료 소희(정보람)는 자신이 간신히 떨쳐낸 가족의 그림자를 끈적거리며 달고 들어오는 수경을 사랑할 여유가 없다. 무엇보다 지금의 수경과 이정에겐 그런 그들을 있는 그대로 지켜 볼 마음이 허락되지 않는다. 그러니 이제서야 다른 속옷을 입게 된 두 여자에게 남겨진 과제가 있다면, 밤마다 자기 고통을 할 수 있는 만큼이라도 손수 세탁하고 원망 없이 잠드는 일일 것이다.

이정이 더 이상 물에 빠진 사람처럼 타인의 건넨 사소한 호의에 필사적으로 매달리지 않기를 바라면서 극장을 나왔다. 이어서 내 머릿속에 연속 상영된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의 '엔딩 이후'는 자기만의 방과 차, 그것을 위한 자기만의 노동에 새롭게 적응한 한 여자의 모습으로 채워졌다. "여기가 진짜 집 같아. 나도 여기서 살까?" 같은 말을 섣부른 애착의 기쁨에 겨워 중얼거렸던 자신을 불현듯 떠올리고는 고개를 젓는 이정의 모습도 들어있었다. 모두, 그녀가 자기 방식대로 잘 해내고야 말 일들이다. 언젠가 나와 내 친구들이 그랬고, 또 그럴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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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소미 <씨네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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